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루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언론인은 '숭고한' 직업이라기보다는 비난과 멸시, 조롱의 대상으로 매체에 등장하는 것 같다. 최근 영화에 등장하는 언론인의 모습은 흔한 말로 '기레기'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들은 아니었으니, 조연의 위치에서 그들의 역할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직업의 '이미지'를 두고 생각해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이들에게 그런 역할이 부여된 이유를 찾아본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뉴스를 두고 장사를 한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남은 고기를 주워 먹는 하이에나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권력의 부스러기를 주워서 그들의 신세를 연명할 뿐이다. 대의는 실종되었고 명분은, 그들이 찾지 않았다. 시선이, 변한 것이다.
방송과 언론, 미디어를 다루는 영화는 다양하게 만들어졌지만 대개 '진실'을 다룬다는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장르를 불문하고, 이 공간을 통해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그 '진실'이라는 축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있다. 이 패턴은 변하지 않는다. 소재만 약간씩 변주될 뿐, 영화의 기본적인 틀 자체는 일정하게 흘러간다. 과거에는 그들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에 집중해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단지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보다는 이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초점을 맞춘 영화들이 더 많이 보인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스포트라이트'의 경우도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집중하는 영화였고, 이 영화 '트루스' 또한 그런 형태의 영화였다.
메리 메이프스와 그녀의 '60분' 팀은 '대통령이 군 복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고, 복무 과정 중에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시한다. 의혹은 특종이 되고, 기록적인 질문이 된다. 이 이야기는 여느 다른 영화들과 다를 것 없는 이야기다. 독종 PD와 연륜 있는 앵커, 그리고 팀원들. 영화는 클래식한 인물 구성을 비롯해서 집요한 탐사의 과정과 고민들도 흡사하다. 사이즈 큰 사건을 물었고, 사건의 결함을 발견하고, 다시 그것을 반박하는 형태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평범한 영화처럼 설명했지만, 이 영화는 특별하다. '사람들이 믿는 대로 보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몸싸움은 없었지만, 의견과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서 발생하는 '진실'에 대한 언쟁은 살벌했다. 그 흐름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언쟁은 진실에 대한 공방이 아닌 그것을 밝혀내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진흙탕 싸움이었다. 사건은 정치적 이슈와 연결되며, 민감하게 사람들을 자극했다. 난장판이 되면서, 진실에 대한 의혹은 뉴스 제작자의 의혹이나 제보자의 의혹으로 번져나갔다. 과정의 부실함을 근거로 사람들은 이 뉴스의 '의혹'을 깡그리 뭉개버렸다. 위조 가능한 활자체라서,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표기법이라서, 제보자를 신뢰할 수 없어서, 뉴스 제작자의 정치적 신념이 문제가 되어서 의혹은 묻혀버렸다. 몇 번씩 자세하게 확인한 사안이라도, 누군가 문제를 제기한 이상 그에 대한 해답은 해야 했다. 때문에, 팀원들이 이를 해명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은 시청자들이 사건의 주제를 놓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껄끄러운 진실'이라는 것은 결국에 누가 얼마만큼 시선을 돌리느냐 하는 문제로 끝나게 되어 있으니까. 앞에서 했던 설명에서도 읽어낼 수 있겠지만, 영화는 뉴스 제작의 찬란했던 순간들을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무력한 순간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케이트 블란쳇은 영화 '베로니카 게린'에 이어서 이 작품에서도 단단한 신념을 가진 언론인으로 등장한다. 지난 영화에서는 기자였고, 이번에는 PD 역할을 했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모습이다. 영화에서 그녀와 호흡을 맞춘 앵커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했다. 그가 '업 클로즈 앤 퍼스널'에서 PD 역할을 했던지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얼굴에 얹어진 세월의 무게만큼 여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자연스럽게 세월에 따라서 '신뢰'의 무게가 캐릭터에 덧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닌 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딸'의 관계처럼 느껴지는 두 사람의 연기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정신'만은 동일했다. 영화의 제목처럼, '진실'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동일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언론일을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질문이 껄끄럽다 하여, 질문하는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다음부터 질문하는 사람이 등장하겠는가.
질문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을, 그것을 무시하고 편향적이라 비난하면서 만들어내는 이 쉽지 않은 '환경'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뉴스를 덮기 위한 뉴스로, 개개인의 결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추악한 환경을 고발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회사는 질문하는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머로가 전설적인 보도를 했던 회사인 그 'CBS'가.
이 일이 마냥 그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방송 관계자가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정치적 신념에 좌우되어, 뉴스의 본질 자체를 잊어버리는 현상은 희귀한 해외 사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언론인은 가장 유능해 보이는 직업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가장 무력한 직업이기도 하다. 이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이 들어줄 때 힘이 생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진실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지만, 보도는 방송국의 이권 문제로 전락한 지 오래다. 광고가 붙지 않기 때문에 뉴스의 역할은 작아지고, 작아진 상황 안에서는 오직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방송된다. 공포를 자극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이야기들, 잔혹한 이야기들이 인기리에 팔려나간다. 물론, 방송국이 처음부터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잃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수십 년간 쌓아왔던 '신뢰'의 발판은, 어느 순간 그들의 위치에 도취되어 있던 사람들이 던져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이름값'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매체가 남아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보도에 대해 보도하는 일'이 편해진 시대가 되었다. 고생스럽게 새로운 사건을 캐올 필요 없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낸 사건에 대해 같이 떠들면 되는 시대가 되었다.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다.
질문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도 두렵지만, 질문이 생기지 않는 사회도 또한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courage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트루스', '스포트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