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낭만이 앉았어요
어릴 적 우리 집 지붕은 슬레이트였다.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저곳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부모는 변변한 집을 갖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남의 집살이를 시작했고 부엌 하나 방 하나가 있는 단칸방을 여러 해 살아냈다. 주인집 지붕 너머로는 탐스런 무화과가 익어갔고 일용할 양식을 대신했던 대봉감도 지천이었다. 셋방을 살던 사람들의 지붕은 낮았고 얇은 슬레이트가 깨져 비가 새기도 했다.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한 건 중학교 무렵 독채로 전세를 얻어 살림을 났다. 그때는 그래도 변변한 외형을 갖춘 집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부자의 부류에 속했던 양옥집은 분명 아니었고 우리가 평생 갖게 될 줄 알았던 독채도 그 후 우리 것이 안 되었다.
'우리 집'을 갖게 되었을 때가 고등학교 시험을 치른 후 입학 무렵이었으니 내 부모는 떠돌던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 터전을 마련한 타지에 정착한 지 십 년 만에 이룬 소원이었다.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오빠와 남동생과 한 방을 쓸 수 없으니 아버지는 부엌 한 공간을 나눠 내 방을 만들어 주셨다. 옷장 하나가 들어갔고 이불을 펴면 몸 하나 딱 누일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내 것'이었다. 부엌이 좁아졌고 내 공간이 생긴 그곳에서 부모는 두 다리 쭉 뻗어 한숨 놓으셨다. 한숨이 오래갔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그곳에서 십 년을 더 살다 지붕을 넘어 하늘로 가셨다.
새로 마련한 집도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지붕을 고친다고 지붕 위로 올라간 적도 기억이 난다. 오래된 슬레이트가 햇빛에 삭으면서 구멍이 뚫려 비가 샜고 슬레이트 지붕에 무엇을 덧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붕은 그러고도 몇 번을 더 아버지 속을 썩였다. 길가에 앉은 우리 집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등을 내보였고 집이 끝나는 지점에서 양철 대문이 삐끄덕거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을 만큼 허름했다. 그럼에도 그곳은 우리에게 천국이었다.
객지를 떠돌다 정착한 이곳에서 부모가 마련한 고향을 나는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있다. 언 손으로 쌀을 안치시면 모락모락 피어나는 엄마의 따뜻한 밥 냄새가 그립고 그 사이 떨어져 다칠지도 모르는 지붕에 올라가 무언가를 덧대시던 아버지의 가냘픈 다리가 떠오른다.
개발이 한창인 때가 있었다. 인근에 lc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 외지인들이 땅을 사 투자도 많이 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옛날의 그 고향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고향이라며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사는 사람들로 인해 예스러운 멋은 가끔 남아 있다. 옛것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카페를 만들기도 하고 뜯어고쳐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는 곳도 많다. 우물가가 있던 곳에 고급 빌라가 들어와 있고 뻥튀기 아저씨네 집은 골목길로 변신해 벤츠를 즐비하게 세워 놓았다. 완전히 타인이 된 듯한 낯선 거리를 지나다 보면 문득문득 옛것들을 보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낭만을 찾게 된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한여름의 아름다운 꽃 능소화가 앉았어요
아버지의 투박한 손자국이 묻어 있는
능소화 앉은 지붕 위로
따뜻한 된장 시래깃국 냄새가 하늘로 솟습니다
그 냄새에 이끌린 어릴 적 꼬마는
마음 벌써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릅니다
불 지피며 된장 끓이던 엄마 얼굴이 보이고
해가 지도록 놀다 코피 흘리던 꼬마가 보이고
달집에 불이야 양철통 휘돌리던 조무래기들이 보이고
거나하게 술 취해 걸어오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숙제 다 했니
한자는 다 썼니
가진 것 없어도
남부끄럽지 않게 교육시키시던 무서운 아버지가
오늘은 능소화의 화사한 얼굴로 다가와
슬레이트 지붕을 밟으며 오래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