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탱고> ㅡ코르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025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 구미가 당긴 건 사실이다. 코르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은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름도 생소했고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아 부르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그 생소함이 읽고 싶어지는 욕구를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검색해 보니 가까운 도서관에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인데 금방 대출되지 않은 이유가 있나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다른 볼일을 보느라 시간이 늦어진 만큼 그래도 달려갔다.
한낮의 도서관 주차장은 제법 빈 곳이 있어 편하게 주차를 하고 들어간 도서관에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고 지적인 공기가 감돈다. 자세히 보면 책을 보는 사람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더 많은데도 말이다.
터벅터벅 걸어 검색대로 가서 <사탄 탱고>를 쳤더니 그새 대출이 되어버렸다. 급하지도 않은 볼일을 보는 사이 발 빠른 애독자가 낚아채갔다. 나 같은 사람이 많으리란 건 잠시 잊었는지도 모른다. 코르스너호르커이의 다른 작품도 모두 대출이 된 상태다. 또 바보같이 아, 탄식만 하고 있다가 그냥 나오기 안타까워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를 살펴보고 이름이 잘 불려지는 중국 작가의 작품을 두 권 골라 터덜터덜 무거운 현관문을 퍽 열어젖혔다. 분노의 킥이었지만 사실 무거운 문을 밀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바빠도 리브로피아 앱을 정리해 두었어야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리브로피아가 잠시 중단된 상태다. 비번을 넣어 찔러도 열리지 않았다. 수정하기 귀찮아서 열리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고 평소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는 사서가 알아서 내게 책을 빌려주기 때문에 손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딱히 불편함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쓰고 있는 상태였는지라 <사탄 탱고>가 도서관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찜하지 못한 이유였다.
타관 대출도 모두 긴 줄을 선 상태다. 예약 대기가 길게는 5명까지 돼 있다. 이러다간 두세 달을 훌쩍 넘겨야 대출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없다. 사야 하나 망설이면서 어차피 대출이 길어 사야 할 상황이라면 책방으로 가고 싶었다. 인터넷 주문보다 지인의 작은 책방으로 가서 얼굴도 볼 겸 회포도 풀 겸 그러구러 책 한 권 사 들고 나왔다.
헝가리는 1989년 소프론 범 유럽피크닉사건으로 시작된 헝가리 민주화의 전환점을 맞는다. 헝가리 소프론에서 국경이 열리며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소련 몰락의 붕괴를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동유럽에도 민주화 열풍이 일었으며 또한 시장 경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공산권이 무너지는 그 무렵의 헝가리를 배경으로 소설은 쓰였다.
<사탄 탱고>는 긴 문장의 유려함은 있지만 다소 호흡이 길어 약간은 난해하다. 읽기가 어려운 난독은 아니나 잠깐씩 쉬어가며 읽어야 한다. 그렇지만 허물어져 가는 어느 농촌 마을의 장면 묘사는 압권이다. 마을 사람들이 술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 묘사부터 그 길에 어우러지는 자연의 풍경은 그야말로 목가적이다.
이 소설은 1985년 쓰인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기 전의 작품이기에 작가의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그래서 공산체제의 비판을 넘어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이 소설은 다가간다. 그러나 도무지 절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미줄처럼 그들의 운명은 얽혀 있다.
소설의 구조도 독특하다.
1부에서는 1장에서 6장까지 이어지다가 2부에서는 다시 1장까지 역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구조다. 마지막 2장과 1장은 이리미아시를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함께 마을을 지키며 사는 공동체 삶에서 구세주인 것처럼 허물어져 가는 마을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이리미아시. 공동체의 삶이지만 서로에게는 관심도 없다. 그러나 그도 결코 구세주는 아니다. 암울한 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그를 사람들은 그렇게 구세주라 믿고 싶어 하는 것뿐이다. 버려진 농장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 이는 이리미아시, 그가 희망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 줄 목자라 생각하고 있다.
사악한 인간 군상들의 실체는 이리미아시를 기다리는 술집에서 탱고를 추면서 나타난다. 장애인 소녀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오직 구원의 손길만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 탱고를 추다 스러진다. 이리미아시가 나타나 소녀의 죽음은 모두 그들의 책임임을 일깨워주며 자발적 성금을 시작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허망한 꿈을 심어주고는 달아나버린다. 이리미아시가 떠나고 결국 공동체는 흔들리며 허물어지고 만다.
사실 그들이 이리미아시를 믿은 건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이다.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들 스스로 믿어버렸던 것이다.
<사탄 탱고>는 제목이 주는 묘함도 있다. 사탄이 추는 탱고 정도로 여길 만하지만 리듬감이 있고 사뿐 거리며 즐거움 가득한 무도회를 연상해선 안 된다. 힘들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모두들 공동체를 떠나버린 상황에서 탱고는 무도회라기보다 끊임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장치다. 희망을 노래하지만 정작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긴 암흑의 터널을 빙빙 돌고 도는 혼돈의 연속이다. 결국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끝없는 몰락으로 향해 치닫는 스텝일 뿐이다.
그래서 처음도 끝도 허무하다.
절망 속에서 희망은 있다고 하지만 인간들은 왜 그 혼돈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진 못할까 반문하게 만든다.
고통의 악순환을 탱고처럼 스텝을 밟으며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찾아올까?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탱고는 허무와 암울과 싸우며 희망을 마주할 용기 있는 절망을 피해 가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절망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함께하는 연대가 어쩌면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 힘을 합치면 못 할 게 없다는, 함께 하면 된다고 하는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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