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하고 은은한
낡은 연초록 철제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사람이 사는지 모르지만 튼실한 감나무를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대문이 을씨년스레 보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것들을 보면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단감인지 떫은 감인지 모를 옛정에 매료되어 감나무 사진을 찍었다. 오히려 감나무로 인해 내 눈길에 확연하게 들어온 낡고 오래되고 빛바랜 철제 대문이 더 정겨울 뿐이다.
정숙하고 얌전한 아이처럼 철제 대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묵묵히 길가는 여행객의 발길을 외면한 채 소리도 없이 굳건하다. 정몽주 유허비를 보러 들른 비각 주위는 풀만 무성히 자라 주위가 선연하다. 키높이에 맞게 알맞게 영근 감은 지나다 누군가 하나 툭 건드려 따도 모르겠다. 감도둑을 잡으려 해도 발소리로 짐작하지 않는 한 이파리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감꽃을 생각하다 감 하나를 따고 싶었다.
함부로 딸 수는 없었다.
주인집 담장 너머로 넘어온 앞집 감나무들이 가지를 벌려 무성한 감들을 널어 뜨리며 어린 시절의 나를 유혹했다. 하나만 따면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감나무 주인이 보지 않게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회를 엿보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게 따야 했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쭈그리고 앉은 어린 모습을 엄마는 볼 수 없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굽신거려야 딸 수 있었던 것을 툭! 아무렇지 않게 하나 땄다. 그 주인의 마음이 이 집에 살고 있는 듯하다.
감꽃은 5~6월경 연한 초록 나뭇잎 아래 살며시 핀다. 사실 감나무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 크기가 작아 어찌 보면 꽃 같지 않다. 동그란 은방울처럼 생겼으며 색깔도 하얀빛의 은은함이 감돌아 수수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은은한 감꽃을 따 단물을 빨아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심히 잘못된 기억이지 싶다. 왜곡된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해서 진짜인 듯 저장되었나 보다. 사루비아 단물을 빨아먹었던 기억이 왜 감꽃으로 투영되었을까. 왜곡된 기억일지라도 추억이 깃든 기억이라 어린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고 싶었던 이유가 차라리 낫겠다. 이 모지리도 모자란 기억의 왜곡을 어이할까.
하얗고 여린 감꽃을 따 실에 꿰어 엄마에게 줄 목걸이를 만들고 팔찌를 만들었다.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서 떨어진 감꽃을 주웠다. 강아지풀로 만든 반지보다 더 예뻤다. 진주 같았다.
아름다운 추억 하나 주워 담았다.
괜스레 엄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