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2부. 7 (3)

2부. 7. (3) 누더기를 걸친 마음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7.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다.


(3) 누더기를 걸친 마음


그때부터 나는 아픈 걸 숨기는 데 익숙해졌다. 몸의 통증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나를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침묵은 단순히 몸의 상처를 가리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관계와 선택,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초등학교 4학년 11살(만 나이 9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10시가 넘었는데도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복도를 기웃거렸고, 마침 복도로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이 보였다. 평소 교장 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나는 부반장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 의해 복도 앞으로 밀려났다. 얼떨결에 교장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자 이렇게 물었다.


“교장 선생님, 담임 선생님이 아직 안 오셔서 걱정돼요. 친구들이 여쭤보래요.”


교장 선생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곧 오실 테니 기다리렴.” 하고 가셨다.


잠시 후, 교탁 앞문이 열렸다. 담임 선생님은 무표정하게 들어오더니 교탁 옆에 세워둔 당구 큐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단 한 마디를 던졌다.


“서.”


일어선 순간, 큐대 끝이 내 가슴팍을 세게 찔렀다. 몸이 푹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네가 교장 선생님께 물어서 내가 아침 내내 혼났잖아.”


그 한마디와 함께, 쓰러진 나를 스스로 일어나게 한 후 또 밀쳤다. 쓰러지면 또 서게 하고, 다시 밀쳤다. 교탁 앞에서 시작된 이 ‘밀침’은 디귿자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들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아 교실 구석들과 앞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반 아이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봤다. 나는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며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아무 일 없던 듯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집에서도 이 일을 꺼내지 않았다. 이미 집안 친척들에게 맞고 있던 시절이었고, 나를 지켜줄 어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내가 잘못했으니 맞을 만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당함을 감지하기 전에, 내 잘못부터 찾는 자동 반응은 어린 시절 반복된 경험 속에서 몸에 새겨진 생존 방식이었다.


며칠 후, 집 근처에 사는 어머니의 친구가 놀러 와서 어머니께 말했다.


“너네 집 딸, 선생님한테 흠씬 맞았다는데 알고 있어? 내 아들이 무서웠다고 하던데, 맞은 데는 괜찮대?”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아버지께 전했고, 아버지는 친척들 앞에서 이 일을 공론화했다. 그 모습이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분노하나 싶었다. 집 안에서 내가 맞든 무슨 일을 당하든 한 번도 개입하지 않던 분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사건을 교육청과 경찰서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나에게 매일 원고지 20~30장을 주며 사건 내용을 자필로 빼곡히 쓰게 했다. 같은 내용을 10번 넘게 쓰는 일은 그 자체로 2차 가해였다. 쓰는 동안 고통이 되살아났지만, “더 자세히 쓰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후 경찰과 교육청 직원들이 학교에 와서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을 물었고, 아이들은 보고 들은 대로 진술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런데 이후 들은 소식은 나를 다시 얼어붙게 했다. 전근 간 학교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참가한 친구가 그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선생님이 친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는 것이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시선과 표정은 피해자에게 오래 지속되는 2차 외상이 된다.


이 사건은 내 안에 복잡한 질문을 남겼다. 누가 봐도 집에서 맞아 멍이 든 채 다니는 아이가 어떤 환경에 사는지 선생님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건 훨씬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해되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태도였다. 집에서는 괜찮고, 밖에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아버지의 추궁 속에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수치심으로 각인됐다. 지금도 떠올리면 선생님이 아닌, 그날의 아버지 표정이 먼저 떠오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이중 구속(Double Bind)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아라. 말하지 마라.”라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꾸짖는 것이다.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해도 틀린 선택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 무력감과 자기 의심을 내면화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타인에게 어떤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는 핵심 신념이 굳어지고,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와 선택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나 역시 이 신념에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족쇄를 풀어내고 다시 나를 믿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부터 걸친 마음의 누더기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쉽게 벗겨지지 않은 채 잘못된 인내를 부추기는 무거운 옷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선생님 같은 건 절대 되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2) 2부 7. (3) 참고 자료


1. Bateson, Gregory, Steps to an Ecology of Min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2

→ 사용된 개념: 이중 구속(Double Bind) — 상반된 메시지가 동시에 주어져 선택 불가능한


2. 상황을 만드는 의사소통 패턴, 가족치료이론

Herman, Judith L.,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1992

→ 사용된 개념: 2차 외상(Secondary Trauma) — 사건 이후의 시선·표정·태도 등으로 재경험되는 심리적 피해, 트라우마 심리학


3.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신체에 각인된 외상 반응, 트라우마의 장기적 영향, 신체·정서 반응 연결


4. Seligman, Martin,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W. H. Freeman, 1975

→ 사용된 개념: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 반복된 무력감 경험이 내면화되어

5. 행동 회피와 자기 의심으로 이어지는 심리 메커니즘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사용된 개념: 아동기 애착 손상과 자기 의존 강화, 보호자 부재가 주는 불안정 애착 형성, 애착이론


6. Proctor, N., Self-Neglect: Understanding, Assessment, and Intervention, Routledge, 2014

→ 사용된 개념: 자기 돌봄 결핍(Self-Neglect) — 신체·정서적 필요를 돌보지 않는 패턴, 방임과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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