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 속

영화 '위로공단'

by wanderer

조명이 꺼진 곳에 조명을 비추고, 끊어진 시간을 이어 붙여 순간을 만들어가는 일. 이 다큐멘터리의 힘을 표현하자면 그랬다. 문자로 되어있는 텍스트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상상은 물렁하다. 그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한다. 문자와 영상의 차이렇다고 생각한다. 문자로 볼 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감상이, 눈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폭력은 발견된다. 시대에 따라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폭력이 규정된다. 어떤 윤리와 규범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폭력의 의미는 달라진다. 기준 자체에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기준은 꾸준히 변화해 왔으니까.


다큐멘터리는 폭력을 발견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장치다. 다큐멘터리는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보여준다. 어떤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소개할 것이냐 하는 이야기다. 영상은 상상의 기회를 앗아가지만, 앗아간 공간만큼 감각하게 만든다. 예민하게 확장된 감각은 상상 대신 사유로 이어진다. 화면 속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행동을 생각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절규를 새긴다. 여기에 시간을 좀 더 들인다. 이제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표정이라 단정 짓기 무척 어려운 표정을 사람들은 짓고 있다. 시간의 더께는 삭은 분노의 감정을 다른 형태로 보이게 만든다.


불편하다. 기괴한 음향과 괴기스러운 이미지를 마주하는 일은. 정돈되지 않은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감각을 헤집는다. 불편함의 감정은 상황을 재고하게 만든다. 마음이 편하지 않기에,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어떤 모양으로 저들의 얼굴과 저들의 진심이 기록되는가. 어떤 이미지와 소리로 기억되는가. 공포스러운 소리와 이미지가 계속 귀와 눈을 때린다.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삶. 싸우면 싸울수록 그 삶이 익숙해진다. 아이러니하지만 익숙해지면 삶이 된다. 의문은 쉽게 넘겨지지 않는다. 불편함은 상황의 올바름을 가늠해 보게 한다. 어느 환경에 놓여있든 사람들은 동일한 경험을 공유했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가치는 다른가? 신성한 가치로써 바라보는 노동의 의미와 실제 노동자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두 단어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노동자 동상의 위치와 노동자의 거리는 너무도 멀지 않던가. 그러면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불편함의 감정은 당연하다. 불편함을 야기하는 장치들 속에서 편안하게 이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기는 힘든 일이다. 불편함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기에, 그 감정의 이유를 찾아 정리한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개개인들의 생각은 단단해진다. 정리된 이야기들 속에 남는 전언은 하나다. 노동자의 의미는 '노동'이라는 단어에 포함이 될 수 있는가?


고귀한 가치, 노동이라는 말 안에 사람들의 몫은 없었다. 오직 개미처럼 일만 하게 만드는, 부지런히 일만 하라는 의미에서 노동자 대신 근로자가 쓰인 것도 그 맥락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이라는 말로 위로받을 수 없었다. 단지 일의 부속품처럼 쓰일 뿐,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얻을 수 없었다. 부지런함은 덕목 대신 규율이 되었다. 사람들은 규율 속에서 규칙 밖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일말의 여유도 허용될 틈이 없는 공장 속 기계들로 비쳤다.


나는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질 못한다. 일말의 부담이라도 있다면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뭐든 해야 한다. 시간으로 갚거나, 돈으로 갚거나, 어떻게든 해소해야 속이 편하다. 남이 나에게 지는 빚보다 내가 빚지는 게 더 싫다. 가끔 보면 몇몇 단어에 크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노동이라는 단어나, 노동자라는 단어도 그렇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항상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게으르다는 걸 안다. 너무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로 그 공간을 메워도 빚을 갚아간다는 느낌을 받질 못한다. 성실한 저 이름들 속에, 사람들의 슬픔 속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척 쓰다.

우리는 우리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도 몇 번씩 입 안에서 반복해서 굴려보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이 다큐멘터리가 빚어내는 이야기를 우리는 조금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날카로운 사유로 벼려냈던 시간을 물렁한 상상으로 풀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명징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서는 사유와 상상이 만나야 한다. 지독한 현실은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소중하게 여기자는 말을 쉽게 내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환한 빛의 밝기만큼이나 커져버린 그림자를 이제는 외면할 수는 없다. 현재의 시간을 선물해준 이들에게, 다시 현실의 삶을 돌려줘야 한다. 살아남는 일이 목적이 되는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위로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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