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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2. 2023

보육 외주 시스템 이용자

가정보육과 공동육아, 발도르프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책을 참 많이도 읽었다. 그중 <어린이집이 엄마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50가지 진실>이란 책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난 어린이집을 불신하는 편이었는데, 이 책은 그런 내 마음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아이는 절대로!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을 거야!"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은 후에는 그게 더 당연하게 느껴졌다. 평소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내 자식은 더 예쁘고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고, 아이한테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다독이며 아이를 끌어안았지만, 아이가 둘이 되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매 순간순간이 도전의 연속이었다.





가정보육의 실패


대체로 가정보육을 하던 사람들도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첫째를 입소시키곤 한다. 하지만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둘째가 태어난 후에도 자연스럽게 가정보육을 이어갔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하나였을 때, 아니 둘이 되었을 때도 매일 산책을 했다. 첫째 아이는 유모차를 태우면 울어서 항상 안고 다녔다. 걷기 시작할 무렵에도 조금 걷다가 안고, 조금 걷다가 또 안으며 산책을 다녔다. 둘째는 그나마 유모차를 아주 가끔 타는 편이었다. 덕분에 유모차를 끌고, 첫째는 자전거를 탄 채 2~3시간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산책은 거의 집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집에서는 매일 다른 활동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아이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고 싶었고, 그게 좋은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원하는 건 제한 없이 다 해보라고 두기도 해서, 집안 곳곳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여기저기 그 흔적들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땐 그게 좋은 줄 알았다. 


아이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는 건 오히려 아이를 산만하게 만들었고, 쉴 줄 모르는 아이로 자라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어야 했다. 항상 자극에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각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첫째 아이는 기질이 예민하기도 하지만, 그걸 더 예민하게 만든 것이 나였던 것 같다. 감각이 쉬질 못하니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변하겠는가! 


요즘은 그걸 조금씩 개선하는 중이다. 여전히 쉬지 않고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만, 종종 힘들다며 가만히 있을 때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8세가 되어서야 '힘듦'을 알게 된 첫째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첫 어린이집에 보내고


"어린이집은 엄마가 힘들 때 보내는 것이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봤고, 남편의 설득으로 어린이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가 살던 곳에는 나름 괜찮은 어린이집이 많은 편이었다. 대안학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대안형 어린이집이 있는 것이다. 그중 몇 군데 원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내가 어린이집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들도 나와 우리 가족을 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첫째 아이는 6세가 되어서야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교사협동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나도 발도르프를 지향한다.) 


산자락에 위치한 그 어린이집은 매일 오전 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활동을 하며 그들만의 '리듬'을 만들었다. 절기에 맞춰 아이들 활동이 조금씩 바뀌었고, 밥과 간식으로 제철 음식을 먹었다. 말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몸으로 시간과 계절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내는 원목과 염색천, 수공예품 등으로 따뜻한 느낌이 풍겼고, 기계음이 아닌 교사들과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종종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편안하게 머무르고, 자기들끼리 놀이를 했다. 그곳에 다니면서 첫째 아이는 많이 성장하게 되었다. 산만했던 부분이 조금 갈무리되기도 하고, 놀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릴 줄도 알게 된 것이다. 


첫째 아이를 적응시키며 몇 주간 어린이집에 따라다녔다. 둘째를 데리고서 말이다. 그러다 둘째도 자연스럽게 그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그때가 만 2세였는데, 어린이집에 다니기엔 너무 어린 시기라 생각했다. 교사들과 남편은 둘째 아이도 어린이집에 보내라고 했고, 고민 끝에 결국 보내게 되었다. 아마도 그 어린이집이 아니었다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믿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고,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난 육아에 상당히 찌들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그걸 안타깝게 봤던 것 같다. 정작 난 내 상태도 모르고, 아이들만 끌어안은 채 살았으니 말이다. 그 어린이집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고, 나 또한 내 성장을 위해 한 발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참 고마운 곳이고,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발도르프의 재발견


아이들을 보냈던 어린이집 원장님은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대충 알고 있던 발도르프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발도르프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원연수원에서 연수를 기획하던 사람으로서 대부분의 교수법, 교육 관련 정보는 알고 있었는데, 발도르프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는 발도르프에 부정적인 시각도 상당히 컸다. 지향하는 바는 좋으나,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교육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특히 발도르프 교구는 대부분 천연 재료를 이용하고, 직접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 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수공예의 특징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잃어가던 빛을 다시 내뿜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건 내게 큰 기쁨이기도 했다. 그래서 발도르프 학교를 알아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비용의 문턱은 내게 큰 장벽이었다. 공교육의 테두리 속으로 들어가려니 불안감이 들었지만, 아이가 어떤 학교를 다니든 중요한 건 부모가 흔들리지 않고 지지해 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니 훨씬 편안하게 공교육 안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지금 첫째 아이는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작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아니지만,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교사들이 모여서 비슷한 학교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1학년 선생님은 발도르프를 오래 공부하셨던 분이라 수업이 발도르프 형태와 유사하다.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아침 놀이'를 하고, 몸으로 글자를 익히는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다. '혁신학교', '대안학교'를 많이 봤으면서도 일반 학교에서 이런 수업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덕분에 첫째 아이는 1학년 생활을 신나게 즐기고 있다. 






실망스러운 보육 시스템


귀촌을 하고, 새로운 보육 기관으로 옮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단 내 마음에 들어야 보낼 생각이라도 할 텐데, 도무지 마음에 드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이다. 원아가 너무 많은 곳도 있고, 하루 종일 뭔가를 많이 하는 곳도 있고, 장난감이 넘쳐나는 곳도 있고, 시끄러운 음악을 계속 틀어놓는 곳도 있었다. 도대체 그 어린아이들에게 한글, 영어, 중국어 같은 건 왜 가르치는 걸까. 어차피 때가 되면 금방 습득하는 데 말이다. 


보육 기관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 차 타고 가서 하는 체험 활동이 아니라, 매일 잠깐씩이라도 자연을 느끼며 놀 수 있는 시간이 있길 바랐다. 실내에서 장난감 갖고 노는 것보다 잠깐씩이라도 몸을 움직여 산책할 수 있길 바랐다. 플라스틱 장난감이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장난감을 만들고, 놀이를 만들어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길 바랐다. 이런 게 가능한 보육 기관은 이 주변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시 가정보육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막내가 태어나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실망스러워도 한 곳을 골라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막내 케어하느라 아이들에게 줄 수 없는 걸 주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잘 먹고,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보내게 되었다.  


지금도 종종 둘째 아이를 가정보육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초등학생이 된 형을 따라 병설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둘째. 


"오늘은 바깥 놀이 했어?"

"아니, 오늘도 밖에 한 번도 안 나갔어!"


매일 뭔가 만들고, 그려진 그림에 색칠하고, 틀어주는 노래 들으며 지내는 둘째를 생각하면 짠하다. 실내에서 조용히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바깥 놀이할 때 제일 행복해 보이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일찍 하원하고, 같이 산책을 하거나 놀이터에 간다. 막내가 조금 더 자라면 같이 바깥 놀이 하는 게 더 수월해질 것이다. 


요즘 계속 '공동육아'를 구상 중이다. 내가 원하는 보육기관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천천히 구상하고, 조금씩 시도해 볼 예정이다. 내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웃의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이 지역에서는 뜻을 같이 할 사람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그래도 어딘가에 한두 명쯤은 있지 않을까?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런 마을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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