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착, 대부분은 남편이 했다.

남편은 서류와 싸우고, 나는 걱정과 싸웠다.

by 사이의 삶

미국 가기 전부터 남편은 노트북을 켜고 분주했다.

SSN이 이렇고, 미시간은 면허정책이 어떻고, 학교에 준비할 서류는 어떻고

사실 나는 잘 몰랐다. 남편이 오라는 곳에 가고, 사인하라는 곳에 사인했다.


항상 남편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마치 '생존 키트'처럼 들고 다녔다.

남편의 서류는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아마 서류 한 장이 부족해 거절당할까 봐 그랬던 것 같다.

담당자 앞에 서서 제출할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본 것 같다.

아마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빨리 가족을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한 가장의 책임감이지 않았을까.


그러던 나의 눈에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미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건 이 세 가지였다.

SSN, 운전면허, 아이들 학교 등록.


1. SSN(Social Security Number)


SSN은 미국에서 주민등록번호에 가깝다.

은행계좌, 급여, 운전면허까지 거의 모든 것에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아주 운 좋게도 일주일 만에 해결했다.


보통은 똑같은 서류를 들고 가도 5분 만에 긍정적인 답변을 받기도 하고,

'서류가 부족하다', '너무 빨리 왔다'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기도 한다.

어제는 가능했던 것이 오늘은 안 되는 곳이 미국이다.


2. 운전면허 전환


운전면허는 주마다 규정이 달랐다.

처음 머물렀던 미시간에는 다행히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이 면제였고,

눈검사 외에 필수 서류로 패스가 가능했다.


3. 아이들 학교 등록


행정 업무에 지쳐갈 때쯤 아이들의 학교를 찾았다.

아이들 학교 등록은 서류보다 사실 마음이 바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보다 부모가 더 긴장했던 것 같다.


여권, 예방접종 기록, 거주 증명서를 준비해

학교 오피스를 방문했다.


우리를 맞이해 준 건 권위적인 학교가 아니라 직접 복도 운동장 카페테리아 등을 돌며

학교를 소개해준 친절한 교장선생님의 뒷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의 긴장을 풀어준 소중한 기억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끝나고 나서야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 행정 처리는 운과 인내의 영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 안에 끝내겠다'라는 한국적 마인드보다는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견디면 모두에게 이롭다.


SSN 카드가 일주일 만에 오는 경우도 있지만, 시스템 오류로 한 달 이상 걸리기도 하고

학교 등록은 담당자가 휴가를 가버리면 기약이 없기도 한다.


미국의 행정 절차에는 정답이 없다.

같은 주 같은 오피스라도 담당자에 따라 달라지는,

'복불복'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때로는 짜증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우리 가족이 더 배운 게 많다.

한국에서 조급했던 마음들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예상치 못한 절차가 생겨도

해결은 결국 됐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도 미국의 우편함 앞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준비가 부족해서도, 내가 잘못해서도 아니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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