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한때' 나도 저 무리에 끼어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시한폭탄 위에 앉아서 공부하던 것 같은 기분은 졸업과 동시에 날려버렸고, 흑역사는 흑역사대로 묻어두었다. 안온한 환경 속에서 잊히던 그 옛날의 기억들과 피로감은 이런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차츰 살아난다. 계급과 투쟁, 그 안에서 확고한 것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뼈저린 인식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지독한 이야기들임에는 틀림없다. 유해하고, 강렬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서로 다른 특징들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유형의 고등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왔던 곳은 그랬다. 분노가 내면에 가득했고, 제각기 다른 형태로 그걸 풀어갔다.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노는 그곳에서 그저 억눌려 유예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잘 관리된 분노는 절제된 폭력과 비 물리적인 형태의 폭력으로 표출된다. 그런 이유로 그곳에서 애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비록 같은 교복에 같은 머리를 하고서도 애들은 저마다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학생은 판에 찍어내듯 반듯한 모범생으로 세상에 등장해야 했다. 근 10년 전의 고등학교는 그런 모습이었다. 저마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분투한다는 것은 집단의 성질과 개인의 정체성을 동시에 고민한다는 의미다. 세계의 충돌 속에서 이제 겨우 고등학생을 버텨내는 학생들이 그 파장을 견디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다만, 부서질 각오로 현실에 부딪히는 학생들은 전부 저마다의 결의를 지니고 있었다. 결의의 이유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별 볼 일 없는 동아리 활동이어도, 지독한 따돌림이어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버티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끊임없이 학교에 부딪혔다.
학생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 중 하나는 가장 내밀한 그들의 민낯을 다루는 작품들이 '연령 제한' 때문에 당사자인 학생들이 그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 '디태치먼트'나 '파수꾼', 혹은 이 드라마처럼 학생을 다룬 이야기는 정작 그 당사자들을 관람의 장으로 데려오지 못한다. 물론, 나이 제한이 자라나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막아 세우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장벽들이 있어도, 결국 볼 사람들은 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연령 제한의 의의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지 나이가 어려서, 학생들은 본인들의 이야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이야기를 볼 수가 없다. 학생들은 학교의 이야기에서 그렇게 적출당한다. 유해함을 빌미로 당사자들을 몰아낸 콘텐츠는 '19금'이라는 딱지 덕분에 자유롭지만, 동시에 주체를 잃었기에 공허하다.
이 이야기 '루머의 루머의 루머' 또한 연령 제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돌림, 마약 문제, 우울증처럼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마주 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지만, 그만큼 내밀하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지독해서 한 호흡에 몰아서 시청하기 어려웠던 면도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꼽아보라면 어떤 하나의 틀로 인식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살거나, 유학은커녕 다녀와 본 적도 없는 내게 있어서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수월한 방식은 영화와 드라마 같은 매체를 통한 접근이었다. 어렸을 때에는 만화를 자라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저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를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깊은 흥미가 생겼다. 특히 고등학교라는 사회에 대한 접근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빨간색 플라스틱 컵을 들고 다니는 파티나, 운동부와 치어리더, 오타쿠, 모범생들처럼 그들이 묘사하는 고등학교 사회는 일정한 틀이 있었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보던 그 안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분위기만 어슴푸레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드라마는 그런 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캐릭터들은 설령 꼴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두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만 만들어내고 들을 뿐이다. 그렇게 소문에 이야기가 더해진다.
학교 안의 폭력은 수직으로 전달되는 폭력뿐만 아니라 수평의 환경이 빚어내는 폭력 또한 존재한다. 수직으로 전달되는 것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온라인 상에서 발생하는 따돌림이 등장하면서, 폭력은 더욱더 은밀해졌다. 가뜩이나 아무에게도 알려줄 수 없던 고민들이, SNS와 함께 더욱더 심해졌다. 광장을 피해 밀실로 숨었는데, 밀실인 줄 알았던 공간은 어느새 광장이 되어 있었다. 광장 속에서 사람들은 무대로 내몰린다. 광장으로 내몰린 학생에게 피난처가 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누구도 그들을 보호해줄 수 없었다. 섣부른 접근이 환경과 관계에 예민한 이들을 굴 속으로 파고들게 만들었다.
당장에 무거운 짐이 어깨 위에 올라가 있을 때에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통과 의례처럼 짐을 이고 건너가야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당장에 내 짐의 무게가 어떤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그동안은 나조차도 겪어봤으니까 '그것만 지나면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학생들을 바라봤던 것 같다. 고통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그렇게 나오질 않았으니 내 고통에 대한 투덜거림 또한 똑같은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었다.
드라마는 정답을 상상하면서 볼 수 없게끔 만든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진실 아닌 소문들밖에 없었다. 단지 이를 보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워하고, 각자의 고민을 지켜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판단을 보류하는 것도 성격대로 따라간 것일 테지만, 드라마를 보는 나의 반응은 그저 지켜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파수꾼', '캐서린 랭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