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1부. 6. (4)

1부. 6. (4) 여행이 싫은 이유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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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싫은 이유



여행은 가족이 가는 거야

– 가족이라는 단어에 붙어 있던 상처를 떼어내기까지


“왜 여행을 안 좋아해?”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들은 휴가면 해외든 국내든 떠나고 싶어 하잖아. 자기는 늘 집 근처에서만 놀자고 하고…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신혼여행도 영종도로 가자고 했던 나를 향해 남편이 던진 그 질문은, 내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를 건드렸다. 나는 꽤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나는 여행이 싫을까? 왜 외출만 해도 몸살이 나고, 며칠씩 앓아누웠을까?


오래된 문을 여는 것처럼, 조심스레 기억이 올라왔다.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는 내가 그녀에게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나오기 전까지, 매일같이 말했다. “나는 너를 원한 적 없어.” 시골 아버지는 어머니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나를 그녀 앞에 데려다 놓았다. 자신의 아버지까지,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까지 함께 떠맡게 했고 어머니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의 책임 전가는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가 되어 그 감정은 매일의 피로와 함께 나를 향했다.


“머리 검은 짐승은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야. 내가 무슨 욕을 보려고 너 같은 걸 키워야 하냐. 재수가 더럽게 없지.”


그 말들은 어린 나를 너무 일찍 어른이 되게 했다. 관계를 맺는 방식도,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도,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죄책감이 많았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했기 때문에 끝내 나와 할아버지를 버리지 못했다. 매일같이 따뜻한 밥을 차리고, 깨끗한 이불을 깔고, 조용히 돌보셨다. 나는 기침과 천식으로 자주 아팠고, 식사를 거부하는 일이 많았으며, 할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으로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는 일이 많았다. 돌보기 어려운 사람들 틈에서 어머니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보살핌은 나로 하여금 어머니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감사했기 때문에,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내 감정을 무감각하게,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나는 언어에 무척 민감한 아이로 자랐다. 어머니는 나를 보살펴주는 동시에 정신적, 언어적 학대를 당연하듯 가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랐고 그 경험들은 지금도 내 안에서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 읽은 책에서 사랑의 언어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 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마른 사람이었구나. 그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들었던 가시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말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한 말에 쉽게 녹고, 거친 말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된 건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로 사랑을 주는 이에게 쉽게 끌렸고, 말로 상처 주는 이에게 쉽게 부서졌다. 그 결핍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깊은 고랑이었다.


어머니에게 맡겨졌을 때, 이미 세 살 터울의 아들이 있었고, 이후 자녀가 한 명 더 태어났다. 어머니는 4명의 가족을 이루었고, 나와 할아버지는 그 곁에 기생하듯 붙어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여행은 항상 '가족 여행'이었고, 가족은 늘 4명이었다. 나와 할아버지는 언제나 제외되었다. “가족도 아닌데 불편하게 왜 데려가. 태워 갈 자리도 없어.” 어머니의 말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 깊은 곳을 울린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그날도 그랬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나는 옆에 서서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혹시나, 이번엔 나도 데려가 줄까. 그러나 역시 나는 집에 남겨졌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나는 혹시 멈춰 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동차를 따라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백여 미터를 달렸다. 하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힘없이 돌아와 할아버지 옆에 앉아 조용히 울었다. 그게 내가 가진 가족여행의 첫 번째 기억이다. 게다가 할아버지 곁에 홀로 남겨진 나는 정말 안전한 장벽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두 번째 기억은 11살 무렵, 어머니의 친정 바닷가로 일가친척 모두가 함께 떠났던 여행이다. 그때만큼은 단체로 움직였기 때문에 나도 동행할 수 있었다. 아마 어른들이 ‘그래, 이번엔 데려가자.’ 하고 마음먹은 날이었을까. 기억나는 건 그때 내 친동생도 함께였다는 사실이다. 방학마다 ‘던져지듯’ 시골로 보내졌던 동생. 그 아이는 새어머니가 돌보고 있던 아이였고, 방학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보내졌다. 새어머니는 시골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돌려받지 못한 상황이 반복되자, 일종의 ‘보상’처럼 동생을 보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가족 간의 부채관계 속에서 동생은 합의 없는 저당물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동생이 시골에 올 때마다 여성 어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동생이 돌아갈 땐, 너도 그 짐승 같은 놈 집으로 같이 돌아가야지.”


