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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Feb 19. 2024

득천하영재이교육지(得天下英材而敎育之)

교육의 어원

    잠을 청하기 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역정을 돌이켜볼 때가 있다. 꾸준히 제작되는 인기 드라마는 내용의 특성과 성격에 따라 분위기를 바꿀 때, ‘시즌’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시즌 1과 시즌 2의 내용 전개와 배경, 초점이 맞춰진 인물 등이 상이한 경우 정말 ‘시즌’(season, 계절)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내 인생에서 어떤 시즌일까?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면 큼지막한 일들이 제법 있다. 교직 인생에 한정하여 그래프를 그려본다면 시작점은 어디일까.

    그 시작점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이다. 그곳에서 신규교사로 지냈던 때가 떠오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난다. 웃겨서 웃는다기보단, 함께 일하던 동료 선생님과 내가 가르쳤던 첫 제자들로부터 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아직도 온기로 따스하게 데워져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추웠던 강원도의 실제 기온을 기억 속 남아 있는 온기가 따뜻하게 낮추었나 보다. 그곳에서 1년을 근무하다가 근무지를 경기도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 펑펑 울며 내게 안긴 제자들이 기억난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눈물을 참느라 굉장히 애썼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당시 신규 시절이라 자가용 차량이 없어서 그랬는지, 강원도와 경기도 사이의 물리적 거리도 멀다고 느꼈고, 심리적 거리는 더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아득한 저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데 눈앞의 안개가 야속하게 시야를 막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기도로 이사하면서, 점점 요원해지는 강원도를 뒤로한 채 언젠가는 제자들을 보러 다시 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경기도에서의 교직 생활을 시작으로, 개인 사정상 신경 쓸 일이 많이 생겼고, 나름대로 고충을 안고 아등바등 여유 없이 하루를 버티다가 지금까지도 제자들을 보러 간성에 가지 못했다. 내뱉은 말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신조를 지키려 했건만 잘 되지 않았다.

    간성에서의 교직 생활 이후로도 레고로 블록을 쌓듯, 한 층씩 새로운 곳에서의 추억을 쌓았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전 정신이 필요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덧 1년이 훌쩍 가버린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제자들을 졸업시키거나 진급시키는 상황이 후련함과 아쉬움을 뒤섞은 채로 다가온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고 떠나보내길 반복해 왔다. 망각 곡선이 작동하여 잊을 법한데도,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식물의 잎사귀가 마르면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물뿌리개로 촉촉이 적셔주듯이, 내 기억이 시들지 않도록 누군가가 기억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는 것 같다.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건 기억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종종 뿌려주는 제자들의 연락이 아닐까. 나는 6학년 담임을 많이 맡은 편이라, 제자들이 근황을 자주 알린다. 그럴 때마다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 난다.

    제자들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좋은 기분을 숨길 수 없다.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게 되면 횡설수설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게 된다. 교사로서 느끼는 보람과 즐거움을 교육의 어원과 연관 지어 보자. 지금부터 설명할 어원은 서양의 어원이 아니라 동양의 어원이다.

    교육(敎育)이란 말은 맹자의 ‘득천하영재이교육지(得天下英材而敎育之)’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맹자(孟子)』의 진심(盡心)편 상(上)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1)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君子有三樂(군자유삼락)]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고사성어를 보면,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정성을 쏟아 자식이 나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자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고 할까. 요즘도 맹자의 어머니를 본받아 자식을 위하여 공부하기 좋은 환경으로 이사하는 부모가 많다고 들었다. 맹자도 자라서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을까.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천하의 영재를 교육하는 것을 꼽았다. 얼핏 생각하면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다. 맹자가 살던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혼란스럽기로 유명한 ‘전국시대’(기원전 403년 춘추시대의 진(晉)나라가 한, 위, 조라는 세 나라로 나누어졌을 때부터 진(秦)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이다. 제후국들이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었던 시기이다. 전국시대의 ‘전(戰)’은 싸움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열국이 밥 먹고 싸우는 걸 반복하는 무시무시한 무협의 시대를 백성들은 벌벌 떨며 살았을 것 같다.

    그런데도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걸 믿었다. 제후국들은 땅을 넓히고 오로지 부국강병에만 집중하는 과정에서, 거리에는 백성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아수라장 속에서 맹자는 혜왕과 대화를 한다. 이익을 말하지 말고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다고 주장했다. 난세에 그런 주장은 왕의 처지에서 어처구니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역시나 맹자는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다녔지만, 정치적 출세를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욱 잘된 일이었을까. 정치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멈추고 저술 활동과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육 활동에 매진한다. 많은 이가 힘을 기르는 방법을 알고자 할 때, 맹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내세웠다. 당연히 알아주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을까.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스승의 한 마디라도 흘려듣지 않으려는 제자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나 역시 맹자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을까. 3학년을 처음으로 맡았을 때였다. 떠드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는 유명무실하게 소리만 내었고 학생들은 종이 울리거나 말거나 각자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당장 자리에 앉길 지시한다면, 학생들은 자리로 들어가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지시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지도하는 아이들은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갖고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기만 했다. 스물네 명 중에서 눈치 빠른 몇몇 학생들이 내 표정을 살피더니, 떠들기로 유명한 다섯 명의 남학생들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들은 독수리 오 형제처럼 잘 어울려 다니면서 소란스럽게 교실을 휩쓰는 아이들이었다. 근 한 달 동안은 내가 지시하지 않으면 제시간에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화내지 않고 아이들에게 집요하게 선생님이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취지를 설명했다. 타인의 말과 권위에 길들여지는 수동적 존재가 되지 말고, 스스로 시간을 확인하고 준비하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그리고 늦은 만큼 쉬는 시간은 줄어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나자 독수리 오 형제 중 한 아이가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야! 어서 앉아. 선생님이 우리가 스스로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하시잖아!”

