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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Jun 16. 2024

한 편의 축구 드라마

몰입 이론

    시간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 몇 년 전이었던가, 벌써 6년이 흘렀나 보다. 체육 전담을 처음으로 맡은 해가 있었다. (그 뒤로 담임을 쭉 해왔다.) 아마 교직 경력 중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을 다섯 장면 꼽으라면, 그해 축구부 학생들과 겪었던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단연코 꼽을 수밖에 없다. 당시 5~6학년 체육을 가르치면서 예전부터 운영되어 온 축구부도 아침마다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군대에 입대하여 축구 경기를 할 기회가 많았다. 매 경기 숨이 넘어갈 듯 힘든 순간 때문에, 육체적으로 일을 많이 하던 이등병, 일병 시기에는 축구가 힘들고 싫었다. 하지만 힘든 고비를 딛고 꾸준히 축구에 참여하면서 축구의 묘미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역하고도 가끔 축구를 끊기지 않고 해오던 터라 축구부를 맡은 데엔 부담이 없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축구부 지도를 제안하셨을 때 흔쾌히 “네, 알겠습니다. 해야 한다면 해야죠.”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지원 신청을 받고 축구부원 명단이 확정되고서부터는 부담감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신나게 해본 적은 있어도 가르쳐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축구부로 신청한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서 늘 지적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굉장히 장난이 심한 아이도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부담은, (그해를 기준으로) 작년에 이 일을 맡으셨던 체육 전담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너무나 훌륭히 소통하여 축구부를 멋지게 운영해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축구부 운영의 취지를 설명하셨다. 운동을 통해 예절을 배우고 협동심도 기르며, 남학생들의 들끓는 에너지를 발산할 통풍구도 만들어주면서 학교폭력 없이 건전한 운동 문화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보자는 뜻이었다. 축구부에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니. 거절할 수 없는 취지와 명분 앞에서 입을 뗄 수 없었다. 운동선수가 되는 걸 목표로 하는 전문성 있는 축구부가 아니라, 일종의 동아리 형태로 운영되는 모임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걱정이 앞서는 상황에서 뭐든 해봐야 했다. 우선 축구부 지도 교육과정을 짰다. 아기가 말을 할 때 자연스럽게 ‘엄마’란 단어가 입에서 터져 나오듯이, 축구에서도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무엇일까. 그 어떤 기술에 앞서 ‘달리기’가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거리 달리기 기록을 단축하는 훈련과 장거리 달리기로 체력을 기르는 훈련을 매시간 했다. ‘엄마’란 말이 터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다른 말들도 우수수 쏟아지듯이, 속도와 체력을 기르고 나서야 원하는 축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학기 때는 공에 대한 감각 훈련과 드리블, 패스 위주로 커리큘럼을 짰고, 2학기 때는 당시 의정부시에서 매년 개최되었던 초등부 축구대회 우승을 목표로 전술 훈련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축구부의 규칙을 만들고 공표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자.(1) 초한 전쟁이 한(漢) 왕 유방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제후들은 유방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나라를 다스릴 예법이 정비되지 않자, 신하들은 술을 마시고 공적을 다투기 일쑤였고, 궁궐 안에서조차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빼 들어 기둥을 치는 둥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이에 유방이 숙손통에게 걱정을 털어놓자, 숙손통은 노나라 학자 30여 명을 초청하여 그들의 제자 백여 명과 함께 한 달에 걸쳐 의식을 만들고 실제로 훈련도 해보았다. 진(秦)나라의 흥락궁(興樂宮)을 고쳐 지은 장락궁(長樂宮)이 준공되자 만조백관들이 모였다. 공신, 제후, 장군, 문관들이 서열에 따라 줄지어 섰고, 병사들도 규칙에 따라 늘어서 있었다. 의식의 정비로 인하여 주연에서 시끄럽게 하는 신하들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숙손통은 의전 장관에 임명되었다.

