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도 없는 길을 선물 받았습니다.

미국 이주 첫 주, 집 밖을 못 나가던 우리에게 찾아온 온기.

by 사이의 삶

와이파이조차 연결되지 않은 적막한 집. 남편의 첫 출근길을 배웅하고 나니,

나와 아이 둘은 집에 남았다.

종이에 그림을 끄적이거나, 가져온 몇 가지 책을 돌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엔 '미국은 총기 사고가 잦다'는 실체 없는 경고음이 울렸다.

근거 없는 선입견은 굳게 닫힌 문보다도 사람을 더 깊이 가둔다.

하지만 아이들의 답답함은 두려움 보다 컸다.

결국 나는 딱 집 앞마당까지만 나가보기로 했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금세 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과 나뭇가지로 최고의 장난감을 만들고

꼬리를 살랑이는 다람쥐는 아이들을 달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긴장이 조금씩 풀릴 때쯤, 저 멀리서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Welcome!"


환한 미소로 다가온 건 이웃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서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미리 준비한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며,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낯선 이방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인사였다.

투박한 글씨를 본 순간, 며칠간 나를 짓눌렀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서툰 영어로 물었다. 내일이 할로윈인데, 이 동네에서는 분위기가 어떠한지

아이들이 별로 없는 동네라 정해진 행사는 없다고 하셨지만 인자하게 웃으며 대신 괜찮으면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 오라고 말씀하셨다.


서툰 첫 대화를 마치고 연신 고맙다는 제스처와 함께 감사인사를 드렸다.




다음날 저녁 6시, 갑자기 추워진 바람을 뚫고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할머니의 손에는 간식 외에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직접 준비하신 '동네 지도'였다. 단순한 약도가 아닌 아이들이 없는 이 동네에서,

어느 집 문을 두드려야 사탕을 받을 수 있는지 할머니가 직접 이웃들에게 확인하고 표시해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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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우리 아이들은 낯선 길 위에서 한 번도 헤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 거리 위로, 지도에 표시된 집마다 따뜻한 불빛과 사탕 바구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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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그날 받은 건 사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연고 없는 땅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던 우리 가족에게, 누군가 미리 그려놓은 길을 걷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낯선 타국의 첫 발걸음은 든든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께 문득 궁금해진다.

낯선 곳에서 받은 예상치 못한 친절이 당신의 삶에도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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