그 말은 매번 내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나는 그 가족 속에서 간신히 붙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말은 내 자리를 흔드는 고정된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따뜻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 아이도 결핍이 많은 성인으로 자랐고, 나도 결핍과 상처가 가득한 어른이 되었다. 당시 두 아이가 서로를 위로하기엔 내가 동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충분하지 못했다. 나는 동생에게 잘해주지 못했고, 결국 그 아이는 사촌 언니를 더 따르더니 결국 그 언니를 따라 사이비 종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동생을 사랑해주지 않아서라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너무 어렸고 나도 충분히 돌봄 받아야 할 아이였다. 그때의 나로선,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아이를 향한 미안함을 품고 살았다. 그 미안함은 동생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신념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억지로 했던 받아들임은 내게 깊은 상처가 되어 지금도 마음 안에 남아있다. 동생은 나에게서 반복적으로 상처를 줬고, 나는 죄책감에 그것을 참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역할의 고착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떠맡았던 ‘보상하는 아이’, ‘착한 아이’, ‘짐을 덜어주는 아이’의 역할은 동생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그건 역할 고착이었다. 죄책감은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아니라, 내 감정에 대한 부정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 강박적인 죄책감은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바다 여행은 아름다웠다. 내가 봤던 몇 안 되는 넓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함께 있었던 동생과의 거리,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소속되지 못한 느낌이 그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가족’이 아닌 관계. 같은 집에 살아도 ‘안전기지’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그 여행은 내게 소속되지 못한 아이의 외로움을 또렷하게 새겨두고 말았다. 그래서 여행은 내게 ‘배제’와 ‘소외’의 상징이었고, 말로 설명되지 않은 상처의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안전기지에 대한 위협을 받고, 안전 기지를 일찌감치 잃었기 때문에 여행은 내게 '휴식'이 아니라 안전기지에 대한 위협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가족여행 속 함정

-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조종된 따뜻함


가족이라는 인연이 끊어졌다가 다시 만난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따뜻하게 대하셨다. 식사를 준비하시고 정겨운 말들을 건네셨다. 어릴 적 기억을 덮으려는 듯, 우리의 관계는 순탄하게 흘러갔고, 나는 그 안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은 양 그 관계에 깊이 심취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필요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풀리지 않은 매듭들이 여전히 많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흘린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손으로 해결하고 채워드렸다.


“다들 00 발끝도 못 따라가. 발톱의 때만큼도 못해.”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황홀했다. 그 황홀은 내가 그토록 갈망해온 인정이었고, 그래서 더욱 어머니의 칭찬과 인정에 매달리게 됐다. 우리는 어린 시절 가지지 못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드는 중이라 믿었고,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4명의 단란한 가족 구성원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대학원 생활은 바빴고, 미래를 준비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종종 시골에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부탁을 ‘지금이 아니면 기회를 잃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딸 역할에 더 깊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어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케이크를 좋아하신다는 걸 기억해, 점심값을 아껴 케이크를 사갔다. 그걸 꺼내어 한 입 크게 베어무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충만함으로 가득 찼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 그건 곧 인정중독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조용히 잠식하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시골에 내려갔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까지 ‘딸 노릇’을 했다. 어머니는 정말 나에게 잘해주셨고, 나도 진짜 딸이 된 듯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와 딸이 닮았네요.”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조카예요.”라고 늘 정확히 선을 그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들을 외면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고, 따뜻한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때 나는 이미 어머니의 말과 정서에 순응하며 움직이는 ‘시녀’가 되어 있었다.


사촌 동생이 갑자기 “리마인드 웨딩”을 찍자며 사진관으로 불렀던 날도 있었다. 모의고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보다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나는 사진을 편집하고, 조율하고,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나올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 그 사진이 시골집에 걸렸을 때, 나는 마침내 오랫동안 들어가고 싶었던 공간 안으로 들어간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행복이었고, 동시에 조종된 행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가족 여행을 가자”며 나와 남편을 부르셨다. 남편은 아직 남자친구였지만, 기꺼이 따라주었다. 어머니는 동백꽃을 보러 가자며 일정을 내게 맞추어 정하셨고, 나는 드디어 ‘가족 여행’이라는 자리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렇게 시골에 내려가, 동생 차를 타고 함께 출발했다. 그러나 여행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도착한 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병원 주차장이었다.


“가기 전에 할아버지께 들렀다 가자.”


어머니는 내 오른쪽 팔목을 붙잡으셨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니가 가야 빨리 나올 수 있어.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너 기다렸어. 인사라도 하고 가자.”


“싫어요. 제가 왜 가요. 안 보고 싶어요. 무서워요.”


그 말을 했음에도 어머니는 멈추지 않으셨다. 나를 힘으로 끌고 가려 했고,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완강히 버텼다.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그만두세요. 그냥 놔두세요.” 그 실랑이는, 음료를 사러 갔던 동생들이 돌아왔을 때 끝이 났다. 그날 내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했다. 말보다 앞서 움직인 건, 내 기억이 아니라 내 몸이었다. 그 기억은 감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베셀 반 데어 코트는 이를 ‘신체화 된 트라우마’라 불렀다. 나는 논리로가 아니라, 이미 ‘위험하다’고 기억하고 있는 내 몸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감정보다 빠르게 나타나는 몸의 기억은, 베셀 반 데어 코크가 말한 대로 신체화된 트라우마의 전형이었다. 논리나 판단이 아니라, 과거의 공포와 배제가 내 몸에 새겨진 채 되살아났다. 나는 이 상황을 싫어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몸이 ‘안전하지 않다.’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엄마?”


