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2부. 1.

2부.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는 신념 부수기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생존을 위해 만든 내면의 신념체계를 들여다보고, 새롭게 정의하다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는 신념 부수기


(1) ACE 연구를 처음 접했던 날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일어나 보니 다정다감한 아버지께서 수건을 개고 계시고, 어머니는 가족들과 먹기 위해 따뜻한 국을 끓이고 계신다. 국이 끓는 소리가 내 귀에 달콤하게 들린다.


“일어났니? 어이구. 우리 이쁜 딸. 오늘도 자고 일어나느라 수고했어. 무슨 나쁜 꿈 꿨어? 괜찮아. 넌 다 잘 될 거야.”


아빠의 따뜻한 말이 이어지고, 살짝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동생 방에 들러 동생의 이불을 끌어당겨 옆에 눕는다.


“일어나. 너 오늘 어디 안 가? 니 이불은 왜 이렇게 따숩냐.”


내가 그리는 아침 풍경이 나는 오늘도 그립다. 일찍 삶을 잃은 엄마와, 상처에 꺾인 아버지의 삶. 그리고 부모님의 정서를 그대로 물려받아 어딘가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꺾인다.


다 잊으면, 나만 참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고, 어두운 그늘이 점차 마음과 몸에 드리웠다. 지난 4년 동안 심리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 욕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3년 전 나는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네이딘 버크 헤리스 지음)라는 책을 심리서적들을 뒤적이다 우연히 읽게 됐다. 그 안에서 ACE 연구를 처음 마주했다.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연구는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이 성인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대표적인 심리 연구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방임, 부모의 알코올 의존이나 정신질환, 가정 내 폭력 등 총 10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ACE 점수를 산출하며, 이 점수가 높을수록 성인이 되었을 때 우울, 자살 시도, 중독, 만성질환, 조기 사망과 같은 리스크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 트라우마가 우리의 신경계, 호르몬 시스템, 면역 기능, 심혈관 기능, 심지어 유전자 발현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가 겪은 고통과 질병이 단지 ‘내가 예민해서’,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책 속 ACE 설문지에 나도 조심스레 답해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10점 만점 중 10점을 받은 사람이라는 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피로에 시달리고, 감정 기복에 휘청이고, 알 수 없는 통증과 무기력에 짓눌렸던 날들이 이제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은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 비상경보 상태로 살아왔고, 내가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동안, 신체는 ‘전혀 괜찮지 않다.’고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왔던 것이다. ACE 점수가 높을수록 ‘버티는 삶’이 아니라, ‘지지받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말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통계’가 아니라, 그것은 나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날부터 나는 어쩌면 남들보다 20년은 일찍 세상을 마감할 나를 살리기로 했다. 나는 10점이라는 점수가 내 삶에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에서 설명한 내용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설 수 없는 무서운 병이 찾아오기 전에 나에게 돌봄의 언어, 회복의 환경,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안전한 관계가 필요했다. 심리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왜 나는 항상 버텨야만 했을까.”

“왜 나는 나를 희생하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을까?”


그 질문들 아래에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신념들이 숨어있었다. 심리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자리 잡은 핵심 신념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분석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신념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삶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 보기로 마음먹었고, 그 마음은 심리공부로 이어졌다. 나에게 존재하는 트라우마가 나의 인격이 아니라 살아남은 방식이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 그제야 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일부를 이제야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려, 천천히 꺼내어 적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매일 배우는 중이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 / 심심 출판사] 책 내용 중 ACE 항목을 가져왔습니다.


