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풀어놓는다
메마른 땅바닥에 엎드려 숨죽이며 자신 옆에 끼어든 불청객이 떠나길 기다리고 있다. 메뚜기는 이 한여름에도 숨 가쁘게 제 살 길 산다. 땅이 갈라지고 물 한 방울 없는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뛰는 모습은 잠깐 본 이 순간에도 애처롭다. 물줄기를 높이 들어 훠이훠이 물을 뿌리면 상추잎에 잠시 앉았다 후다닥 놀라 호박잎에도 머물다 또 뒷걸음친다. 그가 머물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 메마른 땅은 아닌 듯하다.
가만히 보면 옛날의 메뚜기 색깔이 아니다. 예전에 벼농사를 많이 할 때 푸른빛이 약간 도는 메뚜기를 많이 보았는데 요즘은 색이 약간 바래진 듯 회색빛이다. 종류가 다를 수도 있겠다. 이상기후로 인해 살아남은 종인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고 내 주위를 맴도는 폼이 낯설지 않아 이쁘기도 했다. 요즘엔 곤충들도 토종은 보기가 힘들고 외국종이 많거나 잡종이 들어와 생태계를 교란시키기도 한다. 언뜻 본 고추잠자리도 정겨운 고추잠자리가 아니었다. 누르스름하고 거무튀튀한 잠자리가 차량 주위를 맴돌다 앉았다 쉼 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순간 예쁘다는 마음보다 약간 징그러웠던 느낌이 들었다. 갈색 메뚜기는 물뿌리개로 땅을 적셨더니 폴짝 뛰어 상춧대 위에 앉았다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한 아이가 집에 메뚜기가 많단다.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것인 줄 알고 메뚜기도 잡아 기르는가 보다 색다르다 여기며 호기심을 가졌는데 보여줄까요? 한다. 굳이 가까이에서 무서울까 봐 자세히 볼 필요가 없을 듯하여 말렸는데 사실 궁금하긴 했다. 알고 봤더니 도마뱀의 먹이란다. 낮에 텃밭에서 본 메뚜기가 생각났다. 도마뱀의 먹이로 쓰이고 생을 마감한다니 그도 어느 곳에선 비주류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에게도 날고 싶은 꿈이 있겠지.
낭만을 아는.
그 시절엔 흔한 메뚜기였다. 우리에겐 친숙했고 논밭에 깔렸고 4~50평 넓은 밭뙈기에 옥수수가 밀림처럼 심겨 있는 곳에 흩어져 살아도 개의치 않았다. 메뚜기는 그곳이 안식처였다. 혹 모르고 밟혀도 아파하는지도 몰랐다. 돌봐야 할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제 몸 알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대한 조금의 보살핌도 없었다. 메뚜기는 살아 움직였지만 우리에게 해도 없었다. 곤충채집을 해도 메뚜기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하나의 작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그런 메뚜기를 먹었던 기억이 있을까? 아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옛날엔 메뚜기를 구워도 먹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언니 오빠가 노는 곳에 모이면 그들은 으레 메뚜기를 구워놓았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때, 그때는 무엇을 먹든 맛있었다. 논두렁에서 굽던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언니 오빠들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고 하나둘 고향을 떠날 때쯤 개구리 잡고 폴짝폴짝, 메뚜기 잡고 팔락팔락 했던 추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던 것이다. 메뚜기를 구워 먹는 것은 개구리를 구워 먹는 것보다 비호감에 속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꼬드득 씹으면 고소하고 담백했다.
새삼 저 아이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상춧잎에 앉았다는 건 땅이 건강하고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증거란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흔히 알고 있고 구워 먹었던 푸른 메뚜기는 아닌 것이라 해도 말이다. 갈색 메뚜기든 푸른 메뚜기든 메마른 땅에 다시 찾아와 앉은 메뚜기가 제 살 길 찾아 허둥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저 아이의 생명도 이제 길지 않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 가을이 지나면서 사라질 것이다. 짝짓기를 하고 알을 품고 그러다 죽을 것이다. 한여름 동안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죽기 전에 분명 품고 있던 꿈을 날리며 다닐 텐데 내게 덤빈다 해도 쉽게 내쫓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메뚜기로 인해 저녁을 잠시 느슨하게 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