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시대 사람들은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불을 바라보며 동물을 잡던 순간의 긴장감과 공포를 떨쳐냈다고 한다. 이른바 불멍인 셈이다. 오늘날 각 가정마다 불을 피울 수 없으니 현대인은 원시시대의 불멍에 해당하는 도구를 찾아냈다. 그것이 텔레비전이다. 외부에서 받은 긴장을 해소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우리는 TV를 틀고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응시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적당한 긴장과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텔레비전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드라마를 좋아했음에도 최근 본 드라마가 없다. 드라마는커녕 뉴스도 TV를 통해 접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럼 최근 본 영화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블 시리즈가 전부.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처음 대학생이 된 겨울 방학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드디어 돈 걱정, 시간 걱정 없이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왕창 빌릴 수 있다는 것에 열광했다. 겨울 방학 동안만 100편의 영화를 보았다. 100편을 기억하는 건 나의 버킷 리스트에 있었던 항목 중 하나였기 때문. 100편을 보려면 그만큼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즐겨야 가능한 일. 로맨스, 코미디, 액션, 누아르, SF, 스릴러, 미스터리 가리지 않았다. 가장 싸고 안전하게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영화였다. 그런데 아이들 위주의 영화를 보다 보니 이제는 어떤 영화가 상영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고 싶은 영화도 없다.
약이 줄어듦에 따라 잠도 줄어든다. 그러나 아직은 밖으로 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가장 쉽게 떠날 준비를 한다. 넷플릭스를 연다. 그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조용한 집이 좋았는데 영상을 보고 싶어 하다니. 감사하다. 영화를 찾아본다. 영화가 참 많다. 그런데 압축된 2 ~ 3시간 안에 촘촘한 구조로 짤 짜여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왠지 피로하다. 조금 더 느슨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찾아보자. 드라마를 보는 것이 좋겠다.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눈에 보이는 드라마를 재생시키고 틀어둔 채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한다. 모른 척 넘겨 두었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본다.
슬쩍슬쩍 눈으로 드라마를 본다. '우리들의 블루스' 속 민선아(신민아)가 운전을 하는데 귀에서 삐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나온다. 물을 잠그고 화면에 집중한다. 민선아도 메니에르에 걸렸나? 엄마에게 버려지고 아빠는 자살을 해서 어린 시절부터 죽고 싶었던 선아는 이혼 후 아들을 잃고 우울증에 걸렸다. 우울증으로 인한 이명이었다. 방송으로 접한 삐소리. 내가 오른쪽에서 듣던 이명과 같은 소리다. 나도 우울증인걸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의 멋진 사수 정명석(강기영)은 위암으로 수술을 한다. 후배 변호사에게 건강에 유의하라고 아마도 많은 변호사가 지금 본인처럼 건강상 문제를 겪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후배 변호사인 최수연(하윤경)은 사수의 동료 변호사도 메니에르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내가 걸리지 않았다면 그저 스쳤을 메니에르라는 단어.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 남매의 엄마 곽혜숙(이경성)은 매일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밥하고 일하고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연신 땀을 닦아댄다. 가족들은 그저 그런 엄마의 투정으로 듣지만 어느 날 엄마는 정말 거짓말처럼 죽고 만다. 어떤 이들은 이 죽음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죽음을 보며 어쩌면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겪을 수 있었을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과로는 급격한 혈압 상승, 호흡 곤란, 전신 통증, 극심한 두통을 불러오기도 한다는 걸 경험했으니까.
'나의 해방일지'를 보니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아직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준비는 되지 않았다. 블로그를 열어본다. 2010년에 개설된 블로그. 방치된 채 남겨져 있다. 드라마를 본 나의 마음을, 마음에 박히는 대사를 적어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내가 쓴 글이던가 싶을 만큼 나의 마음 그대로였던 문장. 다시 보고 다시 보았던 세상에 지친 염미정(김지원)의 대사.
드라마를 끄적거리다 보니 메니에르에 처음 걸렸던 당시. 메니에르라는 병이 생소하여 이에 대해 검색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정신도 멍한데 너무 어려운 말로 쓰인 글들이 힘들었다. 진단받게 된 과정, 처방받은 약,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최대한 쉽게 담아 글을 작성한다. 저염식 식사를 권하는 댓글이 올라온다.
비슷한 질병을 겪은 사람이 댓글을 단다. 사람 많은 곳에 오래 머물거나 소음이 심한 곳에 있으면 머리에 압이 차는 느낌이 들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하는데 증상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건강하던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증상이 두렵다고 했다. 너무나 비슷한 증상. 너무나 비슷한 마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심으로 응원한다. 온라인으로 받은 위로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끈해진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나는 위로받고 싶었구나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다만 누군가와 대면하여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말할 기운이 없고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나약한 모습을 누구에나 보일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엄살이라거나 호들갑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스러웠기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해명하며 나의 에너지를 소모할 기력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닿고 싶었다. 나의 가족, 그리고 가족 같은 친구보다 확장된 범위의 세상. 소리가 아닌 글로. 세상에 닿아본다. 온라인으로 닿은 세상은 나를 더 용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