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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혜원 Aug 07. 2024

살인곡; 폭력과 광기가 느껴지시나요?

소니 롤린스 <Moritat>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EcOnhR5zkXs

‘Saxophone Colossus’ 앨범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1BBcGemV9mY


테너 색서포니스트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의 1957년 앨범 ‘Saxophone Colosus’에 수록된 <Moritat>의 테마 선율은 많은 이들에게 낯익을 것 같다. 광고나 예능 방송에서든 백화점 라운지에서든, 다른 뮤지션의 다른 편곡으로 몇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귀에 잘 들러붙는 선율이다.

<Moritat>의 또다른 제목은 <Mack The Knife>다. 1950년대 초에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바비 다린Boby Darin도 빅 밴드 편곡으로 <Mack The Knife>를 불러서 히트 시킨 적이 있고, 90년대 아이돌이었다가 지금은 어느덧 중년의 중견 가수가 된 영국의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도 이 곡을 2000년대 초반에 노래한 적이 있다.

곡의 테마 선율은 언뜻 들으면 밝고 경쾌한 느낌의 장조로 진행되는 것 같다. 마음을 들뜨게 한다. 하지만 곡이 선사하는 흥에 집중해서 몰입하다 보면 광기에 차오를 만큼 과하게 신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필 곡 제목 Moritat의 뜻도 ‘살인곡’이다.
옛날에는 전세계 어디에나 우리의 판소리꾼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노래에 이야기를 실어 들려주는 길거리 낭인 가수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들 중에 살인이 주제로 나오는 노래들을 Moritat이라고 했다고 한다. 즉, 살인 장면을 묘사하거나, 살인자에 대해 소개할 때 부르는 노래를 지칭한다.

<Moritat>의 원곡은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였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유명 재즈곡들 중 상당수는 1920-4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왔고, 그 곡들 대부분은 사랑에서 오는 설렘과 행복 혹은 번민을 주제로 했다. 하지만 <Moritat>은 다르다. 곡의 또 다른 제목인 <Mack The Knife>에서 맥Mack은 사람 이름이고 The Knife는 별명이다. 우리나라 조폭 깡패들 별명 중에 ‘도끼’나 ‘쌍칼’ 혹은 ‘망치’ 등이 있는 것과 비슷할 듯 싶다.

원곡의 가사도 칼로 사람을 살해하고 포대자루에 넣어 시멘트로 굳혀 강물에 던져 넣는 조폭 두목 맥키Mack(ie)와 그의 범죄 행각을 대유법과 은유법을 동원해 시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다. 말 그대로 Moritat인 것이다!

<Moritat>이 등장하는 뮤지컬도 그 곡만큼이나 당시의 일반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많이 다르다.

곡은 20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반골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holt Brecht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Kurt Weill이 합심해서 만든 1928년도 걸작 뮤지컬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온다.

(참고로 쿠르트 바일은 일전에 부록에서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과 쳇 베이커Chet Baker의 ‘피아노 없는 4중주단’ 연주로 소개한 곡 <Speak Low>의 바로 그 작곡자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내용도 사업화 된 거지 집단과 조폭 그리고 경찰 조직이 혼인 관계와 뇌물 등을 매개로 뒤엉켜 권력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곡의 또 다른 제목 <Mack The Knife>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이 올려지면서 새로 붙은 것이고, 독일서는 그냥 <맥키 메서의 살인곡Moritat von Mackie Messer>이었다고.

가사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원전에서는 은유와 대유를 쓰지 않고 더 직설적으로 폭력을 묘사했다.

소니 롤린스의 <Moritat>을 몰입해서 들을 때 벅차오르는 흥과 광기는 이런 배경 지식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 테마 선율에 정말로 흉악범의 광기 같은 거라도 서려 있는 것일까. 아무튼 살인곡이 이렇게 흥겹고 신나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곡은 불온한 힘으로 가득하다.


대부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인간은 잔악무도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구경할 때 본능적으로 죄의식뿐만 아니라 쾌감도 함께 느낀다. 수많은 디지털 게임들이나 영화들 중에 싸우고 때려부수고 생명을 해치는 장르가 많은 것은 그러한 폭력이 주는 커다란 쾌감 때문이다.

