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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함다행 Apr 24. 2023

역시, 난 망가졌나?

내 현실을 알게 된 날


남들은 신혼이 알콩달콩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망가진 내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는 시간 5시 20분. 난 정확하게 5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차린다. 그리고 아침 먹는 남편 앞에서 빵긋 빵긋 웃으며 맛있어? 묻기도 하고 이거 먹어봐라 저거 먹어봐라 챙기고 나서 남편이 출근하는 시간은 5시 50분.  그러고 나면 설거지 하고 안방에 들어오면 6시였다.  그리고 그 6시를 확인한 뒤에 난 기억이 끊어진다. 잠이 드는 것이다.  알람이 울려서 깨 보면 저녁 8시 30분. 하루 종일 잠을 잔 것이다. 14시간을 말이다.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도착하기 30분 전이다. 얼른 밀대로 청소를 한번 해놓고 야식거리를 준비한다. 남편이 9시 10분쯤 퇴근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가서 맞이했다. 남편이 씻고 나오는 동안 게임하며 먹을 야식거리를 대충 준비하고 나면 남편은 컴퓨터 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한 시간 정도 남편이랑 길드이야기도 하고, 공성전 이야기도 하면서 게임을 하다가 난 얼른 접속을 종료한다. 그리고 다시금 부엌으로 와서 내일 아침 먹을 국이나 반찬등을 준비해 놓는다. 자칫하면 자느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니까 얼른 깨어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12시쯤 되었다. 그러면 씻고 잘 준비를 한 뒤 12시 30분쯤 남편과 다시 잤다. 24시간 중 19시간을 잠에 빠져있고, 5시간 정도 깨어있는 삶이 나의 신혼 삶이었다.  가끔 무서웠다. 이상한 것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몸이 아플때 왠지 큰 병일 것이 걱정되면 병원을 오히려 못 가듯, 나 역시도 자세히 들여다 볼 생각을 일부러 미뤘다. 


 남편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 멀쩡해 보였으니까.  어쩌면 난 스스로 비 정상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스스로 늘 멀쩡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욕먹을까 봐 무서웠다. 남편이 나가면 잠들어서 남편 오기 30분 전에 일어나서 미친 듯 집안일을 하는 나.. 너무너무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남편이 집에 있을 때에는 정말 일주일 내내 해야 할 모든 것들을 다 했다. 밑반찬 만들고, 빨래도 해놓고, 이불빨래도 하고 가끔 데이트도 나가고. 주말을 최선을 다해 깨어있으면서 멀쩡한 주부인 척을 하고 나면 주중에는 또 19시간을 잤다. 잠을 줄여보려고 드라마도 보고 온갖 것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혼하자마자 엄청 빠져들었던 미드들도 재미가 없었다. 그저 잠이 왔었다. 그렇게 일 년의 사라졌다.


정확하게 1년 반 뒤, 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알아야 할 때였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궁금했다. 커피를 물보다 더 많이 들이켜면서 잠에서 깨어 있으려고 일부러 움직이다가 궁금증에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했다. '잠을 하루종일 자는 이유'라는 검색어를 치고 나니 쫘악 뜨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갑자기 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우울증의 증상, 불면증, 아니면 과도한 수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울증? 과도한 수면? 이거 나 아닌가?  두려운 마음은 클릭이 잘 안 될 만큼 떨리는 손에서 드러났지만, 애써 외면한 채 얼른 클릭해서 들어가 보았다. 그 페이지는 하필 누군가 블로그에 적어놓은 글도 아니었고, 저명한 정신과 교수의 칼럼이었다. 그 기사를 쭉쭉 읽어내리다 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 우울증의 증상에는 불면증만 있는 게 아닙니다. 과도한 수면 역시 우울증의 증상인데 이때의 특징은 잠을 자도 또 잠이 끝없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의식 중에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수면 위에 둥둥 떠오른 그 생각은 마치 내셔널 지오그라피에서 봤던 죽은 고래의 시체같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고래처럼 도저히 외면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부패한 고래의 사체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폭발을 염려해야 하듯, 그 생각은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부푼 그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펑! 하고 터지면서 내 심장과 머릿속에 꽂혔다.


넌 역시 망가졌구나? 넌 역시 비정상이야.
망가진 넌 고칠 수 없어. 들키지 마. 네가 망가진 것을!
버림받기 싫다면 들키지 마!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화살을 꽂아 넣듯 생각을 꽂아 넣은 듯했다. '넌 망가졌어. 넌 정상이 아니야. 넌 들키면 안 돼. 넌 멀쩡한 척해야 해. 아니면 넌 버림받을 거야.' 누군가가 내 귓가에서 무한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를 어두운 목소리가 짓누르기 시작했다. 웃긴 건 내 삶에서 가장 관심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심리학이었기 때문에, 난 우울증이 극복할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우울증은 내가 망가졌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너무 절망스럽고 너무 외로웠다. 마치 난 지구라는 행성에 떨어진 외계 휴머노이드 같았다. 다른 존재들은 진짜 피가 흐르고 따뜻한 생명체들인데, 나는 생명체인척 하는 로봇이었다. 멀쩡하기라도 하면 쓸모라도 있으니 괜찮은데, 어딘가 고장이 나서 부품도 없고 고칠 방법도 모르는 로봇. 그게 나였다. 모두 다 사람인데, 생명체인데, 나만 로봇인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쓸모없는 고장 난 로봇인걸 들키면 진짜 버림받을 것 같았다. 고장 났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었다. 적어도 휴머노이드인 건, 로봇인 건, 나름 쓸모라도 있지 않은가? 험한 일이라도 시키고, 뭔가 쓸모가 있으니까 고장 난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멀쩡한 척은 점점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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