    평소에는 “야! 어서 앉아.”까지는 같으나 그 뒷부분이 다르다. “우리 이러다가 쉴 시간 없어져!!”가 일반적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감당할 불이익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 친구들에게 앉자고 했을 때, 그 짧은 순간 교육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 말이 천하의 영재가 아니라 독수리 오 형제의 입에서 나왔을 때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신규 시절에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가 있다. 간디 학교의 교가로 널리 알려진 ‘꿈꾸지 않으면’이란 곡이다. 그때가 우리 반의 ‘반가’라는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했던 해였다. 천사들의 합창처럼 운동장에 나가서 둘러앉아 ‘꿈꾸지 않으면’을 부르는 꿈을 신규교사 발령 전에 꿨었다. 아이들이 커서 냉혹한 사회를 경험하여 현실 속에서 좌절하더라도, 이 노래에 담긴 뜻을 새기며, 꿈꾸고 배우고 서로 사랑하길 바랐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 중 몇 명은 지금까지 연락이 온다.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보러 오겠다고 경기도로 와서 나를 만난 제자들도 있다. 생각대로 의젓하게 잘 자란 모습이었다. 각자 자신의 길을 진지하게 개척하고 있었다. 어떤 제자는 해외로 유학하여 외국 대학에 진학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고, 어떤 제자는 금융권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연락이 왔다. 어떤 제자는 군대 간다고 연락이 왔고, 어떤 제자는 그냥 선생님 생각이 나서 연락이 왔다. 연락한 이유야 어떻든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한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그때 불렀던 ‘꿈 꾸지 않으면’ 노래 저 가끔 들어요.”

    “엇, 정말? 그걸 아직 기억하는 거야?”

    “네. 당연하죠.”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맹자가 말한 군자삼락의 ‘락(樂)’을 또 한 번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마음속에서 샘솟는 교사의 즐거움[樂]을 무어라 형용할 수 있을까. 하늘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이 온 세상을 동심의 눈[雪]으로 덮는 기분이랄까.

    교육이란 가르칠 교(敎)와 기를 육(育)이 합쳐진 말이다. ‘가르치다’란 말은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올바른 것을 가려내어 갈고닦을 수 있도록 길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난 건 가르칠 ‘교(敎)’라는 글자는 본받을 ‘효(爻)’와 아들 ‘자(子)’, 칠 ‘복(攴)’ 자가 합쳐진 말로 회초리로 아이들을 배우도록 한다는 엄격함이 담겨 있고, 기를 ‘육(育)’이라는 글자는 아들 ‘자(子)’와 몸 ‘육(肉)’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젖을 먹이며 기른다는 자애로움이 담겨 있다. 즉, 교육이란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포함하는 말이다.(2)

일리 있는 말이다. 가르칠 교라는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여, 아이들을 회초리로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당연히 아니다. 글자에 담긴 ‘엄격함’이란 의미와 ‘자애로움’이란 의미를 교육 활동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활동의 영역에서 다양한 방향과 지켜야 할 선을 엄격히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제 간에도 친구처럼 지낼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치 전달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지식을 부정하는 시대라도, 보편적인 인권의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필요하다. 가령 어떤 학생이 식인 문화를 옹호한다면, 인권을 기준으로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지 더 깊은 사고를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 모든 생활 지도, 학습 지도에는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냥 엄격하기만 한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다. 학교에서 아동들을 지도할 때 자애로움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저 무섭기만 한, 꽉 막힌 선생님으로 각인될 것이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성장하도록 안내하고, 기본 생활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고, 학생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상담자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에 교사와 학생 간에 기본적인 라포(rapport)가 형성되지 않으면 어떨까. 학생이 잘되길 바라고 아끼는 마음이 없다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학생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 것이다. 이끌어낸다 치더라도 마음이 움직여 행동이 변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외적 규제로 변화할 뿐이다. 이런 경우, 외적 환경이 바뀌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나는 굳이 천하의 뛰어난 영재가 아니라도 좋다. 독수리 오 형제 같은 아이들도 괜찮다. 오히려 공교육에서는 독수리 오 형제, 말썽꾸러기 파워레인저, 더 지니어스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영재, 손흥민과 같은 뛰어난 체육인, 평범한 아이들 등 가릴 것 없이 평등하게 나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을 수 있다. ‘군자(君子)’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다. 즉,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뜻한다. 나는 당연히 군자가 아니다. 덕과 학식이 군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군자가 느꼈던 세 가지 즐거움 중 교육하는 즐거움은 느끼고 있다. 군자가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를 느끼게 해준 ‘교사’로 산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교사’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던 제자들에게도 감사하다.



(1) 네이버 지식백과 ‘군자삼락[君子三樂]’(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조기형, 이상억)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2) 『교육학』(강현석 외 5인, 고등학교 교과서, 천재교육, 2021)의 11쪽 ‘교육의 의미’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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