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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긁다가 팔 떨어지겠다

채칼이 없어서

by 어린왕자


쉬운 일은 없다

내 손으로 호박을 키우고

내 손으로 호박을 따고

내 손으로 호박을 가르면서

세상에 그저 되는 건 없다 했다

맞다

한여름을 이겨낸 호박의 노고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

노랗게 익어가는 길에 겪었을 풍파도

한번쯤 알아주어야 한다

무르다 하여 쉽게 따서 버린 호박도 있다

늦가을의 서리도 견디면서

푸르뎅뎅 호박은 담장 아래서 잘 견뎌냈다

누렁뎅이 호박으로 엄마는

호박죽을 끓이거나

호박 진액을 담아냈다


내가 첫아이를 낳고 엄마는

누런 호박을 들고 시장으로 갔다

즙을 짜내 나를 먹이기 위한 심산이었다

시장 한 바퀴를 돌고

짜낸 즙을 찾으러 간 그 가게에서

엄마는 통곡을 했더랬다

이 미친 것이 내 것은 놔두고

엄한 걸로 즙을 짰다고

이 도둑놈이 뭐 이런 짓을 하냐고


알고 보니 집에서 기르고 기른

좋은 국산이었던 당신 호박은 덩그러니 두고

썩어빠진 중국산 호박으로 즙을 짜

내 딸을 먹이라는 그런 미친 사기를 쳤다고.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절대 즙을 짜지 않으셨다

나도 그 일이 있은 후

절대로 그런 즙은 먹지 않았다

암만 봐도 출처를 모르겠고

사기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 후로 늙은 호박을 가지고

호박죽을 끓이셨다

엄마의 터전에서 농사지은 호박을 따

혹여나 얼었을까 배를 가르고 나니

멀쩡한 호박을 어찌할 수가 없어 속을 팠다

엄마가 하던 걸 옆에서 본 일이 전부인데

저걸 어찌해 먹나 고민하다

숟가락으로 박박 긁었다

많이 본 엄마의 살림법이다

시장에서 파는 건 국수가닥처럼 생겼던데

내 건 왜 이렇게 끊어지나 봤더니

채칼이 없어 숟가락으로 긁어낸 탓이다

팔이 아파 죽을 듯했다

그렇게 노고를 바쳐 긁어내

맛있는 호박전을 구워 먹을 때도

힘듦을 선사해야 했다

아직 누런 호박은 더 있다

박박 긁어내야 할 호박도 더 있다

먹어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박박 긁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힘들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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