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삐그덕거리는 양철 대문 앞에 철퍼덕 쭈그리고 앉아 철사로 함석판을 꿰매고 계시던 아버지를 그려본다. 편찮으신단 이유로 방안에만 누워 있지 않으셨고 힘이 없단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던 아버지다. 이것저것 무엇을 해 놓고 떠날까 둘러보다 당신 눈에 들어왔던 낡은 양철 대문짝. 그 허름한 대문짝을 고쳐 놓고 떠나야 마음 편하실 거라 여기셨을까. 그래야 가족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여기셨을까.
온전히 혼자 서 있지 못해 작대기로 받쳐 지탱하던 외짝 대문. 열고 닫을 때마다 얇은 함석이 뒤로 살짝 젖혀졌고 고정된 나무 말뚝에 노끈을 칭칭 감아 어둠을 잡아놓았던 대문이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충분히 후다닥 열 수 있는 문이었지만 고쳐 놓고 떠나야 안심하실 수 있었을까. 그래도 남은 가족에겐 젤 안전한 보안이 아버지 당신이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친구가 그랬다. 너네 아버지 편찮으시다더니 대문 고치고 계시더라고. 인사하는 그녀에게 화답하는 미소만 날린 채 무거운 망치로 뚝딱뚝딱 못을 박고 계시더라고. 그 망치 또한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오지만, 미소를 보내는 몸짓도 얼마나 애쓴 몸짓이었을까 마음 아파오지만, 그땐 몰랐다. 대문을 고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었을까 했다. 그냥 노는 손이 있어 고치고 계셨구나 했다. 어린 나는 당신의 힘든 모습을 감히 상상하거나 그려보진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짊어진 무게가 무거워도 아버지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라 여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신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그 당시. 나는 감기만 해도 힘들어서 골골거리는데 곧 죽을 목숨을 아시고도 그리 열심히 남은 생을 가족 위해 던지셨음을 이제야 아픔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아버지가 머물렀던 곳을 찾았다. 양철 대문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지난날의 아픔이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집은 이미 신식 건물을 올렸고 낡은 양철 대문을 지나 빙 돌아 마루로 올라갔던 집이 아니라 문을 열면 입식 부엌이 마주하고 허리 꼿꼿이 세우고 서서 설거지를 하던 그야말로 좋은 세상에 걸맞은 좋은 집이었다.
길을 가다 오래된 양철 대문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삐그덕거리고 아팠던 이승의 인생만큼 껍데기가 벗겨지고 날 것 그대로 녹슬었어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무던함이 왜 그리 좋을까. 아버지 가신 날의 나이를 엄마가 되려 하던 그때의 어린 딸이 쫓아가고 있다. 당신의 어렸던 딸도 철제 대문의 녹처럼 애달픈 인생길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녹슨 인생도 삐꺽거리는 삶도 집을 지켜주는 양철 대문 같은 굳건함으로 버티고 살아간다.
가을비에 유난히 촉촉이 젖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