    『사기』 등장하는 일화를 통해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규칙이 바로 서야 한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5~6학년은 전두엽이 아직 덜 자란 시기라서 어른처럼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미숙하다. 따라서 학생들이 다치지 않고 즐겁게 지도하기 위해서는 감정 조절을 의식적으로라도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호 간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관한 부분을 규칙에 넣고, 그 외 훈련에 관한 방침과 방법, 주장, 훈련부장, 시범단, 연락부장 등 직책에 관한 사항도 넣었다. 당연히 이러한 내용을 어긴다면, 축구부원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반한 것에 해당하여 활동 정지, 제명 등 여러 불이익을 받는다는 서약서도 받아두었다.

    평소에 짓궂게 떠들던 아이들도 훈련에 진지하게 몰입하며, 규칙을 따르는 태도도 길러나갔다. 체육 수업 때보다 더 열심히, 진지하게 참여하는 모습에 보답하기 위해 나 역시 축구 지도에 열을 올렸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익히려고 땀 흘리는 모습이야말로 석양에 타는 저녁놀만큼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다른 교과 시간에 볼 수 없었던 행복한 미소를 만들어내는 근원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된 이론을 긍정심리학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저서 『몰입』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자. 그의 몰입 이론은 교육학 서적에 나오는 교육 이론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꼭 필요한 교육 활동과 맞닿아 있으므로 여타의 교육 이론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인간이 언제 가장 행복하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최적 경험’을 할 때 충분한 만족과 기쁨은 누린다. ‘최적 경험’이란 외적 조건에 압도되지 않고 자기 행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를 말한다. 이는 ‘플로우(flow)’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다. 어떤 일에 푹 빠져있는, 몰입된 상태를 플로우라고 한다. 이 상태에선 심장이 터지도록 공을 몰며 뛰는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 심장은 터질 것 같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하지만 플로우의 상태로 다가서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고통, 공포, 불안, 분노, 질투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심리적 엔트로피(내적 무질서)’라고 한다. 심리적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집중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수행할 능력을 잃게 된다. 플로우를 경험하면 ‘분화’(다른 사람과 자신을 분리하려는 경향)와 ‘통합’(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와 합하려는 경향)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두 과정을 성공적으로 결합하면 자아의 복합적 발전을 가져온다. 즉, 에너지가 넘치는 복합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과는 성격이 다르게,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자체가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공을 차고 후다다닥 달려가고, 그러다가 공을 빼앗겨 또다시 돌아오는 단순한 장면이 세상의 때가 묻은 누군가에겐 생경하고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플로우의 상태, 삶의 질을 향상하고 건강한 자아를 만드는 상태가 아닐까. 교사는 학생들에게 플로우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심리적 엔트로피를 줄이고, 수업과 교과 외 활동을 구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다시 축구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학기 축구부 활동의 시작부터 아이들의 온 신경은 2학기에 참가할 의정부시 축구대회에 있었다. 전년도에 우리 학교 아이들은 의정부에서 축구 잘하기로 소문난 ‘○○초’에 결승전에서 패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진 게 아니라, 안타깝게 석패한 기억이 아이들의 뇌리에 박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축구부 활동 첫날부터 작년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올해는 이기자.”는 명확한 목표와 투지를 발판삼아 첫날부터 기운 넘치는 출발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이들 특유의 자유분방함 덕분이다. 훈련은 아이들 주도로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잘 되다가 나중에는 반복되는 훈련 루틴이 지루했는지, 어느 때부턴가 자기네들끼리 모여 공을 아무렇게나 차면서 놀았다. 물론 아이들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훈련의 지루함보다 축구 경기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이해하더라도 허용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기하면서 실력을 쌓는 것보다 훈련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기초체력을 쌓는 것이 실력 향상에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신체적인 면을 향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면을 다독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재미있는 활동을 중단하자 아이들의 입은 태평소처럼 튀어나왔다. 표정은 당연히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럴 때마다 배우는 사람의 본분을 설명하며, 훈련의 당위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너희들이 이러면 선생님도 힘들다며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얻은 결론은, 논리에 감성을 깔고 말하는 방식이 아이들의 행동을 이끄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훈련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그 기저에는 학생들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을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아이들을 다루기 위한 언어 기술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진정성이 담기지 않으면 허울뿐일 것이다.

