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의대생의 죽음'
인도 최고의 지성들만 모여있다는 '전 인도 의학연구소'. 그저 들어가는 것도 벅차 그저 소망의 영역으로 그리는 공간. 다큐멘터리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0.1%'안에 드는 사람이 되어 '의사'가 된 이들은 어떤 것을 꿈꾸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학생들의 인터뷰, 열기와 습도, 희뿌연 담배연기, 자해 '현상', 이것들은 무엇인가. 답을 듣고자 감독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독특한 부분이 있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공부하는지 보여주는 대신에 겉돌고 방황하는 학생들의 모습만 그려낸다. 갓 스무 살을 넘겨 대학에 온 학생들, 이곳에서 몇 년을 버텨낸 학생들, 끝끝내 목을 매어 탈출하는 학생들, 이 사람들의 눈에는 저마다의 결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서 기분 나쁜 기시감을 느꼈다. 이 학생들에게서 낯설지 않은 폭력들과 낯설지 않은 고민들을 보았다. 학교와 학생의 대립,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 그 흔적 하나하나에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목표를 잃어버린 학생들의 역사가 저들이나 우리나 서로 별 차이 없는 탓일까. 공부의 양으로만 비교해본다면 저들과 견줘볼 수 없겠지만 렌즈 너머로 지켜보는 입장에서 저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여느 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노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은 무거운 한숨 끝에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가문의 자랑', '마을의 경사', '자랑스러운 00 학교 출신'처럼 집단이 길러낸 '무언가'가 된다. 개인의 노력과 개인의 성공은 어느 순간 이런 형태로 변질되어 '한'처럼 변한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 되면 개인은 집단에 반하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고, 결국에 그 고민과 고통들은 스스로에게 화풀이를 하는 형식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자신이 세운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기대치를 낮추거나 하겠지만 타인이 세운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할 수 있는 반응은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는 맞서 싸운다 그리고 누군가는 도망간다. 행동과 결과는 제각기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그들이 속해있는 환경에 의문을 가졌다. 공간이 유지되고 있는 환경, 제도와 구조가 정당한지 되물었다. 하지만, 총장의 대답은 구조에 대한 일말의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과도한 성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에 자살한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현재 학생이라는 신분의 끝자락에 서있지만, 여태까지 학생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대로 공부만 하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지식의 습득'이 학생의 유일한 목적이라 여겼던 것이다. '공부를 해왔다'는 착각. 아주 당연하게 나는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면, 공부할 환경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고민을 했어야 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 가장 '해봤어야 하는' 고민을 이제 와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돌이켜보면 그 고민 또한 '공부'의 틀 안에 포함되는 일이었다. 여태껏 '교육'이라는 틀 아래에서 주체는 교사이고, 객체는 학생이고, 매개체는 지식이었다. 이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봤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덜 비겁한 덜 부끄러운 학생이지 않았을까. 좀 더 당당하게 '학생'이라 선언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교육의 틀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주체와 객체가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슬그머니 그 자리가 역전해가는 과정 중에 현재 사회가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학생주도'의 학습을 부르짖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적으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 이전에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을 위하는 공간이었을까? 감시와 처벌은 아주 영악하게 변모했다. 학교는 학생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게끔 만들고, '성공'이라는 기준을 던져주었다. 목표를 상실한 학생들은 표류하다 좌초했고, 끝까지 버텨 이곳을 떠나간 학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파편처럼 흩뿌려진 정보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방향성을 띄게 된다면, 반드시 그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한다. '개인적인 문제'로 모든 문제의 발생원인을 돌린다면 사회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사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이들은 꼭 사건 사고에 대한 변명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환원한다. 그처럼 편리한 변명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대통령에게 학위를 받고 졸업했고, 누군가는 졸업식에 가기를 거부했고, 누군가는 인턴이 되었고, 누군가는 의학공부를 중단했다. 죽을 만큼의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정작 그 고난을 겪어본 사람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실패했다. 만일 누군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의 순간을 지나왔다면,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이해하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 될 뿐이다.
166일 차, 스무 살의 아닐 미나가 자살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는 학업 부담감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2년을 연속으로 낙제하게 되면서 학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네 번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어느 의대생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