옛날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당시 최고의 영화 평론가였던 정성일 선생이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 영화 '스크림Scream'을 소개할 때 자신이 경험한 흥미로운 예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유학 시절에 정성일 선생이 극장에 갔다가 우연히 예쁜 소녀가 앉은 좌석 바로 옆에 앉아서 스릴러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카메라가 살인범의 시점으로 도망치는 희생자를 뒤쫓는 장면에서 옆자리 소녀가 팝콘을 먹으며 집중해서는 “Come on.. Come on..”하고 들떠서 중얼거리더란다. 소녀는 희생자가 아니라 살인범한테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반응은 카메라의 시점을 살인범의 시점에 등치 시켜 놓은 감독의 연출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마는, 그 이전에 인간의 폭력성, 사냥하는 포유류 유인원으로서의 인간 본성이 발현된 탓이기도 하다. 이를 간파한 감독이 인간의 사냥 본능을 카메라로 관객 시점화 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폭력 성향은 단지 배가 고파서 사냥하는 포식 동물보다는 사냥 자체에서 즐거움까지도 느끼는 포식 동물이 살아남는 데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다행히 은혜롭게도 인간이라는 종은 조상에게서 폭력 성향만 본능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약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돌보며 자신의 것을 약자와 나누는 본능도 함께 물려 받았다.

또 무엇보다, 내면의 폭력 성향을 제도와 관습 그리고 예술 안에서 다스리며 문화로 승화시키는 특유의 지적*미적 감각을 지녔다.

이러한 문화적 승화에 있어, 가장 안전한 방식은 폭력을 정의 구현에 단단히 묶어두는 것이다. 악당을 응징하는 인과응보의 서사에 폭력을 그 수단적 기능으로서만 복무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식상한 서사가 된 지가 구석기 시대 만큼이나 너무 오래되었다. 여기서 벗어나 인간의 폭력성 그 자체에 초첨을 맞춘 불편한 내용의 예술 작품들이 등장한 지도 이미 매우 오래다.

그런 만큼 오랫동안 논쟁적이었던 주제가 있는데, 영화나 디지털 게임 등에서 폭력성을 수위 높게 드러낸 작품들이 사회의 폭력성을 부추기는가,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논쟁적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답이 설핏 엿보인다. 부추기기도 하고 동시에 반대로 완화하기도 한다. 한쪽으로 딱 답이 나오지 못하고 오랜 시간 논쟁적이었던 것은 모순되게도 정반대의 답 두 개가 다 맞기 때문이다.

폭력을 분출하는 작품들은 인간 내면에 잠재돼 있던 폭력적 본능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일상에서 억눌리며 임계치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조금씩 차오르던 폭력성의 수위를 대리 만족을 통해 낮춘다. 이 길항 작용에 있어 어느 쪽으로 더 기울지는 감상자의 기본 성향과 신념 그리고 감상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과 그에 따른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간혹 이 논쟁에서 어떤 예술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예술은 힘이 없다며 예술 작품의 폭력성이 현실의 폭력을 불러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단적으로 겸손한 척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혹은 정말 겸손하게도 예술의 힘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이 충분히 마련돼 있을 때 예술은 어떤 개인, 심지어 개인을 넘어 대중을 실제 행동으로 이끄는 격발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폭력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 특정한 방식만을 인정하거나, 악이 응징되는 서사의 수단으로서만 폭력의 표현을 허용하거나 하는 등의 강제가 예술에 가해져서는 안 된다.

실재하지만 우리가 직시하기 곤란해 하는 것을 똑바로 보여줄 때 예술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또, 그것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인간과 사회는 더 건강해진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폭력성을 국가나 사회가 강제로 억누르기만 한다고 해서 우리 안의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말 위험한 것은 예술이라는 격발 장치 아래서 격발 장치를 향해 차오르고 있는, 현실의 사회적 폭력이라는 인화성 물질의 수위다. 예술이라는 격발장치에는 그 수위의 현재 위치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하는 반사경도 함께 붙어 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예술일수록 이 반사경이 우리 내면과 사회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비춰 준다. 도를 넘는 검열과 제제로 예술이라는 격발장치를 망가뜨리면 이 반사경도 같이 깨져 버린다. 인간과 사회는 속도계가 고장 난 채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얼마나 위험하게 내달리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채로 파국을 향해 돌진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의도적으로 무분별하게 장려하는 작품들까지 예술로서 옹호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사고와 통찰의 지형을 입체화 하는 것과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같은 영화보다, 폭력 장면 하나 없어도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옛 정치인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야 말로 진정 현실 세계의 폭력을 부추기고 장려하는 훙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진짜 위험한 폭력에 친화적일수록 우리 내면과 사회의 폭력성을 감추고 숨기는, 반짝거리고 예쁘장한 것들만 덕지덕지 갖다 붙인 조악한 가짜 예술을 숭배한다.


