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산적해있는 일들과 씨름한다. 못다 한 수업 준비를 하거나 아이들의 부름에 응하거나 남편이 만들어 놓은 흔적을 치우느라 분주하다. 나에게 우리집은 언제나 나를 둘러싼 누군가로 혹은 무언가로 가득했다. 장보고 요리하고 치우는 주체는 나지만 그 안에 나를 고려한 선택은 없다. 머릿속에 가득한 아이와 남편 그리고 학교.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우리집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나는 자다 일어나면 김치에 밥을 먹고 약을 챙긴 후 다시 눕는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잠을 모두 자고야 말겠다는 듯 계속 잔다. 어떻게 그렇게 자도 계속 잠이 오는 걸까? 약 기운 때문인 걸까?
뒷목이 뻐근하고 묵직하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이 바로 내 귀 옆에서 들린다. 심장이 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면 숨을 들이마시기도 내뱉기도 너무나 힘들고 그런 내 모습에 놀라 심장이 두근두근 터져버릴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아마도 이것이 내 삶의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는데 오히려 평온해진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정리하라고 악 쓰지 않고 남편에게 쓰레기라도 버려달라고 애걸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그저 고마움만이 남는 걸까. 엄마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도 씩씩하게 잘 지내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틈날 때면 전화해 안부를 묻고 나에게 좋은 것을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는 남편도 고맙다.
남편은 평일에도 시간이 나면 점심에 장어, 추어탕, 삼계탕, 해물찜 등을 사준다. 기운을 북돋는 음식들. 음식을 먹어도 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가장 좋아하던 해물찜의 감칠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이상하다. 남편은 맛있냐고 재차 묻는다.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사실 남편의 빠듯한 점심시간에 맞추어 식사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집에서 천천히 김치에 밥을 먹는 편이 더 편했다. 집에서 반찬 없이 먹을 것이 걱정된다는 남편의 마음이 고마워 맛있는 척 먹었다. 남편도 나를 위해 시간을 쪼개려고 얼마나 더 고군분투했을까.
사실 학교에서 너무 큰 이명과 어지럼을 경험하고 두려운 마음에 남편에게 말했을 때 남편은 덤덤했다. 예전처럼 집안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돕기는커녕 여기저기 양말과 옷을 벗어던지고 먹은 과자 봉지는 소파에 그대로 두곤 했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팔다리 멀쩡했고 암도 아니었으니 남편은 대수롭지 않은 꾀병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런데 에버랜드에서 아들이 아빠를 다급하게 부르고 뒤돌아본 남편이 비틀거리는 나를 목도하였을 때. 한참 쉬다 다시 걸으려 할 때 어설픈 모양새로 발걸음을 내밀고는 취한냥 바닥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풀려버린 다리로 넘어지려 하였을 때. 아들이 나를 안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부터 남편은 나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눈에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남편에게 종알종알거리던 이야기도 전혀 없었고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 주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남편은 내가 정말로 아픈가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다.
사실 나는 그 당시 진실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메니에르로 인한 증상들 그리고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가 겹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중저음의 물속에 있는 듯한 붕 소리가 청력이 떨어진 왼쪽에서 들렸고 청력이 정상이었던 오른쪽에서는 전자파의 삐 소리가 들렸는데 이비인후과 선생님은 삐 소리는 메니에르로 인한 소리가 아니라고 신경과를 추천하셨기 때문이다.
신경과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결국은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숨을 내쉬는 것도 들이마시는 것도 힘들어 죽을 듯 끔찍했던 그 기억들. 어쨌든 그때에는 온몸의 수치가 정상이 아니었고 그렇게 받아대는 검사들로 지칠 대로 지쳐서 그냥 마냥 쉬고만 싶어 신경과에는 가보지 않았다. 두통과 관련하여 뇌 촬영을 권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저 한의원에 증상을 말하고 약을 받아먹었는데 한약을 먹으면 두근거림이 덜했다.
한의원과 병원에서 한약과 양약을 각각 받아 들고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 휴직한 지 넉 달이다. 내내 잠을 잤더니 양약의 개수가 줄었다. 청력이 많이 좋아졌다.
청력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고혈압으로 진료받던 심장내과에서도 혈압이 정상 범주로 내려왔다며 앞으로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신다. 어지러움으로 인해 심장이 두근거린 건지, 심장이 두근거려 어지러웠던 것인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심장 두근거림과 어지러움증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주신다. 돌발성 난청이라는 이름처럼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병을 겪어보니 어지럼증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아직은 노이로제가 걸릴 만큼 어지럼증이 두렵다. 세상이 뱅글뱅글 돌고 아무리 바로 서려해도 설 수 없는 끔찍한 기분.
청력이 좋아지자 우울증을 만들어내던 이명도, 온몸이 아프던 통증도, 두통도, 목의 결림도, 가슴 두근거림도, 숨쉬기 힘들었던 증상도 모두 완화되었다. 어쩌면 청력이 좋아져서라기 보다 메니에르가 면역계 이상 반응 중 하나이고 면역력은 충분한 휴식과 영양 상태 개선으로 좋아지기에 이 모든 것은 휴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을 먹어도 일을 병행하던 시점에는 차도가 없고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기 때문에.
마흔이 넘는 평생, 이토록 쉬기에만 열중했던 시간은 없었다.
애써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이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났다. 애써 일정한 시간에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이 떠지면 일어나 배가 고파지면 먹었다. 온전히 내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메니에르 진단 6개월 차, 이제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매일 먹는 혈전 생성 억제 및 혈액 순환 개선제인 타나 민정, 어지러움을 치료하는 향현훈제 메네스에스정 두 알뿐이다.
이것이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다.
우리집을 지켜내려 애쓰던 내가 나만의 집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교류가 반드시 필요함을 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애쓰지 말자. 내 몸이 나를 바라봐달라고 애원해도 타인과 만나면 나보다 타인의 마음이 먼저 보인다. 나로서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 자체가 아직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