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1) 저 감은 시어서 못 먹을 거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친척이 떠난 방이 드디어 내 방이 됐을 때, 처음으로 나만의 울타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안전한 감각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방문을 열고 나오면 마루가 있었고, 마루에 앉아 신을 신는 동안 항상 내 머리 위에 매달린 곶감 줄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말라가던 곶감은 유독 달콤해 보였고, 한 입 베어 물면 얼마나 맛있을까, 매일 상상했다. 하지만 허락 없이는 손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결국 그 감이 내 입에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저 감은 땡감을 말린 거라서 맛이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일부러 떠올려 내 기대를 지워냈다.
나중에 ‘마시멜로 실험(Marshmallow Test)’이라는 심리학 연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나는 주렁주렁 매달렸던 곶감들이 떠올랐다. 1970년대 심리학자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이 진행한 이 실험은 아동의 자기 통제력과 미래 성공 가능성 간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였다. 아이에게 마시멜로 하나를 주고, "지금 먹지 않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하나를 더 줄게."라고 말하며 선택의 기회를 준다. 후속 연구에서는 기다린 아이들이 학업 성취도가 높고, 사회적 기술이나 스트레스 관리 능력도 뛰어났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나는 그 실험을 보며, 단순히 기다렸다는 사실보다 기다림이 보상으로 이어지는 경험 자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달았다. 나처럼 기다림이 무시되고, 욕구가 끝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아이는 결국 ‘나는 좋은 것을 경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내면화하게 된다. 언젠가 곶감을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 대신, ‘저건 맛없을 거야.’라며 내 욕구를 미리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내해도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좌절을 반복하며, 결국 무언가를 원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덜 아팠기 때문이다.
곶감 줄은 족히 열 줄이 넘었고, 한 줄에 여섯 개 이상 감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다. 언젠가 내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묵묵히 도왔다. 그러나 감이 말라 곶감이 되어도 어머니의 허락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올 즈음 잘 말려진 감은 비닐에 싸여 냉동실에 들어갔고, 아주 가끔 잘게 썰어 간식으로 나왔다. 내가 원했던 것은 온전한 곶감 하나를 크게 베어 무는 기쁨이었기에, 그때마다 만족되지 못했다.
우리 집 마당에는 과일나무가 가득했다. 앵두나무만 해도 족히 쉰 그루는 넘었고, 포도나무, 마당 가장자리에 가득 자리 잡은 딸기들, 무성한 매실나무, 대추나무, 단감나무, 자두나무, 새로 심은 사과, 배나무들까지.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타고난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열매들을 맛보려면 늘 허락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과일 수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하셨고, 허락 없이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과일 수를 셀 수 있다는 건 거의 신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일들이 얼마나 무성하게 열렸던지, 동네 아이들이 포도를 서리해 먹으려고 집 울타리 벽돌 틈에 쇠파이프로 손이 들어갈 크기의 구멍을 여섯 개나 뚫었다. 그 구멍 때문에 그 해 포도 농사를 망친 어머니는 화가 나 포도나무를 전부 뽑아버리셨다. 그 일 이후 나는 구멍을 볼 때마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가끔은 나도 너무 먹고 싶어서 어머니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혹은 땅에 떨어진 것처럼 위장해 과일을 따 먹으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것이 허락 없는 도둑질이라는 생각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몰려왔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던 어머니의 애정이 과일과 함께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눈앞에 주렁주렁 열려 있어도, 나는 자주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반복된 포기는 욕구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나를 훈련시켰다. ‘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라는 말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반복된 좌절을 통해 만들어진 생존 전략이었다. 나는 욕구를 버림으로써 실망도 피하려 했다.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느끼지 않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어기제는 반복적 좌절 경험을 통해 욕구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실망의 고통을 차단하려는 생존 전략으로 작용했다. 욕구를 닫으면 고통도 줄어들기 때문에 나는 감정을 하나씩 꺼내지 않고, 접어두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감정을 지우면 실망도 줄어드니까. 욕구가 없다고 믿으면 아프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 안의 욕구를 하나씩 지우면서 자라났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합리화’ 혹은 ‘회피 전략’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했던 셈이다.