소니 롤린스가 연주한 <Moritat>의 원곡을 쓴 쿠르트 바일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폭력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니 롤린스의 <Moritat>을 들을 때 벅차오르는 흥과 광기는 단지 소니 롤린스의 빼어난 연주와 해석 덕분이 아니라, 곡의 선율 자체에 두 원작자의 폭력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가 스며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Moritat>의 테마 선율에 폭력과 광기라는 주제가 필연적으로 그리고 비선험적으로 묶여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술은 인간의 이성 판단 너머에 있고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복잡 미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무엇 또한 결코 아니다. 내가 감히 명저라고 평하는 우리나라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음악 교육자인 남예지의 책 <재즈, 끝나지 않는 물음>의 4장에서 저자는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에 대해 고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 자체는 어떠한 감정이나 형상도 표현하지 못 한다. 다만 우리는 특정 화성이나 음정에서 학습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메이저 조성의 곡은 밝고 마이너 조성의 곡은 어둡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곡의 제목이나 선율에 붙여진 가사를 통해 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남예지의 이러한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특정한 감정이나 특정한 사고 혹은 사상 등의 주제를 선율에 담는 창조적 음악 작업에 있어, 주제와 선율 사이에 비선험적인 운명적 필연성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제와 선율의 관계가 무작위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악적 창조 작업이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문화적 약속 체계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술은 이 학습된 약속 체계의 바탕, 즉 관습을 전복시키거나 혹은 그 관습에 아직 포섭되지 않은 빈 구멍을 공략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은 폭력과 광기라는 어둡고 격렬한 주제를 곡에 담기 위해, 암울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사회문화적으로 약속된 단조 선율에다 박력 넘치는 박자만 갖다붙이는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밝은 장조에 어두운 주제를 담는 단순하고 얕은 차원의 관습 비틀기를 행하지도 않았다.
<Moritat>의 원곡 선율은 장조이지만 보통의 장조곡들과는 다른 미묘한 느낌을 가졌다. 장조의 색채를 띠기는 하지만, 그 색채가 문화적 관습 체계 안에서 온전히 밝고 긍정적으로만 해석되는 단색은 아니다. 보통의 장조 선율과는 다른, 경계가 모호하게 뭉겨지며 여러 빛깔로 번져 나가는 오묘한 색채다.

그 번짐은 매끄럽고 우아하게 인근의 색깔들로 퍼져 나가기보다는 균열을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뭉쳐진다. 이 음색의 균열이 관습에 아직 포섭되지 않은 빈 구멍이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이 공략하는 지점이다.


물론, 이 균열의 틈새가 필연적으로 광기나 불온함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남에지의 글에서 인용했듯이 음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감정이나 형상도 표현하지 못 한다. 다만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폭력과 광기라는 특별한 주제를 바로 그 틈새에다 심었다.
보통의 장조 선율과는 다른 기묘한 음색이 발생하는 틈새를 가진 선율을 창조하고, 그 선율의 틈새에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담아냄으로써 그 주제의 복잡하고 어두운 면모를 비관습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노년의 소니 롤린스, 1930년생으로 2024년3월4일 현재도 생존해 있다.

소니 롤린스의 <Moritat>을 들을 때 느껴지는 불온한 흥은 온전히 선율 때문만도 아니고 단지 곡에 대한 배경 지식 덕분만도 아니다. 양자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배경 지식이 없었더라면, 나를 비롯한 듣는 이들은 <Moritat>을 독특하고 매혹적인 선율로서 감상하기는 했겠지만 두 창작자들이 그 선율에 심어놓은 깊고 중요한 주제에 가 닿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창작자가 아무리 중요한 주제를 곡에 담았고 감상자가 그 주제와 곡에 대한 배경 지식을 사전에 숙지했다고 해도, 곡의 선율이 오묘한 매력을 내뿜지 못했더라면 그 주제는 이성 판단의 작동을 넘어 격렬한 정서적 감응까지 이끌어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럼, 다시 한 번 소니 롤린스의 <Moritat>을 집중해서 들어보자. 균열의 틈새가 귀에 걸리는가? 그 틈새에 심긴 폭력과 광기가 느껴지는가? 불온한 흥으로 벅차오르는가?


부록8)
<Moritat>의 뮤지컬 원곡은 소니 롤린스의 연주나 빅 밴드 스타일로 편곡된 보컬 곡들보다 훨씬 더 기묘하고 불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벅차오르는 흥은 곡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더해진 것이고 원래는 그처럼 폭발하는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위 본문에서 언급한 균열의 틈새는 훨씬 더 크게 벌어져 있으며, 여전히 광기가 번뜩인다.
원곡의 느낌에 가까운 옛날 독일 흑백영화 속 노래로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zMWc4h77e2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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