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기준

영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

by wanderer
정체성, 적, 정치적.


정체성은 확실한 색깔과 확실한 노선을 의미한다. 누구와도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 색이 있을 리가 없다. 적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역으로 나를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를 색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확실하게 표현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색깔을 알게 된 건 에니어그램을 배운 이후였다. 무색 인간에게 비로소 ‘색깔’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그래, 어쩐지 회색분자라는 말이 정겹게 들리더라니.

극단과 극단 사이의 중간 지점. 뭐든 명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그동안 성격 검사를 하면서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기준점이 내 것에 있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갈등이나 다툼 속에서 중간의 위치에만 있으려 했다. 정치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성격을 가져서 그런지, 정치 다큐멘터리는 참 신기하다. 삶의 성장 배경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들의 신념은 무엇보다 확고했다. 변할 수 없었고 변해서도 안 되는 문제다.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전부였다. 나는 필요에 따라서 주장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치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그런 말은 용납되지 않았다.

윌리엄 버클리(왼쪽)와 고어 비달(오른쪽)

경쟁에서 밀리는 방송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자극적인 소재 선정이다. 어떤 형태로 밀리든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지는 싸움이 되어버린다면 애초에 경쟁 구도 안에 들 수 없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인기는 당연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다. 선정적인 이미지, 폭력적인 내용들, 그리고 TV 토론. 잘 나가는 방송사 CBS와 NBC에 밀린 ABC 방송사는 흥미로운 방송 기획을 내놓는다.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두 논객을 모셔다가 토론을 붙였다. 칭찬받을만한 방송 구성까지는 아니었다. 정책토론회야 뭐 죄다 비슷비슷하지 않던가. 그중 빛이 났던 것은 두 사람의 '말발'이었다.


윌리엄 버클리는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합리와 이성으로 본인을 설명했다. 법과 질서,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를 표현하려고 했다. 보수적 지식인, 우익이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는 환경.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그려진다. 도덕적인 삶과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셔널 리뷰’라고 하는 잡지의 편집장을 하면서 그는 보수의 움직임을 조직했다. 행동을 통해 신념이 뻗쳐 나오는 사람,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고어 비달은 윌리엄 버클리가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인습과 전통을 부수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타락으로 유혹하는 사람.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아주 전형적인 ‘진보주의자’인 셈이었다. 무엇을 하길래,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작가였다. 소설가이자, 극작가, 정치인이었다. 윌리엄 버클리가 고어 비달과의 토론을 수락한 이유는 전적으로 그의 신념이었다. 도덕적인 올바름, 정당성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본인의 지식과 생각들로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토론을 승낙했다. 윌리엄 버클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어 비달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는 끊임없이 윌리엄 버클리의 역린을 파고들었다. 그의 위선과 가식을 지적하며, 끊임없이 공격했다. 위대한 토론가와 위대한 달변가의 싸움은 요즘 시대의 것과는 달랐다. 그들의 토론은 유혈이 낭자한 결투였다. 침착하게 서로를 뜯었다. '이렇게 평온하게 저런 험한 말을 할 수 있다니'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우아함을 갖추고 있었다. 어휘나, 어조에서 오는 느낌이었을까? 강한 말을 부드럽게 하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TV 화면에 갇혀서 같은 컷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는 유쾌함이었을까? 다큐멘터리는 친절하게 두 사람과 당시 배경들을 설명하고 있었기에,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 많았음에도 훨씬 친숙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극과 극의 엘리트. 둘은 서로를 극렬하게 싫어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좋아했다. 인기가 있었다.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본인의 주장을 굽히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견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라이벌이라는 구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싸움이 될 만한 적을 둔 상대방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라이벌의 기준을 만드는 것, 자신에 맞는 적을 지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대단한 자신이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일이다. 시대의 기준이자, 정신이었던 두 사람의 모습은 내게 은근한 자극이 되었다. 두 사람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상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는 생각. 토론을 준비하면서, 본인의 논리구조를 점검하면서 상대의 의견을 논파하는 과정 중에 서로가 닮아있음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굳이 적을 둘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적을 두는 일이 귀찮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듣지도 않으면서, 대답을 바라는 상대를 설득해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홀로 본인의 생각만을 적어나가는 일에 비하면 두 배는 괴롭다. 여하튼 귀찮은 일이다. 그런데 피하려 애를 써도 살다 보면 어디선가는 이런 상황에 끼인다. 입장표명을 미루는 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 순간. 극단에 극단으로 몰려 왼쪽 아니면 오른쪽의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 용기 있게 '가운데'를 외치기 위해서는 생각의 이유를 충분히 쌓아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훨씬 더 귀찮아진다. 피하는 일보다 괴로운 일은 피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후퇴는 언제나 '작전'을 이유로 들어야 한다. '작전상 후퇴', 언젠가 적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도망.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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