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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Dec 11. 2024

유네스코 김장인이 되다

김장김치


수근수근문화일기

일시 : 2024년 11월 17일(일) 오전 9시

장소 : 경기도 평택시 처가댁


우리 집에는 김치냉장고가 없다. 둘이 사는 가정이라 집에서 음식을 많이 먹지 않다 보니 김치를 자주 먹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아내가 처가댁에 들러 한 통씩 가져오면 그것으로 한두 달씩 먹는 방식이다. 어쨌든 우리 집 김치는 일 년 내내 처가댁에서 받아온다.


그리고 김장의 계절, 11월이 왔다. 결혼한 뒤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처가댁 김장을 돕는다. 처가집에서는 주말 이틀 동안 김장을 하는데, 이번에는 토요일에 회사 업무가 있어 일요일 하루만 돕기로 했다. 장모님은 이번 김장을 앞두고 걱정이 많으셨다. 매년 이모님들이 도와주시곤 했지만, 이번에는 각자의 김장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다. 아내는 결혼 전까지 한 번도 김장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결혼 후에는 나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 9시쯤 처가댁에 도착해 김장에 합류했다. 이미 할머니와 장모님, 장인어른께서 김치 소를 만드느라 분주하셨다. 나도 곧바로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에 뛰어들었다. 김치 소를 버무리고 절인 배추에 소를 넣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곧잘 하는 덕분에 처가댁 식구들은 나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런 순간에 점수를 조금 따는 셈이다. 게다가 일 년 내내 맛있는 김치를 받아 먹는 감사에 비하면 이런 노동은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정오를 조금 넘기니 김장이 서서히 마무리되었다. 그때, 오지 못한다고 하셨던 이모님들이 도착하셨다. 각자 집에서 김장을 끝내고 우리 집을 도와주러 오신 것이었다. 비록 김장이 거의 끝나 도움을 주시진 못했지만, 그 따뜻한 마음 자체가 참 감동적이었다. 왜 김장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십여 년 전, 김장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고 했을 때 사실 조금 의아했다. 당시 무형문화유산이라 하면 예능이나 장인의 기술 같은 특정한 기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문화가 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문화유산 범위의 확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김장은 “김치 담그기의 핵심인 ‘김장’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전통지식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선을 유지하기 위해 강조하는 나눔, 결속, 화합 등의 정신은 현대사회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 이모님들이 보여준 모습은 바로 이 정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더라도 서로를 돕기 위해 찾아와 준 그 따뜻한 마음이 김장이 가진 나눔, 결속, 화합 등의 정신을 완벽히 드러낸 것이다.


또한, 국가유산청은 “김치 담그기는 고도의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는 생활관습이고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종목으로 지정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나도 비록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김장을 함께하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실천한 셈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오늘 하루 ‘김장인’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냉장고 속에서 익어가는 김장김치, 긴시간두고 먹을 김치(좌)와 겉절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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