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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Nov 27. 2024

술이 나오는 샘 고을

영월 빙허정

수근수근문화일기

일시 :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오전 10시

장소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강원도 영월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하지만 현재 일하고 있는 평택에 대해선 여러 가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정작 고향인 영월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억만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기억이 희미한 데다, 일찍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시절 방학마다 항상 할머니 댁에 머물렀으니, 일 년에 두 달은 영월에서 보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월에 대한 나의 지식은 '무지'에 가까웠다.


이번에 영월을 찾은 이유는 엄마가 올해 키운 들깨를 짜기 위해서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할머니 집에서 들깨를 실어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은 주천면사무소가 있는 면 중심지로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오전 10시쯤 도착한 방앗간에는 기름을 짜고 고춧가루를 빻으려는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못해도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기다릴 테니 우리 부부는 산책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산 위에 있는 정자도 한 번 가보라고 권하셨다.


우리 부부는 정자로 향하는 산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입구 앞에는 술샘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천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지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거나 추측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주천의 경우는 달랐다. 명확한 유래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고을에 있는 샘은 사시사철 술이 나왔다고 한다. 샘물은 양반이 마시러 가면 청주가 나오고 상민이 가면 탁주가 나왔는데, 상민이 일부러 양반 복식을 하고 가도 여전히 탁주만 나오는 신비한 샘이었다. 어느 날 주천리 고을에서 농사를 짓던 한 젊은이가 과거에 급제하여 진짜 양반이 되었다. 젊은이는 고향으로 금의환향을 하여, ‘이제는 샘물을 뜨면 청주가 나오겠지.’ 하고 샘에 가서 물을 떴으나 예전처럼 탁주만 나왔다. 이에 화가 난 젊은이가 샘물이 나오는 곳을 막아 버리니 이후로는 아예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디지털영월문화대전 발췌-


이 이야기는 단순히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주천현의 유래로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주천을 방문했음에도, '술(酒)이 나오는 샘(泉)'이라는 뜻을 이번에야 처음 알게 되었다. 산책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던 곳에서 이처럼 흥미로운 역사를 마주할 줄은 몰랐다.


금표와 설명문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는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었고, 조금 더 가니 철종의 왕세자 금표와 이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나타났다. 금표를 지나 20분쯤 산을 오르니 빙허정이라는 정자가 나왔다. 이는 주천현의 공해(관아 건물)를 재현해 놓은 정자였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방앗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선 강변에 자리한 주천리 삼층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주천리 삼층석탑

결국, 이번 영월 방문은 단순히 들깨를 짜러 온 여정에서 뜻밖의 역사 여행으로 이어졌다. 주천의 지명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 산책 중 마주한 금표와 빙허정, 그리고 주천리 삼층석탑까지, 모두 영월의 깊이와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고향이었지만, 이처럼 각 공간이 가진 이야기가 엮여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번 방문은 예상치 못한 역사적 발견으로, 이곳에 대한 흥미로운 공간으로 기억을 새로게 만들어준 의미깊은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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