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은 자발적 가난, 자연과 조화 이룬 자족적 생활에서 나온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에서 -
메니에르를 만나며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문을 열면 나무가 보이는 시골집에서 사는 일. 최소한만을 소비하고 내가 생산한 식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 일. '월든' 책에 나오는 소로처럼 호수에서 먹거리를 구하고 자연을 세밀하게 바라보며 단순하고 소박하고 자족적인 삶을 사는 것.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 그리고 남편은 나와 다른 성향으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니 그러한 삶을 강요할 수만은 없는 일.
그러나 SECOND HOUSE만큼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바다에서 내가 사랑하는 산으로 위치를 변경하였다. 냇가가 흐르는 산기슭의 태백시 집을 염두에 두고 나만의 집을 계획 중이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각 방마다 100L의 봉투를 채워 물건을 걷어내고 기부하였지만 내 마음만큼의 비우기는 아직 하지 못했다. 100L 봉투 채워 기부하기는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이다.
내 삶의 방향성 그리고 우리가 사는 좁은 집의 특성,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열망 등으로 시작한 미니멀리즘은 가족과의 대화와 함께 매우 천천히 진행 중이다. 나를 제외한 남편과 두 아이는 맥시멀리스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식탐 없는 그들이기에 가장 쉽게 줄일 수 있는 부분인 장보기 금액을 제한하며 음식 사는 것을 최소화하고 식기는 컵 4개, 수저 4세트, 밥 국그릇 4세트, 서양 식기 4세트 만을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밥을 먹으면 각자 설거지하기로 규칙을 정하고 하지 않을 경우 벌금을 내기로 했다. 냉장고의 칸을 정하여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작은 영역이 넘치지 않게 식재료를 관리하고 있다. 먹지 않는 음식을 사서 나르는 수고, 먹지 않을 음식을 만드는 고생, 먹지 않은 음식을 버리는 노동을 비울 수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매우 작은 딸은 구운 고기를 싫어한다. 육식위주 식생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정 스님은 '먹어서 죽는다'고 하셨는데 채식 성향의 딸에게 싫어하는 그 구운 고기를 먹이자고 1시간을 아이와 씨름하다니. 그러고나면 딸과 나는 먹기 싫은 것을 먹느라 먹지 않겠다는 것을 먹이느라 기운이 다 빠지고 서로 마음이 많이 다치곤 했다. 그리고나서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하기엔 벅찰 수밖에. 이제 딸이 고기 먹기 힘들어함을 인정하고 구운 고기를 주는 대신 원하는 콩나물밥이나 미역국 등을 주기로 했다. 식사 시간은 매우 단축되었고 아이는 고기를 먹지 않았음을 나에게 매우 미안해하며(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이를 압박했던 걸까) 무려 스스로 우유를 찾아 먹는다(우유 먹기도 거부했던 아이다). 식사가 늘 힘들던 아이였는데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줄고 있다.
매일 집안일에 치여 살았던 것은 누군가를 위함이었으나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최선이었는지 내가 덜 힘들 방법은 없었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희생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아이들에는 미안한 마음을 강요하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아이를 위한 삶을 살다 보니 남편을 위한 자리가 줄고 이것이 가족의 행복을 만들 기틀을 흔들었다.
나도 행복하고 우리 가족도 행복한 매일 만들어가기 위한 선택을 하기로 한다.
대학생이던 나는 공지영의 '착한 여자'라는 소설을 읽고 눈물을 한 움큼 쏟아냈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여주인공.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늘 자신이 했던 선택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하는데 그녀가 살아낸 삶의 과정이 마치 내 것 인 것 같아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울었었다. 늘 더 행복하기 위한 선택지가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것을 택하는 여주인공. 소설 안에서 여주인공이 하는 선택을 나였어도 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읽어나갔었기에 책을 읽고 난 후 한참 동안이나 다짐했었다. 언제나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하기로. 그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다짐한다. 늘 내가 더 행복한 선택을 하기로.
메니에르를 진단받던 당시 세상이 뱅뱅 돌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고 속은 울렁거렸으며 때때로 호흡이 힘들었다. 메니에르의 원인, 치료 방법에 대해 검색해보긴 했지만 브레인 포그(뇌에 안개가 낀 듯 맑지 않은 상태로 과로,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으로 생기는 집중력 부족 증상)로 글자들이 둥둥 떠다니기만 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혼자만의 공포에 휩싸여 마지막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정도를 벗어난 두려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었다.
빈센트 반고흐도 메니에르를 앓았던 것으로 현대 의사들은 추측한다. 특히 그의 명작 '별이 빛나는 밤'에는 뱅뱅도는 어지럼을 겪는 메니에르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이명, 난청, 어지럼증이 지속되어 귀를 잘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메니에르는 그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한 감정이 들게 하며 명확한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메니에르라는 질병이 프랑스에서 알려진 것은 1861년.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흐가 프랑스 아를르에서 왼쪽 귀를 자른 것은 1888년.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 것은 1890년. 메니에르라는 질병이 알려진 후여서 더욱 안타깝다. 그가 적당한 치료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까.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메니에르라는 질병을 알고 치료받은 지 5개월 차. 충분한 휴식으로 난청을 극복해갔다. 사실 메니에르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질 좋은 영양 섭취와 충분한 잠, 그리고 스트레스 요소를 줄이는 것이다. 증상이 개선되었지만 극심한 어지럼을 경험한 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세상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세상을 마주하기 보다는 메니에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도움을 주고자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나는 치유되었다. 다시 일어설 희망을 글에서 찾았다. 글을 쓰다 보니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질명의 원인, 치료방법, 그리고 나만의 대안을 찾게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내가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게 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게 한다. 내가 화나고 속상하고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끄적거리던 내가 둘째 아이를 낳으며 글쓰기를 멈추었고 그때부터 서서히 우울감이 쌓여갔던 것 같다. 우울감은 위장 장애로 이어지고 언제나 기운이 없어 구부린 자세는 디스크를 유발하였고 순환 장애로 인한 여러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메니에르, 이명, 우울증, 돌발성 난청, 공황장애 등 마음이 아프고 자가 면역 체계에 문제가 생겨 힘든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사람을 만난다면 일단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충분히 쉬고 싶을 때까지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공무원이 아닌 회사원 친구의 직언처럼 휴직을 쉽게 낼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의 이 이야기가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과로하던 내가 일주일 단위로 혈압이 치솟는 것을 보며 어느 순간 내가 소멸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지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최선을 다해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아플 때는 쉬어가는 것이 맞다.
충분히 쉬었다면 그리고 이명과 어지럼증으로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기 어렵다면 글쓰기를 추천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글쓰기를 추천한다.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친구와 대화하거나 나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과 대화하거나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이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과정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며 무엇보다 건강한 자아상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글쓰기는 나를 알도록 돕는다. 내가 나를 안다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적어도 편파적이게 부정적으로 흐르려는 사고는 막아준다. 글을 쓰다 보면 내 논리의 허점이 보이기마련이니까.
메니에르로 인해 여전히 매일 두 알의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언제 다시 메니에르가 깊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메니에르와의 안녕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과 충분한 휴식의 가치 그리고 글쓰기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쉴 틈 없이 지내는 내가 멋지다고 주입하며 나를 괴롭히고 차 한잔의 여유 없이 일하던 나는, 이제 글쓰기를 통해 매일 내가 한 선택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최선이었는지를 물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메니에르에게 안녕을 말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