    길고 긴, 그리고 짧다면 짧은 훈련의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축구대회가 다가왔다. 토요일 오전부터 시작되는 일정이었다. 떨어지면 바로 곧바로 짐을 싸고 가야 한다. 승부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자고 말했으나, 이왕이면 좋은 결과가 따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 선발에 있어 축구부원만 데리고 가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 축구부원은 아니지만, 공을 잘 차는 학생도 필요했다. 그런 아이들은 평소 함께 훈련은 안 했지만, 서류상 축구부 명단에 올려서 경기에 데려가면 규정상 문제가 없었다. 이기기 위하여 원칙을 깨고 싶은 마음이 나를 유혹했다. 아이들도 그 친구를 데려가야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며, 그 친구들의 선수 등록을 성가실 정도로 보챘다. 이때 나를 바로잡아준 분이 교감 선생님이었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주셨지만, 선수 선발의 원칙에 따라 그 학생은 데려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선수 선발뿐 아니라 앞으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맡게 될 모든 일에 있어서,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서 공정하지 못한 절차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공정하지 않은 과정으로 얻은 결과가 아무리 좋다 한들 올바르지 않은 선례로 남게 될 것이고, 결과가 무조건 좋으리란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즉, 공정성과 실리 중 어느 쪽도 챙기지 못한다. 그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는 셈이다.

    대회 당일은 내겐 굉장히 피곤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나는 당시 컵스카우트 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대회 하루 전 금요일, 운동장에서 컵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연합하여 진행하는 1박 2일 야영이 학교의 큰 행사로 잡혀있었다. 야영 전문 업체의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였으면 편했으련만, 행사의 모든 일정을 컵스카우트 대장과 부대장, 걸스카우트 대장과 부대장이 계획하고, 선생님들의 협조를 통해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수립한 안전사고 예방계획에 따라 불침번을 서야 했다. 텐트 속에서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새벽의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아프거나 추위를 느끼는 아이들은 없는지, 집을 벗어나 들뜬 마음에 장난을 치는 대원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구령대 옆 관중석에서 스카우트 간부 선생님과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잠을 이겨냈다. 잠을 이겨내며 다음 날 벌어질 대회를 머릿속에 그렸다. 단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상상 속에서 펼쳐진 경기를 관전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 날 우리는 운동장 정문에 모였다. 비몽사몽인 내 상태와는 달리 아이들의 눈빛에서는 우승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 학교의 노란 유니폼은 그날따라 유난히 축구 강호 브라질과 콜롬비아를 연상시켰다. 아이들에게서 기운을 얻은 탓일까.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 순식간에 각성의 상태로 발을 들였다. 자, 가자! 스포츠 만화처럼 감독 한 마디에 모두 묵묵히 버스로 향했다. 왠지 슬램덩크의 한 장면과 같았다.

일찌감치 경기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몸도 풀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쉴 때 체력을 보충할 수 있도록 이온 음료와 간식도 준비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그런데 첫 번째 경기 전 상대 팀의 단합된 훈련 모습과 마주쳐서일까, 긴장감과 위축감이 우리 아이들을 휘감았다.

    “어쭈! 너희들. 평소에 떠들썩하게 까불며 다니더니 경기해보기도 전에 쫄았어?”

    일부러 아이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예상대로 석훈이가 발끈했다. 석훈이는 스포츠계의 악동 선수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마치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 같은 캐릭터다. 강백호란 캐릭터는 NBA의 유명한 악동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니에요! 아직 아침이라서 정신 차리는 중이거든요?”

