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다저스 모자를 쓰고 샌프란시스코 갔다가 혼났다.
한국에서 나는 창원을 연고로 하는 NC 다이노스의 팬이었다.
그런 내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야구장들을 누비게 될 줄이야.
다저스의 오랜 팬인 남편 덕분에 시작된 이 여정은
디트로이트, 세인트 루이스, LA 그리고 샌프란 시스코 까지 이어졌다.
각 구장에서 산 야구 모자만큼이나 추억들이 쌓였다.
어제는 BTS, 내일은 손흥민 오늘은... 그냥 추억?
가장 기억에 남는 구장을 뽑으라면 역시 LA 다저스타디움이다.
팬들의 열기는 한국 야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하지만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경기 그 자체 보다 '타이밍'이었다.
우리가 직관한 날을 기준으로
하루 전날은 BTS 뷔, 다음날은 손흥민 선수가 시구를 했다.
그런데 우리 남편, 그 좁은 확률을 뚫고 정확히 그 가운데 날을 예매해 버렸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슈퍼스타들을 앞뒤로 두고,
우리는 아주 평온하게 야구만 보다 왔다.
정밀한 '똥손' 타이밍에 박수를 쳐줘야 할지...
뒤늦게 일정을 바꿔보려 했지만 우리의 표는 팔리지 않았다.
그래도 위안이 된 건 경기장에서 파는 소주였다.
미국 한복판에서 오타니의 홈런을 기다리며 마시는 소주라니.
그 생소하고도 달콤한 경험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샌프란 시스코 : 위험한 다저스 모자의 외출
바다를 끼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 오라클 파크는 아름다웠지만
LA다저스 모자는 패션쯤으로 알았던 나는 작은 실수를 범했다.
사람들은 모자 당장 벗으라 하고,
옆에 있는 남편에게 지금 당장 자이언츠 모자를 사라고 했다.
알고 보니 두 팀은 앙숙 라이벌이었는데, 나를 얼마나 간 큰 구경꾼으로 알았을까.
다행히 '이정후 선수 존'에서 받은 기념 티셔츠로 갈아입으며 약간의 평화를 찾았지만
그 티셔츠가 나중에 세탁기에서 주황색 물을 뿜어내며 내 다른 옷들을 처참히 물들였다.
이정후 선수의 열정만큼이나 강렬했던 주황색 물 빠짐, 또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페디'를 보러 갔지만 글러브를 얻어온 날
NC 팬이라면 가슴이 뛸 선수 에릭 페디,
그가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 선발로 나온다는 소식에 7시간을 운전해서 갔다.
야구의 신은 계속 우리 편이 아닌가?
일정이 바뀌어 페디의 투구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마침 미국의 '어린이날'이었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아이들에게 글러브를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
사은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에 우리 아이들은 너무 기뻐했고,
페디는 못 봤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한국 야구가 진짜 부러워해야 할 건 메이저 리그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이정후의 원정경기를 응원하며 위해 태극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건
웨스트 미시간 화이트캡스(West Michigan WHITECAPS)라는 마이너리그 3군 경기였다.
아이들이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받은 쿠폰으로 간 경기장 안에는
놀이터, 매점, 맥주바가 늘어져 있었고, 가족 단위 관중들이 인산인해였다.
치어리더와 각종 이벤트, 응원열기까지 메이저리그 못지않았다.
이름은 잘 모르는 선수 들이었지만 실력은 탄탄했다.
아, 이래서 미국 야구는 세계 최강이구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야구장에 보내주는 나라,
이 힘이 한국 야구에도 스며들길 바라게 됐다.
MLB 유람기 끝에 남은 건 물 빠진 주황색 티셔츠와 남편의 예매실력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행복하다.
야구라는 공 하나로 세계의 중심에 서있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그 뜨거웠던 기억들은 옷장에 놓인 각 도시의 야구모자들 속에 조용히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