당신이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1. 부모나 집안의 다른 어른이 자주

당신에게 욕설을 하거나, 모욕하거나, 조롱하거나, 굴욕감을 주었나요? 또는 당신이 몸을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행동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2. 부모나 집안의 다른 어른이 자주 당신을 밀치거나 세게 움켜잡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당신에게 무언가를 던졌나요? 또는 당신에게 맞은 자국이 생겼거나, 다칠 정도로 세게 때린 적이 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3. 어른이나 최소한 당신보다 다섯 살 많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당신을 만지거나, 애무했거나, 또는 당신에게 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만지게 강요한 적이 있나요? 또는 당신에게 구강, 항문 또는 질 성교를 시도했거나, 실제로 한 적이 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4. 당신은 가족 중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을 중요하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또는 가족들이 서로를 위하지 않거나, 가깝게 느끼지 않거나,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느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5. 당신은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거나, 더러운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당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또는 부모가 술이나 마약에 너무 취해 있어서 당신을 보살피지 못한다거나, 필요할 때 당신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다고 자주 느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6. 당신의 부모는 별거한 적이 있거나, 이혼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7. 누가 당신의 어머니 또는 양어머니를 자주 밀치거나, 세게 움켜잡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그녀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졌나요? 또는 이따금 또는 자주 발길질을 하거나, 물거나, 주먹으로 때리거나, 단단한 것으로 때렸나요? 또는 적어도 몇 분 이상 계속해서 때렸거나, 총이나 칼로 위협한 적이 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8. 당신은 술 문제를 일으키거나, 알코올중독자인 사람 또는 마약을 하는 사람과 함께 살았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9. 가족 구성원 중에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걸렸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10.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감옥에 간 사람이 있었나요?

예 □ 아니오 □ ‘예’라면 1점 기입    

‘예’라고 답한 수를 더하시오. 이것이 당신의 ACE 지수입니다.




ACE 점수에 따른 건강 리스크 해석 (Nadine Burke Harris 정리 기준)


ACE 점수 0~1점: 부정적 아동기 경험이 거의 없거나 한 가지에 그쳐,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위험이 낮은 편이다.


ACE 점수 2~3점: 약간의 위험 증가. 우울, 불안, 약물 사용 등의 정신건강 문제나 만성질환의 발생 가능성이 다소 높아질 수 있다.


ACE 점수 4점 이상: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임계점으로 간주된다.


자살 시도 위험: 일반인 대비 12배 증가

알코올중독 위험: 7배 증가

폐질환, 심장병, 간질환 등 만성질환 확률 현저히 상승

학습장애, 과잉행동, 공격성 등 아동기 행동 문제 확률 증가

이른 사망 위험 또한 ACE 점수에 비례하여 상승


ACE 점수 6점 이상: 기대수명이 평균보다 20년 이상 단축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음

PTSD 발병률, 자가면역질환, 암 발병률, 우울증 및 자살충동 비율이 급격히 증가


[위 내용은 글을 위해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2)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생존의 신념들

심리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자리 잡은 핵심 신념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분석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신념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 - 공의존, 반복강박


2. 내 감정은 타인의 감정보다 중요하지 않다. 감정보다 의무가 우선이다. - 감정 억압, 초자아의 억제


3. 나는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이고,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 자기애 결핍과 수치심


4. 내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 나는 중재자이자 타인의 감정과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 중재자 역할 고착, 삼각화 구조, 희생자 역할 반복


5. 진짜 나를 보여주면 버림받는다.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 조건부 사랑, 애착 불안


6. 내가 잘해야만 관계가 유지된다. 내가 못하면 사랑은 언제든지 끊어진다. - 자존감 결여, 불안형 애착


7.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다. 참고 견디는 자에게 복이 오기 때문에 부당하게 대우받더라도 참아야 한다. - 자기 억제, 인내 강박


8.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온전히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탓이다. - 자기 비난, 피해자 죄책감


9. 나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든 빼앗길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다. - 박탈 불안, 불신, 애착 손상


10. 내 감정을 말하면 벌을 받는다. - 감정 표현 억압, 표현 금기


11. 나는 스스로를 돌볼 자격이 없고, 내 감정을 챙기는 건 이기적이다. - 자기 방임, 자기애 결핍


12. 아무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나의 고통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 외상 고립, 신뢰상실


내가 발견한 핵심 신념들을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뤄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를 위한 새 신념(Supportive Beliefs)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과 치유의 단계를 함께 걸어가길 간절히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3)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 - 공의존, 반복강박