어느 날 마당에서 뛰놀던 고양이와 개가 낮은 풀밭 가장자리에 가득 열린 딸기를 톡 하고 끊어 먹는 장면을 봤다. 그 순간 문득 ‘그래도 니들이 나보다 낫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서글픈 감정이었고, 동시에 어린 나의 마음에 각인된 불공평함의 기억이기도 했다. 그 기억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과일을 즐겨 먹지 않는다.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때 닫힌 욕구가 지금까지도 내 감정과 선택을 제약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다.’라는 신념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하게 되었다. 견디지 않으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인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격언조차 내겐 무의미했다. 내게 돌아온 건 열매가 아니라 ‘포기하라.’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기다렸지만 충족되지 않은 경험은, 언젠가를 기대하게 만들기보다 미리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형성된 인내 신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조건 참아야만 관계가 유지된다는 왜곡된 생존 전략이 되었다. 나는 그 신념을 살아내야만 했고, 그것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인내하지 못하는 나는 나약하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자기혐오가 수반되어 수치심과 죄책감의 감정 안에 묶였다. 내 안의 목소리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정도도 못 참고 무너지니?’ 그 말 앞에서 나는 늘 부끄러웠고, 더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진짜 인내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지만, 어린 시절 내가 배운 인내는 내 욕구도 감정도 삼켜버린 순응이었다.
-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은 비슷해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되는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나는 잘못된 사람이다.”라는 존재 전반에 대한 부정이고, 죄책감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행위에 대한 반성입니다.
심리학자 헬렌 루이스(Helen B. Lewis)는 수치심을 자기 존재에 대한 평가로, 죄책감을 행위에 대한 평가로 구분했습니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수치심을 “나 자체가 결함 있다”는 믿음, 죄책감을 “내 행동이 문제였다”는 인식으로 나누며, “수치심은 우리를 침묵시키고, 죄책감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죄책감은 때로 치유로 나아가는 동기가 되지만, 수치심은 나를 존재 자체로 무력화시키는 감정입니다.
1. Mischel, Walter, The Marshmallow Test: Mastering Self-Control, Little, Brown, 2014
→ 사용된 개념: 지연 만족, 자기 통제력, 인내와 미래 성과의 관계
2. Kidd, C., Palmeri, H., & Aslin, R. N., “Rational snacking: Young children’s decision-making on the marshmallow task is moderated by beliefs about environmental reliability.” Cognition, 126(1), 2013
→ 사용된 개념: 환경 신뢰도와 인내 간의 상관관계, 보상의 예측 가능성과 심리적 안정
3. Helen B. Lewis, Shame and Guilt in Neurosis,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수치심과 죄책감의 구조적 구분 (자기 vs 행동 중심 감정), 정신분석학
4. Brené Brown, I Thought It Was Just Me (but it isn’t), Gotham Books, 2011
→ 사용된 개념: 수치심과 자기정체감, 자기연민, 회복 가능성, 관계심리학
5. June Price Tangney & Ronda L. Dearing, Shame and Guilt, Guilford Press, 2002
→ 사용된 개념: 수치심은 자기파괴적 감정, 죄책감은 도덕발달적 감정, 발달심리학
6. Bowlby, John,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1988
→ 사용된 개념: 욕구 좌절과 애착 손상, 안전기지 부재, 애착이론
7. Winnicott, D. W., Playing and Reality, Tavistock, 1971
→ 사용된 개념: 진짜 자아와 거짓 자아의 형성, 감정 억압의 심리적 비용
8. Seligman, Martin,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W.H. Freeman, 1975
→ 사용된 개념: 반복된 좌절과 무기력 학습, 기대 포기 전략, 학습된 무기력
9.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자기 억제, 자기 이상화, 수치심의 내면화, 자기심리학
10. Freud, Sigmund, The Ego and the Id, W. W. Norton, 1923
→ 사용된 개념: 초자아의 비판적 기능, 강박적 자기 이상화, 자아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