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 (5)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참아야 했다. 달콤하게 익어가는 감을 눈앞에 두고도, “저건 시어서 못 먹는다.”는 말로 스스로의 마음을 닫았다. 함께 놀고 싶은 친구들이 거부할 때도 '엄마가 없으니 당연한 것'이라며 이유를 나에게서 찾았다. 허전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염소와 병아리, 마당을 뛰놀던 고양이와 개, 냇가의 물고기에게까지 말을 걸며 마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교실 안에서 부당한 일을 겪더라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들을 꿀꺽 삼켰고 아무렇지 않은 듯 과하게 웃으며 일상을 이어갔다.
성인이 된 후에는 이 ‘참고 견디는’ 방식이 몸에 깊게 새겨져서, 알 수 없는 알레르기와 이상 증상들이 연달아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몸의 반응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는 순간조차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20대를 보냈다. 이 모든 장면에는 하나의 핵심 신념이 숨어 있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미덕이고, 참아내지 못하면 나는 가치없는 존재다.’
그것은 어린 시절 함께한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운 ‘살아남는 방식’이었지만, 동시에 내 존재를 조용히 지워가는 길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견디는 법은 배웠지만,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몰랐다. 참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고 참고 또 참으며 시간들을 버텼다. 그러나 이내 몸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대변하듯, 각종 알레르기와 질병이 발현되며 나를 멈춰 세웠다.
베셀 반 데어 콜크는 『The Body Keeps the Score』에서 몸은 기억을 간직하고, 말하지 못한 고통을 증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몸으로 배웠다. 억눌린 감정과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신체 감각 속에 잠복해 있다가 삶이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 신호로 튀어나온다. 나의 알레르기와 만성 통증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시당한 내 감정과 내 몸의 언어였다.
오랜 시간 나는 ‘정서 억제(Emotional Suppression)’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 맞물린 상태에서 살았다. 학습된 무기력은 길들여진 코끼리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어린 코끼리는 단단한 말뚝에 묶여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나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결론을 배우고 만다. 시간이 흘러 거대한 힘을 갖게 된 이후에도, 코끼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묶인 채 가느다란 줄에 순순히 붙잡혀 산다. 인간도 반복된 실패와 억압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말뚝에 묶인 코끼리처럼 이미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다. 끊어낼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은 결국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으로 이어졌고, 그 무기력은 몸의 언어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통의 순간조차 '괜찮은 사람의 얼굴'을 연기하며 버텼지만, 몸은 나의 참음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꺾여가던 마음은 몸을 통해 거부 신호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과거 내게 나타났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 만성 통증, 예기치 못한 건강의 붕괴들 모두 ‘이제 멈춰야 한다.’는 몸의 언어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3년은 과거의 인내가 남긴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시간이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몸이 너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그 시간 동안 과거를 찾고, 적고, 곱씹으며 왜곡된 믿음을 찾아내고 하나씩 부수기 시작했다. 감정과 함께 신체 감각을 들여다보고, 몸이 보내는 사소한 신호에도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참음이 미덕이라는 신념 대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멈춰도 괜찮다. 거절해도 괜찮다. 울어도 괜찮다. 견디는 대신 진짜 감정을 표현해도,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먼저 선택해도 괜찮다.”
이제 나는 상처를 덮는 가면을 벗고, 진짜 표정을 허락한다.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하고, 불편한 것은 불편하다고 말하며, 몸이 멈추기 전에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귀 기울여 듣는다. 참는 대신 나를 지키는 선택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견디는 것으로 버텼던 시간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참는 사람’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려 한다. 친구 관계에서도 맞춰주고 참고 견디는 것이 우정이라고 믿었던 나를 이제 완전히 내려놓았다.
내게 지난 3-4년은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혹독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오늘의 평안하고 자유로운 나를 만나게 해 준 귀한 시간이다. 나처럼 무조건 참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온 사람이라면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삶을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느끼고 살아도 된다고. 당신의 감정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더 이상 누군가의 감정과 인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나도, 당신도 자유로워져도 된다. 마음속 사슬을 스스로 끊어내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자.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가는 길이고, 신(어떤 신이든)도 우리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구보다 바라시며 이미 허락하셨다고 믿는다. 이제 당신이 행복해질 차례다. 오늘부터 견디는 대신 당신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선택하는 오늘이 되길.
1.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신체화된 트라우마 반응, 몸의 기억, 감각 회복
2. Seligman, Martin E. P.,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W.H. Freeman, 1975
→ 사용된 개념: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3. Gross, James J., “Emotion Regulation: Affective, Cognitive, and Social Consequences”, Psychophysiology, 39(3), 281-291, 2002
→ 사용된 개념: 정서 억제(Emotional Suppression)와 건강 영향
4. Herman, Judith L.,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1992
→ 사용된 개념: 트라우마의 장기적 영향과 회복 과정
5. Mellody, Pia, 『Facing Codependence』, HarperOne, 2003
→ 사용된 개념: 학습된 무기력에 대한 은유적 설명(길들여진 코끼리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