행복상회는 어릴 적 가장 좋아하는 가게였다. 근처엔 비슷한 3개의 가게가 있었다. 각 가게들의 주제가 분명했는데, 행복상회는 좋아하는 액세서리 용품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곳엔 어린아이 눈에도 정말 아름다운 주인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분의 취향대로 골라 오신 각종 액세서리들이 어찌나 예쁘던지 지금도 가끔 나는 꿈에서 행복상회에 간다. 지난밤 꿈속에서 행복상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봤다. 꿈에 보이는 상회의 모습은 여전했다. 내 기억에 남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 반짝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오른편엔 과자들이 계단 형식을 이뤄 쌓여있고, 왼편엔 액세서리 류와 문구류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액세서리가 있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이고 서서 구경하곤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주머니는 참을성 있게 항상 나의 선택을 기다려주셨다. 어린 시절 행복상회에 자주 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나는 5살 무렵부터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사용했고, 그 바로 옆 방은 친척 어른의 방이었다. 그 친척 어른은 지금 기억하기에도 멋진 분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노래도 잘 부르고, 기타를 잘 치는 풍류를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유쾌하게 잘 웃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친척어른은 자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 상태에서도 오토바이를 탔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다 하셨다. 그 친척어른은 허기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술이 과한 날이면 어김없이 내가 있는 방에 들어와 할아버지와 큰 소리로 말다툼을 하셨다. 말다툼은 곧 주먹다짐으로 번졌고, 옆에 있던 나는 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할아버지를 때릴 수 없었던 친척어른은 옆에 있던 나를 때리고 발로 찼다. 내가 도망가기에 충분하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구석에 앉아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불같은 손과 발을 견뎌야 했다. 그런 시간들이 자주 반복 됐고, 폭력이 행해진 날의 다음 날이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친척어른은 사과 한마디 없이 내 손을 잡고 행복상회에 갔다. 나는 그가 사준 액세서리를 볼 때마다 지난밤들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올랐고 마음 한편이 늘 복잡하고 무거웠다. 예쁘고 반짝이는 물건들이었지만 내게 그것은 ‘사과 없는 보상’이었기 때문에 상처 위에 붙인 반창고 같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 속 나는 항상 노란 플라스틱 머리띠만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예쁜 핀들은 어디다 버려두고 촌스럽고 노란 플라스틱 머리띠만 하고 다녔는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예쁘지 않다.


눈 주변이 시퍼렇게 멍들어서 터진 다음 날엔 상회에서 어떤 물건이든 가격 상관없이 고를 수 있었다. 어린 나는 그 모순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그 선물들을 ‘나를 좋아하니까’라는 증거라고 해석해 버렸다. 때리고, 사주는 것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런 심리 상태는 폭력적 애착(traumatic bond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뇌는 극심한 고통과 미약한 보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때,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중독 반응을 일으킨다. 나는 아픔 이후의 달콤한 순간을 기대하며 상처를 견뎠고, 그 기대는 공포와 애착이 뒤섞인 혼란으로 기억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이 만들어낸 일종의 인지 부조화 해소 전략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를 미워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견딜 만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부터 보이는 곳까지 여러 군데 멍들어서 아팠지만 예쁜 물건들에 눈이 팔려 정신없이 골랐다. 덕분에 내 액세서리 바구니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예쁜 액세서리들과 달리 내 모습은 예쁜 상태인 적이 별로 없었다. 눈 주변은 퍼렇게 멍이 들고 피가 터지고 멍 자국이 생겨있었다. 엉망인 모습을 한 8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한참 서서 여러 머리띠를 써보고 골랐으니 참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고통을 준 사람에게서 위로까지 받으려는 마음이 얼마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인지. 반복된 폭력 뒤의 선물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참고 견디는 법만 배워갔다. 돌이켜보면 그건 ‘조건부 사랑’이었고, 나의 감정을 왜곡시키는 ‘인지 부조화’였다. 반짝이는 핀은 나의 보상이 아니라 그저 침묵과 망각의 가격표에 가까웠다.


