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세진 Mar 04. 2024

학교를 보는 상이한 두 렌즈

기능 이론 vs 갈등 이론

    사람은 어떤 렌즈를 끼고 있냐에 따라서 세상을 다르게 볼 것이다. 검정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세상이 어둡게 보일 것이고, 노란 안경을 쓴 사람은 세상이 노랗게 보일 것이다. 친구들과 운동하다 그만 실수로 안경을 떨어뜨렸다고 가정하자. 운동장 모랫바닥에 시원하게 갈려버린 안경을 쓴다면? 아마도 흠집으로 비 내리는 세상을 만날 것이다. 사람에게도 세상을 볼 때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렌즈가 있다. 그 렌즈는 다른 말로 마음속에 박혀버린 굵직한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념으로 학교를 바라본다면, 학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 것인가?

    대학 시절 교육사회학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 한쪽에 상당히 불편했던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에밀 뒤르켐(E. Durkheim)에 따르면, 교육사회학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하여 분석된 지식과 기술 그리고 연구 방법을 교육 실제에 적용하는 학문이다.(1) 그러다 보니 사회학과 관련된 유명한 학자의 이름을 교육학 서적에서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뒤르켐을 포함하여 사회학의 아버지이자, 실증주의를 주창한 오귀스트 콩트(A. Comte), 다윈의 생물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진화론을 제창하여 논란을 일으킨 허버트 스펜서(H. Spencer), 『자본』을 저술한 공산주의 이론가 카를 마르크스(K. Marx)와 같은 학자를 교육학 서적에서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교육학이란 학문 자체가 독자적인 학문의 영역인지를 물을 수 있는 논란의 여지가 발생한다. 이 점은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논의해보기로 하고, 우선 그토록 내 머릿속으로 휘감아 돌던     ‘무언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학교 교육을 바라보는 두 개의 렌즈가 있다. 이른바 기능 이론과 갈등 이론이다. 나는 이 이론을 고등학교 시절, ‘사회‧문화’ 과목에서 배웠다. 기능 이론은 사회를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한다. 우리 몸에는 여러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조직, 기관과 같이 사회에서도 개인, 조직, 계급 등의 구성 요소가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끼리 조화를 이루어야 사회는 안정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갈등 이론은 사회의 본질은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의 연속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경쟁과 갈등은 무한한 인간의 욕구에 비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두 가지 렌즈를 모두 쓰고 학교를 바라본다면 그 모습이 각각 현저하게 달라 보일 것이다. 기능 이론에 따르면 학교 제도와 학교 교육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기여하고, 개인의 자아실현에도 도움을 주며, 균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며, 능력에 따라 공정한 보상이 주어지는 데 공헌한다. 반면, 갈등 이론은 이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학교 제도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위계질서를 재생산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영속화한다.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와 이익을 대변하며, 인간을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심지어 계층의 이동을 효과적으로 막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기능 이론의 관점은 공교육이라는 제도권 교육의 순기능이라고 알려진 점과 일맥상통한다. 나 역시 공교육이 정상화돼야 하고, 교육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학생들의 자아실현과 민주시민의 역량을 갖추게 하는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의심한 적이 없다. 학교 교육과 공교육 제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나는 교육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의 진로도 교사로 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적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집단에 어느 누가 몸담고 싶겠는가?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는 갈등 이론과 학교 교육을 연계하여 생각지 못했다. 오로지 입시의 범주에서만 생각하다 보니,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해 기능 이론과 갈등 이론의 차이와 특징을 정리해둔 표를 암기하기 바빴다. 그러나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갈등 이론을 연결 지으니 형용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학교란 곳이 도움이 필요한 사회 계층에 악영향을 주는 장소라면, 제도적 차원에서 그것이 존속하는 것 자체가 과연 바람직한가. 내가 선택한 진로의 방향을 틀어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할 것인가. 갈등 이론으로 파생된 여러 생각들이 상식을 찢어 놓았다.

    갈등 이론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K. Marx)와 베버(M. Weber)의 사상에서 연유하고, 이후 신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이론이 체계화되었다는 말은 어느 정도의 공감과 지지를 끌어냈다는 것을 방증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학자들이 하게 되었는지, 일상 속에서 사례를 찾기 위해 기억의 회로를 분주하게 돌려보았다.

