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즈너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확신이 드는 순간이 언제일까.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고 나면 10분 뒤엔 무조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긴다. 그 믿음을 포기하게 되는 순간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찾을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가서 찾아보고,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돌아가 본 이후에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의 두 가족들에게도 어린 딸의 실종 사건은 그렇게 다가왔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어린 딸들이 저 문을 열고 코를 훌쩍이면서 '돌아왔다'는 말을 할 것처럼 같았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아무 소식도 없었다. 시간은 불안을 부추기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써 해야 한다 믿는 일을 실행한다.
켈러 도버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사슴을 사냥할 때에도, 총을 쏘는 아들 옆에서 주기도문을 외워주는 그런 아버지였다. 그 모습은 마치 아들의 행동을 본인이 책임지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정하다기보다는 엄한 편이었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던 완고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이 하나의 틀로 정형화된 그런 아버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가족들이 슬픔에 겨워 지쳐 쓰러져 있을 때에도 그는 움직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작정 슬퍼하거나,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서 그는 행동했다. 그 원동력은 '분노'였던 것 같다.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에서 터져 나온 분노, 대비할 수 없었던 재난에 대한 당혹감이 그를 일으켰다. 어떤 일이든 확고한 대답을 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연한 재앙은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딸아이의 유괴를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었을까. 언제나 자신이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생각은 일말의 단서도 없는 실종에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죄는 '짓는다'라고 표현한다. 재료를 들여 밥을 만들고 옷을 만들고 집을 만드는 것처럼 지어 만들어낸다. 글을 쓰는 것처럼 죄는 짓는다고 말을 한다. 죄는 만들어지는 일이다. 죄는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해왔다. 인간은 공동체에서 공생하고, 여기서 죄가 탄생했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죄지을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해서 이에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는 없다. 죄는 사회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면서 만들어진다. 직접적으로 '죄수'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죄'의 기준을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만들면서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으니까. 똑같이 죄의 구덩이에 한쪽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이 영화 속 사람들의 이야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죄의 기준을 어느 부분에 두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켈러 도버는 딸을 찾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희망을 걸어볼 일말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행동에 제약을 걸 이유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서 '내가 그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쉽사리 나는 저렇게 할 것이다 혹은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단언하기 어려웠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죄와 죄의식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죄인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죄인에 해당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목적을 위해서 정당화되었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이 경우는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어찌 보면 진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숱하게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몇 번씩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만드는 문제들이지만 나는 여전히 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사슴 사냥 이후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켈러 도버의 아들은 '햄버거를 먹을 때에도 죄책감을 느끼느냐'는 말을 해준다. 덧붙여 사슴 개체는 조절이 안 될 정도로 많으니 줄여줄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다. 사슴의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말이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조율되지 않은 환경이 훨씬 더 큰 문제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죄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이렇지 않을까 싶다. 감정적인 이해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충돌하는 부분에서 발생하는 죄의 대가는 어떤 형태로 치러져야 할까.
배경 음악도 없고 등장 인물도 없지만 미끄러지듯이 외부에서 집을 클로즈업하는 액션 하나로 감독은 예기치 못한 불안을 자아내고 그 불안을 통해 긴장을 만들어낸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조바심을 공백을 통해 표현한다. 의심과 혼란 속에서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을 꾸며낸다. 범인을 추적할 때의 긴장감이나 주제 의식 모두 넘치지 않는 선에서 보여주는 점이 좋았다. 배경 음악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와 화면만 보였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실제로 저 옆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모두 생생했다.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나 어찌할 줄 모르고 해메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모습이나 다름 없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프리즈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