기억이 많이 삭제됐음에도 눈에 불이 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조절하지 못한 채, 어린 나를 통해 감정을 분출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자율신경계의 조절 실패이자 정서적으로 미성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했던 경험은 이후 나의 자존감을 뿌리 채 흔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판자처럼 분리되어 있는 공간이어서 누구든 내게 폭력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도 내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방임의 기억도 잔혹한 상처로 남았다. 정서적 방임은 신체적 학대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경험은 ‘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신념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곧 내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나를 방치하게 되는 자기 방임의 패턴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할아버지마저 친척과 함께 나를 때렸으니,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싸움에서 아주 간편하게 나를 선택했고 자신들의 분노를 나를 통해 서로에게 표현했다.


나는 사실 친척 어른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나를 때렸던 이유가 나를 미워해서라기보다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부터 ‘사랑받기 위해서는 아파야 한다.’는 이상한 공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고통을 견뎌야만 누군가의 미안함이나 애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조건부 사랑의 구조가 내 안에 너무 이르게 자리 잡았다. 그는 어머니들의 폭주를 막아주던 사람이기도 했고, 나를 행복상회에 데려가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낳아주신 아버지에게도 들지 않던 따뜻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그의 고통을 나의 것처럼 품고, 나의 감정보다 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의존(Co-dependency)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타인의 감정과 필요를 우선순위에 두고, 그들의 불안과 분노를 받아내는 관계로 나는 점차 공의존적인 자아를 획득해가고 있었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내가 도와야만 그 사람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괜찮으면 결국 나도 사랑받을 수 있어.”라는 왜곡된 신념이 자라났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었다. 친척 어른이 내게 상처를 준 건 그의 고통 때문이고, 나는 그를 이해해야만 한다고 그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폭력의 날과 다음 날의 상반된 그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폭력은 성인이 되어서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도록 마음을 움직였다. 그처럼 외로운 사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상처를 주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애정을 품고,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책임지려는 진정한 공의존 상태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과거의 나를 떠올릴 때면 돕지 않고, 버려야 할 관계들 속에서 나는 늘 그들을 돕고 붙잡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건 단지 내가 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견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을 가졌다. 마치 내가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린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은 어린 시절 해결되지 못한 관계를 다시 반복함으로써 이번에는 다르게 끝낼 수 있다는 무의식적 환상을 좇는 행위다. 하지만 그 끝은 매번 같았다. 나는 또다시 상처받고, 또다시 나를 잃었다. 그 모든 시작점이 어쩌면 행복상회였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어느 날 친척 어른의 따뜻한 손을 붙잡고 상회로 들어가 예쁜 머리띠와 핀들을 고르던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상처 위에 덧붙인 반짝이는 보상으로 사랑을 배웠고, 그 배움은 오랫동안 나를 반복의 고리에 가두어 두었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한 대가로 무엇인가 준다면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감정도 들지 않고, 미안한 감정도 없다. 왜냐하면 충분히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와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감싸 안으려고 애쓰는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버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이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넌 그저 사랑받아야 했던 아이였어.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짊어져야 할 이유도, 상처받고도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어. 이제 너를 사랑해 줄 차례야.”


지금껏 타인의 기분이 먼저였던 삶에서 이제는 나의 감정이 나의 삶을 이끌어가도 괜찮다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누구의 감정과 상황도 대신 내가 질 필요 없고 나는 삶을 내 삶을 온전히 마음대로 누리고 살아도 괜찮다.라고 나를 다독인다. 오늘의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감정을 떠안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고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처와 사랑을 동일선상에 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4)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 네가 이해해야 해.라는 말의 함정


몇 년 전 다른 친척 어른이 내게 말했다.


“어릴 때 그 친척이 너를 그렇게 때린 게 네 아빠가 그 사람을 죽도록 팼거든. 그래서 너를 때린 거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네가 불쌍한 그 사람 이해해줘야 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듯 한참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그 말에 반기라도 들 듯 말했다.


“아.. 그러면 저도 그분이 자녀 분을 낳으면 때려도 되겠네요.”