    “오, 그래? 좋아. 다들 석훈이 말 잘 들었지? 두려운 마음을 다시 붙잡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 때 4강까지 간 것 알지? 그때까지 우리 선수들이 상대했던 나라가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우승 후보로 손색없는 팀이었어. 다들 한가락 하는 나라지? 그런 우승 후보를 우리가 이겼단 말이야. 기본은 살아있는 정신력이라 생각한다. 박지성, 이천수, 김남일 같은 어린 선수들이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어떻게 했는지 알아?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위축되지 않고, 악을 쓰고 뛰었거든. 잘 생각해봐. 선생님 말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던 이야기에 동을 달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말을 한마디 내뱉고 다 같이 손을 모아 파이팅을 했다.

    “큰 경기 전 공포심은 누구에게라도 있다. 그 자체를 받아들여 뛰어넘어야 한다. 두려움 따위는 씹어 삼켜라.”

    슬램덩크 북산고등학교의 감독, 안 선생님의 명언이었다. 뒷부분은 내가 덧붙인 말이다.     

    10분가량 지나고 우리 팀에서 골이 터졌다. 발 빠른 성호가 대각선에서 골을 넣었다. 2002년 첫 경기, 폴란드전의 황선홍이 넣은 골을 연상시켰다. 한 골을 넣은 이후 아이들은 파죽지세로 상대 팀의 조직력과 정신력을 붕괴시켰다. 강해 보였던 팀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상대 팀도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축구 경기처럼 승패가 갈리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누군가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다. 하프 타임 때 아이들에게 일러두었다. 한 팀이 이기면 다른 팀은 져야 하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도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 올리는 얼굴로 이상한 기술을 쓰거나, 공을 일부러 질질 끈다거나 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 경기에서 손쉽게 이기고 입장하는 아이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간의 땀이 결과로 보상받는 것 같은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두 번째 상대가 다른 팀과 경기할 때, 우리는 쉬고 있었다. 축구부원들은 첫 경기 승리에 도취하여 평소처럼 떠들썩하게 간식을 먹었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다음 상대가 경기하는 걸 지켜보게 했다.

“얘들아, 이겼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으면 안 돼. 다음 경기가 남아 있고 우리는 우승하기 위해 나왔지? 다음 팀을 이기면 4강이다. 지금부터 진지하게 다음 상대의 경기를 보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라. 어떤 선수가 어떤 특징이 있고, 내 포지션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파악해라. 그리고 그 상대와 맞붙을 때 나는 어떤 식으로 플레이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봐. 경기가 종료 5분 전에 모여 작전회의 들어갈 테니 열심히 지켜봐.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거다. 너희들이 해결책을 찾아봐.”

    ‘집단 지성’이란 말이 있다. 다수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된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용어이다.(2) 이는 미국의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한 개체만 보면 미미하게 보일 수 있는 개미도, 군집 상태에서는 서로 협업하여 높은 지능체계를 형성하는 점에 착안하였다.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특정 조건에서 집단은, 집단 내부의 가장 우수한 개체보다 지능적”이라고 주장하였다.(3) 2학기 동안 축구의 포지션과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꾸준히 전수했다. 전술에 대하여 완전히 백지상태라면 몰라도, 아이들이 전술에 대한 지식을 일정 부분 쌓아 왔는지라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작전회의에서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안목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이기기 위한 해결 방안을 전술적 움직임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역량은 확연히 내가 아이들보다 앞선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상대 팀 선수의 구체적인 특징은 아이들 개개인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고, 아이들이 분석한 데이터를 합쳐서 상대 팀의 빈틈을 노리는 작전을 훨씬 더 수월하게 짤 수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白戰不殆)라고 하지 않았던가. 불세출의 병법가 손무가 『손자』  제3편 「모공(謀攻)」 편에서 한 말이다. 대진운이 좋아서인지, 2차전은 상대방을 미리 분석하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승리는 우리 팀이 가볍게 거머쥐게 되었다.

