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불능성
“선생님! 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나요?”
우리 학교 주변에 과자 봉지가 널브러져 있다는 말에 6학년 제자의 당돌한 질문이 곧바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순간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입이 굳었다. 대다수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당연한 부분을 질문해서인지 서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일부는 내 표정을 살피며, 혹시 예의를 중시하는 선생님이 화가 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는 학생도 있었던 것 같다. 대호가 선생님의 교육에 따르지 않고 딴지를 거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대호는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었지만, 평소에 예의 없이 행동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대호가 진지하게 질문한 것인지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아무 말 없이 3초간 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내가 화난 줄 알았다. 3초 동안 교실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질문했던 대호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보였다. 대호의 질문은 정말로 진지한 질문이란 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정적을 깨뜨렸다.
“우리 대호는 쓰레기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버릴 수도 있지 않나 해서….”
“우리 대호가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편히 말해도 괜찮아.”
“쓰레기를 버리는 게 일반적으로 나쁜 행동이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어야 환경미화원들도 할 일이 있을 거 같은데요? 할 일이 많아지면 그만큼 일자리가 늘어나고, 일하던 사람은 계속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실직자가 될 일도 없고요. 뉴스에서는 요즘 회사에서 잘리는 사람도 많고 취직하기도 어렵다고 하지 않나요?”
들어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이 ‘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생님이 화난 게 아니란 걸 깨닫고선 안도의 숨소리를 ‘휴우~’하고 내었다. 일자리는 수요에 따라서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요식업에 뛰어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홍보 기간이 부족해서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몇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서 유명해졌다. 당연히 사장은 사업의 규모를 확장할 것이다. 그 식당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손님들이 늘어나고 식당이 커지자 일을 할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사장님은 사업 초기에 2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주방, 서빙, 카운터뿐 아니라 청소, 음식 개발 연구소, 음식 포장 및 배송 관련 일을 할 사람도 필요해졌다. 초등학생이 ‘어떤 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경제학의 기본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이다. 대견한 생각에 대호를 칭찬했다.
“오호, 우리 대호의 생각이 굉장히 일리 있는 것 같은데요? 대호가 경제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아주 쉽게 설명했어요. 대단하네요.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때부터였다. 너무나 엉뚱하게 여겨지는 주장을 경제학의 원리를 들어 칭찬하니 웅성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요란하게 밀려왔다.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지 짝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을 주었다. 다소 열띤 논쟁으로 시끄러워지는 부분은 괜찮지만, 장난을 치거나 수업과 상관없는 말을 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주의 주었다. 당시 6학년들을 상대로 국어나 사회 교과, 또는 학급 회의 시간에 ‘하브루타’를 적용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 반의 특성을 말하자면, 쉬는 시간에는 연예인 이야기와 축구, 웹툰 그리고 여러 흥밋거리로 활기가 넘쳤지만, 수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침묵 게임을 연상하게 될 정도로 조용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찰나 뉴욕에 있는 예시바대학교 도서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시끄러우면서 토론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하브루타였다. 상대방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이 더욱 명료해지고, 기억해야 할 내용이 더욱 잘 기억되는 효과적인 공부법이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학습법으로 알려진 하브루타를 수업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자유롭게 말하길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적용하기 딱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브루타 수업 문화를 조성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다. 첫째, 하브루타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이전에 텍스트에 관한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상호작용 중에서도 끊임없이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1) 우리 반 학생들도 빡빡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학원 가기 바빴다. 그렇게 학원 다니랴, 저녁 먹으랴, 씻고 한숨 돌리면 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조사하거나 알아 오는 숙제를 내면 제때 해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기본적으로 경청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 부분은 첫째보다 더욱 어려운 부분이다. 어른들도 타인과 논쟁할 때 말을 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울까. 상대방의 주장에 반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려면 우선 말을 끝까지 듣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토론 과정을 돌아다니며 지켜보면 열을 올리면서 중간에 말을 끊는 학생들이 있다. 당연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러한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었던 것 같다.
