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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조직의 생리는 본능의 영역에 맞닿아 있다. 위계와 질서 속에서 욕망은 꿈틀댄다. 이제는 개인의 것이지만 과거에 그것은 가족과 집단의 것이었다. 세를 늘리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신뢰에는 피가 필요했다. 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라면 '가족'의 범주가 아닌 위치에서 신뢰는 불가능했다. 이 드라마는 범죄 조직을 다뤘던 여타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족의 전제는 절대적인 믿음이다. 극을 보면서 '굳이' 저렇게까지 가족을 중심으로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폭력은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혈연을 통한 조직은 견고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경계는 안팎으로 단단하다.
피키 블라인더스는 쉘비 가문의 이야기다. 토마스 쉘비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들이 사업을 키워나가는 과정 전부를 담아내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극을 썼던 담당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가족 무용담'이지만 이야기의 범주는 가족의 것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시대와 호흡하면서 수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낸다. 전쟁 이후에 잔인해졌던 남자들, 집시들, 경마 산업들을 통해 시대의 공기를 읽어낸다. 여타 갱스터 영화들도 그런 부분이 충분히 있지만 유독 이 드라마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러닝타임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히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공들인 화면들과 음악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들 속에서 뛰놀았다.
아서 쉘비2.
캐릭터 별로 매력적인 부분이 전부 다르다는 것 또한 극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을 많이 줬던 것 같다. 특히나 인물들 개개인의 '약점'을 중심으로 설명한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개개의 캐릭터마다 가지고 있는 약점들 때문에 인물들은 보다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거칠고 직선적인 성격의 아서 쉘비는 조직에서 행동대장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동생인 토마스가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있어서 깊은 내면 속에 갈등을 갖고 있지만 항상 그의 말을 따른다. 아버지와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아서는 심적으로 가족 중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모습을 내비쳤다. 장남이고 오로지 거친 면모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그가 내적인 문제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당시 남자들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군 복무 경험'은 사람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토마스 쉘비는 비록 범죄 조직을 운영하고 있을지언정 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았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뛰어난 두뇌를 활용해서 문제가 발생해도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일에 어려움이 없는 인물이다. 차가운 성격에 냉정한 판단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가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은 또 굉장히 가족적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나쁜 놈이긴 하지만 '우리' 나쁜 놈이었다. 약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사람도 한편으로는 큰 약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여느 참전 병사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PTSD로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 낮에는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지만 홀로 남는 밤이면 그는 악몽과 사투를 벌이면서 내면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댄다.
폴리아나 쉘비는 쉘비 가문의 남자들이 전부 참전했을 때, 사업을 지켜냈다. 냉정한 토마스 쉘비의 모습과는 별개의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다. 예리한 촉을 가지고 있고, 토마스 쉘비도 그녀 앞에서는 순순히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줄 정도다. 그녀에게 약점은 가족이다. 본인의 자식들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피키 블라인더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풀어가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캐릭터의 약점을 부각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갱스터 영화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성격으로 오로지 폭력적인 인물과, 냉정한 모습만 보여주는 인물로 양분되어 극을 끌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성 역할 또한 고착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아니다. 마냥 수동적인 태도로 있을 수 없던 시대였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이 드라마는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풀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로 독특한 캐릭터들을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다. 모든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본인의 활로를 찾아 움직인다. 약점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절박해진다. 절박해진 사람들은 그들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냉정해지기 어렵다. 끊임없이 고통받고, 고민하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이 드라마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폴리아나 쉘비와 체스터 캠밸3.
OST로 나왔던 'Red Right Hand' 노래를 포함해서, 음악이나 화면 연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말에게 주술을 거는 시즌 1의 1편 오프닝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앞서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 부분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시리즈를 훑어보니 음악하고 전반적인 스타일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드라마 시즌 전체를 완주하고 나면 머릿속에 그 음악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음악과 함께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도 독특했다. 따로 제작자 인터뷰 영상을 찾아봤는데 의상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의상팀은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서 사람들의 복장이 어떠할 것인가 하고 유추하고 사료들을 참고하면서 상상을 더 발전시켜 나갔다. 종전 이후, 가난했던 사람들의 옷차림은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궁핍했지만 범죄 조직은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시대적인 배경들이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람들의 의상을 만들었고, 스타일을 만들었다. 시대의 스타일은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유 없는 변화는 없었다. 사람들이 전과 다름없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군 입대 경력을 빌미로 압박할 수 있었던 내막은 시대적인 배경이 '1차 세계 대전 직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당위성을 심어주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배경이 뒷받침되어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모르고 본다 한들, 재미가 없는 시리즈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이 이야기들은 더욱 풍부해진다.
(검색창에 '시대극'이라고 쳐보면, 곧장 '영국 드라마'가 연관 검색어로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상류층의 것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현대에도 여전히 계급의식이 남아있는 공간이니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런 부분을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되고 찾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었다. 다만, 문제는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피와 싸움, 고함과 난투.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괴로워한다. 전쟁통에 정부도 믿지 못하고 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몸속에 흐르는 '핏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밖에 없었다. 믿기 시작한 이상, 후퇴나 무르기는 없다. 오직 앞으로만 직진한다. 그 끝이 무엇이든 간에.
사진 출처: BBC Two Peaky Blin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