    대망의 4강이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가볍게 드리블을 연습하면서 두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대는 작년에 우리 학교에 패배를 안겨준 학교였다. 점심 먹고 바로 시작하는 경기였다. 경기 시작 10분 전 상대 학교는 둥글게 둘러서서 질서정연하게 몸을 풀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위엄이 절도가 느껴졌다. 평소에 단합하여 연습했다는 걸 그 한순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필 상대방의 유니폼 색도 진한 빨간색이라 더욱 위압감을 주었다. 우리 학생들의 표정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입 밖으로 “쟤네 잘할 것 같다.”라는 말을 연거푸 되뇌었다.

    나는 웃으며 또다시 만화 슬램덩크의 명대사에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덧붙여 날렸다.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다. 너희들이 지금 질 거라 단념했다면, 지금 경기는 끝난 거다. 뛰어 볼 필요도 없어. 지금 당장 집에 갈래?”

    “…”

    “그동안 우리가 매일 아침 나와서 얼마나 열심히 했었나? 축구 연습 1분이라도 더 하려다 수업에 지각한 일 기억나냐? 잘 생각해봐라. 우리가 이렇게 해보지도 않고 지러 온 건가? 나는 너희들이 져도 좋다. 경기는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는 거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단, 조건이 있다. 너희들이 투지를 보이며 아무 후회 없이 보여주고 싶은 걸 다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10대 0으로 져도 나는 너희들에게 큰 박수를 칠 거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인다면, 아마 나뿐 아니라 경기를 지켜본 모든 관중이 기립박수를 치지 않을까? 어쩔 거냐? 집으로 갈 거냐? 아니면, 악으로 깡으로 후회 없이 뛰어볼 거냐?”

    시무룩 기죽어 있던 아이들의 주먹이 다시금 투지로 가득 찼다.

    “뛸게요. 선생님.”

    “좋아, 모두 둥글게 모여 어깨 걸어. 우린 할 수 있다.”

    어깨를 걸고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구호를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우렁차게 외쳤다. 상대 팀도 우리를 쳐다보았다. 경기는 시작되었다. 확실히 강력한 우승 후보라서 발이 빠르고 기술도 좋은 아이들이 많았다. 속전속결로 끝내려는지 그런 아이들이 전방에 배치되어 우리 팀 수비를 압박했다.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았다. 위험한 순간이 많았지만, 수비수들이 집중력을 발휘해서 잘 막아주었고, 정확하게 공을 간수하여 앞쪽으로 패스할 자신이 없다면 멀리 걷어내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측면 공격 시 월 패스(wall pass)를 통하여 상대방을 압박했다. 그리고 공을 패스하고 가만히 멈춰 있지 않고, 다시 패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는 플레이에 집중했다. 훈련 때도 공을 주고 가만히 있으면 나의 “줬으면 뛰어!”라는 샤우팅 세례가 곧바로 메아리쳤다. 매일 강조했던 점은 아이들은 너무나 잘 수행하였고, 결국 발 빠른 성호가 선제골을 넣었다. 상대 팀도 놀랐는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기세를 몰아서 이기겠거니 했다. 경기 전에 내 마음은 결승전으로 미리 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소년 축구선수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공격진에 대거 포진시킨 상대방의 전술은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 팀 수비의 핵인 중앙수비수 지훈이가 너무 집중해서인지 발에 쥐가 났다. 우리 팀은 공격보다 수비가 빈약한 편이었다. 지훈이가 수비진을 조율하면서 경기를 잘 운영했는데 지훈이가 빠져버리니 가운데가 휑하니 뚫리게 되었다. 결국 상대방 공격수 한 명이 지훈이가 교체되자 물 만난 고기처럼 혼자서 이리저리 휘젓다가 골을 넣었다. 탄탄한 미드필더와 공격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전술을 바꿨다. 미드필더와 공격수가 수비에 가담하여 추가 실점을 막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작전을 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연히 실력 차가 드러났고, 우리 팀의 미드필더와 공격수들은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하자니 체력적 한계에 다다랐다. 그리고 집중력 또한 흐트러졌다. 한 골을 더 허용했다. 연이어 또 한 골을 먹었다. 점점 패색이 짙어만 갔다. 결국 경기는 4대 1로 끝났다. 경기 종료 호루라기 소리에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 명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드러누운 아이들을 하나하나 일으키며 상대 팀원들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모두 불러 모았다.