정범모 선생님은 『교육과 교육학』이라는 책에서 “교육이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고 교육을 정의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하브루타 수업 분위기를 형성하여 교육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도와준 아이들이 고마웠다. 짝과 함께 토론하고, 상대를 바꿔 토론하고, 전체 의견을 종합하는 가운데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한 차시 40분 동안 꽉꽉 채워서 했다. 교육과 관련 없는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읽는다면, 시간 낭비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에 의문을 품고 긴 시간 토론할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는 분위기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난이 섞이지 않았다면, 뚱딴지같은 질문도 주눅 들지 않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뒷받침되도록 매 수업 노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은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사유하는 역량’이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독일 나치 정권의 비밀 국가 경찰인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주일 동안 체포된 뒤 풀려나 프랑스로 망명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점령되자, 반(反)나치 운동에 참여한 아렌트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다. 그녀의 생각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란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식 사회주의까지 함께 묶어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전체주의로 규정했다. 아렌트는 1961년 <뉴요커>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아이히만은 세계대전 중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데 일조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고안하였다. 그가 고안한 열차 속에서 많은 유대인이 죽음을 맞았다. 그렇지만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본인은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뿐, 대량 학살 등에 본인의 의지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항변한다. 재판을 지켜본 6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아이히만을 정상인으로 보았으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국민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성이 파괴된 잔혹한 악마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근면하고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책임감 있는 아버지였다. 8개월간 지속된 지루한 재판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였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사유의 불능성, 그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란 죄를 지었다고 선포한다.(2)
‘사유의 불능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데서 출발한다. 아이히만에게는 ‘법을 잘 지켜야 한다.’, ‘국가의 명령을 군인으로서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라는 상식을 따른 셈이다. 상식을 벗어난 사고를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이히만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생각의 부재를 ‘사유의 불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사유의 불능에서 빚어질 수 있다. 투철한 준법정신에 따라 국가의 명을 열심히 받드는 평범한 행동을 사유하는 능력이 마비된다면, 본인도 모르게 악한 일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교사로서 내 제자들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는 이성을 갖춘 사람이 되길 원한다. 더 나아가 봉건적인 군주제가 철벽처럼 버티던 시대에서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거짓·타락·독단과 줄기차게 맞서 싸운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용기를 가지길 바랐다.(3) 그러므로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각도를 비틀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쓰레기는 당연히 버려서는 안 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말 당연한 걸까’하고 한 번쯤은 의심해본 뒤, ‘하면 안 된다’라고 결론짓는 것과 ‘쓰레기는 당연히 버리면 안 된다’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 모든 것을 철저히 의심하였다. 그리고 서양 근대철학의 출발을 알렸다. 지금도 서양 철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 사상에 각주가 달리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평가하는 걸 떠나, 자명하게 알려진 것도 의심해보는 그의 태도는 분명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아이히만을 만들지 않도록 교사는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야 할까. 우선 학생들에게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거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을 인용하면 충분할 듯하다.
“독서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만든다. 사색은 사려 깊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논술은 확실한 사람을 만든다.”
둘째, 학생의 자유로운 발언이 다소 엉뚱하더라도 예의를 지켜 말한다면 존중하고 허용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생각의 명료화를 위해 건전한 토론과 글쓰기 문화를 형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다.
그 해는 참으로 난감한 한 해였다. ‘쓰레기는 왜 버리면 안 돼요?’에 이어 2탄, 3탄, 4탄 등 줄줄이 비슷한 성격의 질문들이 시리즈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나는 시리즈는 다음과 같다. ‘화장은 왜 하면 안 돼요?’, ‘왜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면 안 되죠?’, ‘왜 선생님은 급식실에서 따로 국그릇을 받아요?’, ‘왜 단정한 머리 모양을 강요하나요?’, ‘체육복은 왜 입나요? 개인이 좋아하는 체육복을 입고 오면 안 되나요?’, ‘전쟁 나면 도망가는 게 왜 나쁜 건가요?’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질문들이었다. 스승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제자들의 당돌함에 오성과 한음이 생각나서일까. 아직도 마음속에 제자들의 다부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기쁘다. 이 시리즈를 모아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 책 한 권은 족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1) 『하브루타 수업디자인』(김보연, 고요나, 신명, 맘에드림, 2018)의 25쪽을 참고하였습니다.
(2) 최진기의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와 네이버 어린이백과 EBS 어린이 지식e ‘생각 없이 죽음을 방관한 <그가 유죄인 이유>’, 네이버 지식백과 중 두산백과 ‘한나 아렌트’편, 네이버 캐스트 인물세계사 ‘한나 아렌트’를 참고한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하였습니다.
(3) 『문예사조, 그리고 세계의 작가들』(김병걸, 두레, 1999)의 113쪽 두 번째 문단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