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세진 Jun 09. 2024

나의 장기 교육 편력기

수읽기 놀이가 두뇌에 미치는 영향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스라이 느껴지는 따뜻함이 밀려온다. 마음 한편에 남은 장면들이 기억의 파노라마로 짧게 재생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떠올리려 하더라도 도깨비의 몽니 때문일까, 자세한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장면만으로 친구들의 앳된 얼굴과 선생님의 친절함이 떠오른다. 특별히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생각나는 이유는 교실의 구조와 담임 선생님의 인자함, 그리고 그 속에서 장기와 체스를 두며 놀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이다. 나는 체스보다 장기를 더 좋아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체스보다 기물을 식별하기 편했고, 초한전쟁(楚漢戰爭)이라는 유명한 역사적 이야기를 놀이로 만든 것이라 더욱 흥미로웠다. 놀이에 서사가 함께 결합하여 실력 상승에 대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사각형의 교실 안을 특별하게 구획 지어 꾸며놓으셨다. 놀이방에서 볼 수 있는 푹신푹신한 퍼즐형 타일을 깔아두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을 만들었다. 게다가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누워 쉴 수 있도록 펑퍼짐한 둥근 쿠션도 교실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현시점에서 보아도 정말 훌륭한 교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선생님이 마련해 놓으신 세심한 배려 속에서, 선생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친구들과 ‘장군! 멍군!’을 신나게 외쳤다. 훈훈한 기억을 선물해주신 4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늘 안고 있다.

    철부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초등학생 자녀를 두게 되었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교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다. 4학년 때 선생님처럼 교실을 멋들어지게 바꾸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신규 때부터 장기판과 장기알을 교실에 비치하여 제자들이 마음껏 갖고 놀게 하였다. 그리고 교직 5년 차부터는 한 해도 빠짐없이 장기 두는 법을 아이들에게 직접 가르쳤다. 장기에 대한 좋은 추억 때문인지, 아이들에게도 내가 받았던 걸 주고 싶은 탓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바둑, 장기, 체스 부류의 게임이 두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와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고 장기가 교육적으로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는 데 있다.

    내가 찾아본 논문에서는 바둑이 두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바둑과 장기, 체스가 유사한 수읽기 형태의 놀이라 생각하고 같은 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한다.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초등학생의 성별과 바둑 경력에 따른 뇌파와 두뇌 활용 능력의 차이를 분석한 결과, 성별에서 남학생이 그리고 바둑 경력에서는 바둑 경력이 오래된 학생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다.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이 그리고 바둑 경력이 오래된 학생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문제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결하는 능력과 자기조절능력, 주의 집중력이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바둑 교육을 수강한 학생은 뇌파의 균형과 조화를 유도하여 두뇌의 구조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두뇌 활용 능력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둑 교육을 통해 사고 과정 중, 무한수의 새로운 경험과 학습은 활발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하며 뇌의 구조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며 두뇌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시사되고 있다.

    본 연구의 결과 및 논의를 기반으로 결론을 제시하면 첫째, 바둑 교육을 수강한 학생의 두뇌 활용 능력이 향상된 것으로 보아, 방과 후 교육 또는 창의적 체험활동 등에서 학교 교육에서 바둑을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바둑을 배우는 수강 학생들의 두뇌 발달 단계 및 특성을 고려하여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등 학교급별 특성에 적합한 바둑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1)


    현대 과학이 발전했다지만, 아직도 우리 두뇌 영역에서는 과학적으로 미개척된 분야가 많다고 들었다. 바둑이 뇌파의 균형과 조화를 유도하여 두뇌 활용 능력을 향상시키는 점도 좋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자기조절능력과 주의 집중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이 들었다. 스마트폰 사용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단점은 거북목, 소음성 난청, 손목터널증후군, 안구건조증, 시력 저하, 건초염 등 건강과 관련된 것도 많지만, 집중력 저하와 성적 저하, 발달장애,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점, 주의력 저하, 가상세계집중, 어휘력 부족 등 교육‧학습과 맞닿은 심각한 문제도 많다. 스마트폰 중독이 우리 뇌에 주는 영향은 웹브라우저로 슬쩍 검색해 보아도 손쉽고 자세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집중력 저하와 주의력 결핍, 분노 조절 문제, 이에 따른 인성교육 문제를 바둑 부류의 놀이를 통해서 해결하고 싶었다.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뀌겠냐만, 그래도 나름대로 교육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바둑을 독학으로 한두 달 공부한 적이 있었다. 단수, 장문, 촉촉수, 팻감, 천원 등 낯선 바둑 용어를 학습하고 바둑의 정석을 익혀가며 한 수씩 둘 때마다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바둑을 익히는 데 들이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게 흠이었다. 학업과 기타 여러 가지 할 일을 병행하기 힘들어 자연스럽게 바둑을 접었다. 바둑의 차선책으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한 결과, 장기와 체스를 가르쳐보기로 한 것이다.

