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언어가 되기까지
남편은 회사에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주 4회 ESL을 다니기 시작했다.
보통 큰 도시에서는 시험을 보고, 레벨이 나뉘고,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미시간 그랜드 헤이븐이라는 작은 도시는 달랐다.
오전반과 오후반
머리가 희끗한 캐시(Cathy) 선생님이 작은 교회 지하실에서 영어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경력이 오래된 선생님이었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정겨운 분위기였다.
주 4회, 하루 3시간씩 수업을 듣다 보면
지루할 때도 있었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사실 영어에 대한 열정 보다 '해야 할 것 같아서' 다녔던 수업이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아침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그래도 작은 노력은 계속했다.
스마트 오더나 키오스크 대신
일부러 줄을 서서 주문했다.
원하는 메뉴를 하나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드라이브 스루는 늘 도전이었다.
뒤에 차가 있다는 압박감, 읽히지 않는 직원의 표정,
나는 말 그대로 불편함을 샀다.
그 불편함이 곧 나의 수업료였다.
드라이브 스루에 스피커는 교실 속 캐시 선생님의
친절한 발음을 결코 들려주지 않았다.
ESL 수업은 분명 도움이 됐지만, 정작 머리에 남은 건 생존에 가까운 영어였다.
나만의 작은 퀘스트도 있었다.
언젠가는 어떤 가게든 전화로 문의를 해보는 것.
아직은 버튼을 누를 용기만 쌓아두는 단계였지만.
교실 밖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영어에 갈증을 느낄 때쯤,
지역사회 시스템을 통해 첫 번째 튜터를 만났다.
알렉사(Alexa) 선생님이었다.
대가 없이 누군가의 적응을 돕는 분이었다.
교사로 퇴직하시고, 그랜드 헤이븐 중심가에서 고양이가 사는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다.
튜터링 시간의 대부분은 책이야기로 흘러갔다.
문법이나 문장을 배운다기보다는 취미를 나누고, 각자의 삶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쓰면 내가 영어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손짓과 발짓이 섞인 어설픈 말이었고, 알렉사 선생님은 그걸 찰떡같이 이해해 줬다.
그 무렵 우리는 아이들 튜터 선생님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이 많이 오던 날,
아이들과 썰매를 타러 공원에 갔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썰매 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우리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걸 보고
인상이 좋은 금발의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나 한국 울산에서 살았어"
알고 보니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가족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의 부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 일처럼 백방으로 알아봐 준
덕분에 크리스티(Christy)라는 귀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크리스티 선생님은 현직 아트 교사였는데, 학교수업이 끝나면 우리 아이들의 튜터가 되어주었다.
교사의 겸직이 엄격한 한국과 달리 자유롭게 투잡을 뛰며 자신의 재능을 나누는 미국의 문화가
생경하기도 하고 신기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확신하게 됐다.
영어는 교재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 관계 속에서 조금씩 진짜가 된다는 걸.
그리고 미시간 사람들의 다정한 배려 속에서 우리 가족의 삶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