    “선생님은 너희들 모두 너무 자랑스럽다. 선생님으로서도 그렇고 너희들의 축구 감독으로서도 그렇다. 마지막까지 주눅 들지 않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진 것은 깔끔하게 실력 차라고 인정하자. 하지만 패기만은 우리가 밀리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너희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이렇게 몰입하여 노력해 본 경험 자체가 분명히 너희들 앞날에 큰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뭔가를 열심히 해본 것 자체가 소중한 재산이니 졌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자. 다들 집에서 씻고 오늘 하루 푹 쉬어. 그럼 이것으로 마치겠다. 아픈 사람은 없지?”

    인사가 끝나고 계속하여 울고 있는 동운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가서 씻자마자 쓰러졌다.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총 17시간을 곤히 잤다.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확인하고선, ‘이게 가능한 일이구나’란 생각에 한 번 더 놀랐다.

    떠들고 장난치기로 유명한 학생들과 이렇게 장기간의 레이스를 함께 준비한 적이 있던가. 우리가 함께 연습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축구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규칙을 따르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배우고 익혔다. 점점 차분해졌고 예의를 지켜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도 길렀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똘똘 뭉쳤다. 훈련 과정에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즐겁고 좋은 추억으로 남겼다. 학생들과 나는 즐거움과 쾌락의 차이를 경험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진정한 즐거움 얻기 위해서는 지속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으로 넘어가자. 역경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건 외부에 달린 게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몰입을 방해하는 외적 요인을 즐거운 도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져야 한다. 어려운 환경을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자아를 뜻한다.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설정한 뒤, 활동에 몰입하고 주변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경험을 즐기면 된다. 결국엔 몰입(flow)에 빠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몰입을 위해서는 ‘최적 경험’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가정환경의 특징으로는 명료성, 중심성, 선택성, 부모의 신뢰성, 도전성을 들었다. 명료성이란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고 있다는 걸 말한다. 중심성이란 자녀가 하는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부모가 관심이 있다는 걸 말한다. 선택성이란 선택권이 아이에게 주어짐을 뜻한다. 설령 아이의 선택이 부모의 규칙을 깨더라도 허용해야 한다. 물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아이가 지는 것이다. 신뢰성이란 부모의 신뢰 아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자신의 관심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걸 말한다. 도전성은 자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의 헌신을 말한다. 이 다섯 조건을 ‘자기 목적적 가정환경’이라고 부른다. 학교와 가정은 분명 차이가 있는 장소이지만, 학교 교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타인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가정보다는 규율의 적용이 엄격한 장소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질서와 규율이 살아있는 환경 속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의 ‘최적 경험’을 위해 교실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는 곳이어야 하며, 그에 따라 어떤 교육방식으로 학생들을 대하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나는 한 편의 축구 드라마를 찍었고, 드라마를 머릿속으로 수시로 돌려보며 재생한다. 출연진이 되어 몰입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학생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함을 전한다.


                                                            


(1) 『한 권으로 보는 사기』(사마천 원저, 김진연, 김창 편역, 서해문집, 2005)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2)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두피디아) http://terms.naver.com ‘집단 지성’을 참고하였습니다.

(3) 각주 (2)와 동일

(4) 『몰입』(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한울림, 2004)의 내용을 본바탕으로 읽고, 『북킷리스트』(홍지혜, 김나영, 김문주, 정윤서, 한빛비즈, 2020)의 몰입 이론 관련 부분 요약 내용을 읽고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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