“아니, 할아버지 인사하고 가자고 했는데 안 간다고 하잖아.”


동생들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가. 내가 왜 가. 1층에 있을게. 갔다 와.”


어쩔 수 없이 나를 1층에 두고 동생들과 어머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나는 남편과 함께 병원 1층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20여 분 후, 그들이 내려왔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자고 계시더라. 네가 가도 금방 내려왔을 텐데.”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 말은 이중적인 감정으로 내 심장을 찔렀다. 울컥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여행은 다시 순탄하게 이어졌다. 식당에서 어머니는 내 밥 위에 고기를 올려주셨고, 붉게 핀 동백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그날 명확하게 깨달았다. 어머니의 따뜻함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때에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조건부 수용(conditional regard)이었다. 칼 로저스가 말한 것처럼, 조건적인 인정은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게 만든다. 사랑받기 위해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결국 ‘진짜 나’를 숨기고,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어머니가 원하는 내가 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 자신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사랑과 인정이 조건부일 때, 인간은 스스로를 지우기 시작한다. 나는 오랜 시간 ‘착한 아이’, ‘기억 잘하는 딸’, ‘감정을 읽고 채워주는 존재’가 되어 살아왔다. 어느새 나는 나의 욕구, 감정, 자율성을 밀어내고, 오직 ‘어머니가 원하는 나’가 되려고 애썼다. 그건 역할의 고착이었고, 자기 상실(self-effacement)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주는 시녀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사랑이란 이름 아래,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갔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이번엔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결국 가장 평화로워야 할 단어인 ‘여행’조차 내게는 또 다른 지옥의 문이 되었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겐 설렘이지만, 내겐 언제나 ‘빠진 사람’이 되는 체험이었다. 소속되지 못한 자리, 낄 수 없는 풍경, 대화에서 제외된 이름. 그 감각들은 몸에 새겨져 낯선 공간에 놓일 때마다 무의식처럼 되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낯선 곳에서 긴장했고, 평범한 여행이 누군가에겐 트라우마 재경험이 된다는 것을, 살아내며 배워야 했다. 이제 나는 안다. 그건 여행이 아니었다. 그건 조건부 사랑의 재현이자 관계 중독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결국 가장 평화로워야 할 단어인 ‘여행’조차 또 다른 상처의 문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알게 됐다. 이 관계가 왜 매번 무너졌는지, 그 따뜻함이 왜 끝내 나를 아프게 했는지. 어머니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난의 존재가 들뜨고 가라앉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줄이고 지워야 했다. 그런 관계는 결국 나를 남김없이 소모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여행’이 정말 싫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의 기준에 나를 맞추며,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딸이라면 그래야 한다는 말 앞에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나는 내 감정을 수없이 눌렀고, 내 존재를 끊임없이 조정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 사랑이 무조건적이지 않았다는 것. 그 따뜻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같은 장면을 반복했다. 선택한 줄 알았던 관계들이 결국, 나를 지워야만 유지되는 조건부 사랑의 되풀이였다. 프로이트는 이를 ‘반복강박’이라 부른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끝내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는 것. 나는 그 안에서 또다시 나를 잃어갔다. 나는 나를 버리고 사랑받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 라는 마음이 이제야 나를 편안하게 놓아줬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존엄한 이별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감정과 행복을 책임지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저 담담히 인정하려 한다. 내가 원한 여행은 '동백꽃 여행'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내가 꿈꾼 가족은 현실에 없었고, 존재조차 허락되지 않은 존재로서 평생 그 자리를 갈망해 왔다는 걸.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증명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존재를 담보로 거래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다. 나를 사랑해주지 못한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그 사랑에 목매단 나를 다시 품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이제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가장 단단한 안전기지가 되어주기로 한다.






1부. 6. <여행이 싫은 이유> 참고 자료


1.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소속감 결핍에 의한 외상 기억 강화, 애착이론

2. Bowlby, John,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1988

→ 안전기지(Safe Haven), 애착이론

3. Bowen, Murray,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1978

→ 역할 고착(Role Fixation), 가족체계이론

→ 삼각관계(Triangulation), 감정 분산과 조종 구조

4. Freud, Sigmund, 『The Ego and the Id』, W. W. Norton, 1923

→ 강박적 죄책감(Obsessive Guilt), 자아심리학

5.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죄책감에 기초한 자기 억압(Self-suppression by guilt), 자기심리학

6. Stern, Daniel N., 『The Interpersonal World of the Infant』, Basic Books, 1985

→ 감정의 언어 결핍, 발달심리학

7.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2014

→ 가족 내 배제 경험, 신체화된 트라우마, 감각 기억, 트라우마 심리학

8. Carl Rogers, 『On Becoming a Person: A Therapist’s View of Psychotherapy』, Houghton Mifflin, 1961

→ 조건부 수용(Conditional Regard), 자기 개방과 무조건적 긍정

9. 채프먼, 게리, 『5가지 사랑의 언어』, 생명의말씀사, 2009

→ 사랑의 언어, 관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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