    장기를 가르친 첫 제자들은 6학년이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에서 가장 고학년이라서 장기를 가르치기 수월했다. 행마법과 공격, 수비의 방법, 기본적인 장기의 형태와 장단점을 알려주었다. 장기에 관심을 두는 아이들은 주로 남학생들이었다. 당시 우리 반 남학생들은 여학생보다 연예인에 관심을 덜 가졌다.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가수는 방탄소년단이었고, 거의 모든 여학생이 아미(ARMY, 방탄소년단의 팬 클럽명)를 자처했다.

    방탄소년단의 대약진과 함께 나의 장기 교육도 한 단계 새로운 시도를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비즈쿨’이라는 예산을 지원받아 취지에 맞게 동아리를 운영하였다. 비즈쿨은 비즈니스(Business)와 스쿨(School)의 합성어로 ‘학교 교육과정에서 비즈니스를 배운다.’라는 뜻이다. 창업, 경영, 기업가 정신과 관련 있는 교내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은 비즈쿨 활동으로 인정된다. 나는 5~6학년을 대상으로 창업, 경영, 기업가 정신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장기‧체스 동아리를 만들어서 운영했다. 동아리를 비즈쿨의 취지에 맞게 운영하여 학기 말에 열리는 비즈쿨 바자회 때 수익을 창출해야 했다. 따라서 장기와 기업가 정신을 매개하여 창의적체험활동 동아리 교육을 구상해야 했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이 있었다.

    우선 학생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장기에 얽힌 중국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항우와 유방이 펼친 초한전쟁(楚漢戰爭)의 배경이 되는 진나라 시황제 이야기, 진승-오광의 난이란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하여 보잘것없는 백수건달 출신인 유방이 패현의 공(公)이 되기까지의 과정, 잔도를 보수하고 항우와 결사 항전한 이야기 곳곳에는 기업가 정신이 숨어 있었다. 유방은 한(漢)나라란 국가를 창업한 사람이다. 그리고 창업이 성공했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여 미천한 출신에서 황제가 된 것은 아니다. 그가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에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임무를 맡기고 중용하는 용인술(用人術)이 크게 작용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중하고 활용하는 태도에는, 자신을 잘 아는 자기반성과 겸손함이 숨어 있다. 이와 비슷한 회사 경영의 사례도 찾아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자회 수익 창출과 관련하여서 동아리 부원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의논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장기 특유의 오락성을 이용한 기발한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묘수풀이, 장기 도사와의 대결, 장기알 도미노, 알까기, 초한지 이야기 퀴즈 등 여러 아이디어를 상업적으로 바꾸어서 수익을 냈고, 수익금은 학교에서 마땅한 곳을 찾아 기부했다. 함께 고민하는 과정 역시 창업가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교육 경험이 이어져서 2022학년도에는 내가 맡은 학급에서 장기 대회 대신 천하제일 체스대회를 열었고, 2023학년도에도 어김없이 천하제일 장기 대회가 열렸다. 열심히 다음 수를 고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두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 외에도 장기 또는 체스가 여러 방면에서 주는 장점이 있다. 어른 세대와 아이 세대를 하나의 공감대로 엮어주는 데는 고전적 놀이의 역할이 크다. 누구에게 장기를 배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른에게 기본수를 배우며 한 걸음씩 실력을 키워나간 것 같다. 차근차근 쌓아 올린 실력을 바탕으로 명절날 친척 어른과 마주하며 한 수씩 번갈아 두는 즐거움을 느꼈다. 요즘은 세대 간에 공감대를 형성할 거리가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어느 날 부산광역시교육청 누리집에 있는 스승 찾기 서비스를 클릭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의 성함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선생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키보드에 떨리는 손을 올렸다. 검색 결과가 화면에 뜨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은퇴하셨단 걸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 근무지가 확인되었더라도 쉽게 연락하지 못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아쉬운 마음은 억누를 수 없었다.



(1) 「초등학생의 성별 및 바둑경력에 따른 뇌파와 두뇌활용능력 차이 분석」(방옥화, 2018)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ⅰ~ⅱp을 참고하였습니다.

이전 11화 하인츠의 딜레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