칼 마르크스(K. Marx)

    유명한 토익학원을 친구와 함께 다녔던 적이 있다. 친구는 매 학기 대학등록금과 학원비를 벌기 위해 매일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다. 촉촉하게 적셔진 새벽 공기를 비집고 버스를 함께 타고 가던 어느 날, 그 친구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은 진짜 불공평한 것 같다. 남들은 부모가 등록금 정도는 내주는데, 나는 집에 돈이 없어서 매일매일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있는 집 자식들은 방학 때 어학연수니, 해외 봉사니 하면서 스펙을 쌓고 있는데 나는 일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다 보니, 학점도 떨어진다. 장학금은커녕, 나중에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이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고생 한 번 해보지 않고 공부만 해온 부잣집 자녀들에게 인생 공부해보는 셈 치고, 사서 고생을 시키는 부모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생과 내 친구의 고생은 본질적인 차이를 띤다. 내 친구의 고생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도 게임의 ‘나가기’ 버튼과 컴퓨터의 ‘리셋’ 버튼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입시라는 경쟁체제만 놓고 봤을 때, 가정의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처음부터 출발선은 각자가 다를지도 모른다. 내로라하는 강사의 사교육을 받으며,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관리와 학습 지도를 받아 온 학생들과 그럴 형편이 못 되어 당장 이것저것 신경 쓰며 학업을 수행할 수 없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학생 중 누가 유리하고 수월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큰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서울대학교 정시모집 입학생 중 서울 소재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통계로 살펴볼 수 있다. 서울의 인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으니까 당연한 게 아닌가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교육의 여건이 좋고 땅값이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이 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통계로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공교육의 아웃풋이 입시라면, 입시는 부자들에게 합법적으로 학벌과 인맥, 양질의 학업 분위기,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더욱 사회체제를 공고히 만들어 간다. 경쟁이 끝나면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으며, 점점 경쟁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청년들의 좌절은 사회를 향한 불만과 범죄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E.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 일리치의 탈학교론(de-schooling), 인간 해방을 부르짖은 브라질의 위대한 교육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의 『피압박자를 위한 교육』은 비슷한 맥락으로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 참고로 기능 이론에서는 범죄와 사회 불만 현상 등을 ‘병폐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학교는 정말 필요한 곳인가, 필요가 없다면 나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필요하다면 나는 학교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지독하게 늘어진다. 동료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내가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서도 자녀를 보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이 알게 모르게 사회 전체적인 틀에서 바뀌어야 할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일이 되지 않도록, 나는 작은 움직임 속에서 그 틀을 깨는 일을 해보고 싶다.

    결국에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되돌아온 게 아닌가 싶지만, 첫째로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자신이 세상의 구조나 환경에 휩쓸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세상과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로 인식하도록, 학교생활 속에서 학생들의 발달을 도울 것이다. 둘째로, 더불어 협력하여 사는 교육이 필요하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타인과 함께 수행하는 경험을 통해서 ‘나’와 ‘타인’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겸손의 미덕을 알도록 지도할 것이다. 셋째, 인권 교육이 필요하다. 인권 교육으로 다수가 함께 상생하는 중요성을 깨닫고 타인의 보편적 권리를 존중하는 심성을 가꾸어 나가도록 지도할 것이다. 세상은 불평등한 초등학교 시절은 교사의 말 한마디에 큰 영향을 받는 시기이다. 어릴 때부터 진정한 사랑을 담아 세 가지를 화분을 돌보듯 실천한다면 학교란 공간이 권력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몰인정화된 공간은 아닐 것이다.

    계속하여 이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학교는 두 렌즈로 보는 시선의 극명함 어느 한쪽만을 반영한 공간은 아닌 것 같다. 학교는 기능 이론이 주장하는 역할도 많은 부분 수행해왔으며, 갈등 이론이 주장하는 문제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 따라서 ‘나는 기능 이론 신봉자야’, ‘나는 갈등 이론으로 세상을 보겠어.’ 같은 극단적인 태도를 지닐 필요는 없다. 다만 학자들이 학교의 인상을 부정적으로 분석하게 된 근거는 교사로서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 원론적인 실천을 공교육 차원에서 차근차근 밟아간다면, 학생들이 이다음에 커서 경쟁의 승패에만 열중하는 인간으로 크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불가피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여 계층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더라도,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환경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는 인간미를 갖추고, 궁극적으로 함께 행복해지자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거대한 사회의 부조리에 작은 망치로 균열을 내는 일이 아닌가 싶다.



(1) 『쉽게 풀어쓴 교육학』(이병승, 우영효, 배제현 공저, 학지사, 2016)의 187쪽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2)  이 글은『쉽게 풀어쓴 교육학』(이병승, 우영효, 배제현 공저, 학지사)의 chapter5-제1절-2 ‘교육에 대한 사회학적 논쟁’을 참고하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