사과 한마디면 충분한 일들을 미성숙한 사람들은 어른이 되고서도 타인에게 감정을 전가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이해받고 싶다고 요구한다. 지금도 그 말을 떠올릴 때면 어릴 때 이유 없이 맞았던 것도 억울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 다시 이해요구(강요)라는 것에 화가 치민다. 게다가 그가 충분히 내게 보상했다고 했던 행복상회의 많은 액세서리들도 제대로 착용해 본 적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당시 나는 그 액세서리들을 머리에 착용하고 다니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름다운 머리핀들과 머리띠를 두고 다 해지고 떨어진 노란색 플라스틱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예쁜 핀들은 어디다 버려두고 촌스럽고 노란 플라스틱 머리띠만 하고 다녔는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예쁘지 않다.


그런 내게 위로랍시고 그런 말을 전하는 어른의 의도에 대해 몇 년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선한 의도를 쌀 한 톨만큼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과 한마디면 오히려 모든 것이 해결됐을 텐데, 그 아쉬움도 생각을 거듭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 사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과한다고 해서 내 안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치유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용서라는 것도 상대방이 어떻든 내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가해자에게 구구절절 사과받을 필요 없다. 어차피 사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아프지 않은 대로 품고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나를 치유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내 눈 주변과 몸에 푸른 자국을 가득 남겨준 친척어른과 그 친척 어른을 거들겠다고 한마디 얹은 사람까지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그 고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품고 살아간다. 용서는 잊음이 아니라 기억하는 방식이다. 나는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래야 내 삶이 같은 상처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결심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반응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뇌는 생존을 위해 고통의 장면을 저장해 두고, 유사한 자극이 왔을 때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익숙한 고통을 안전하다고 오인하도록 하기 때문에 나는 상처를 피하지 못했고, 오히려 같은 고통을 찾아가며 반복했다. 기억은 그저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신체에 새겨진 반응이고 나를 보호하려는 생존의 언어였다.


그러니 이제 나는 더 이상 상처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처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단단한 사랑의 증거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더 이상 아픈 관계를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은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늘 당신도 반복을 멈추고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2부.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는 신념 부수기> 참고자료


1. Nadine Burke Harris, The Deepest Well,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8

→ 사용된 개념: ACE 연구, 트라우마와 신체질환

2. Donna Jackson Nakazawa, Childhood Disrupted, Atria Books, 2015

→ 사용된 개념: 트라우마의 생물학적 흔적, 만성질환과 반복 기억

3. Bessel van der Kolk, The Body Keeps the Score,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몸에 저장된 트라우마, 신체 기억과 생존 본능

4. Melody Beattie, Codependent No More, Hazelden Publishing, 1986

→ 사용된 개념: 공의존(Co-dependency), 타인의 삶에 감정적으로 얽매이는 자기 상실

5. John Bowlby, A Secure Base, Basic Books, 1988

→ 사용된 개념: 애착이론, 안전기지(Safe Haven)

6. Leon Festinger, 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7

→ 사용된 개념: 인지 부조화 이론, 폭력 이후의 정당화 메커니즘

7. Daniel N. Stern, The Interpersonal World of the Infant, Basic Books, 1985

→ 사용된 개념: 감정의 언어 결핍, 정서 발달

8. Jonice Webb, Running on Empty, Morgan James Publishing, 2012

→ 사용된 개념: 정서적 방임, 자기 방임과 애착 손상

9. Judith Herman,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1992

→ 사용된 개념: 외상 후 스트레스, 방임의 상처, 관계 속 트라우마 구조

10. Janina Fisher, Healing the Fragmented Selves of Trauma Survivors, Routledge, 2017

→ 사용된 개념: 자기 방임, 공감 피로, 해리와 감정 조절 장애

11. Carnes, Patrick. The Betrayal Bond: Breaking Free of Exploitive Relationships, Health Communications, 1997.

→ 사용된 개념: 폭력적 애착, 착취적 관계 중독

12. Patrick Carnes, The Betrayal Bond, Health Communications, 1997

→ 사용된 개념: 폭력적 애착, 착취적 관계 중독

13. Pia Mellody, Facing Codependence, HarperOne, 1989

→ 사용된 개념: 공의존의 기원, 어린 시절 상처로 인한 자기경계 상실

14. Freud, Sigmun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W. W. Norton, 1920

→ 사용된 개념: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 무의식적 자기파괴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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