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 (4) 가면 속에 감춘 마음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성인이 된 후, 나는 점점 더 많은 알레르기를 가지게 되었다. 어릴 적에는 어떤 동물과 함께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성인이 되면서 하나둘씩 반응이 나타났다. 사람보다 동물과 친구가 되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던 나는, 시골에 처음 갔을 때 또래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들어갈 수 없었다.
“너 엄마 없는 애라서, 우리 엄마가 놀지 말래.”
그 말은 놀이의 문을 닫는 열쇠였다. 그 뒤로 나는 염소, 병아리, 닭, 오리, 덫에 걸린 너구리, 토끼, 고양이, 개, 거북이, 햄스터, 그리고 발목까지 오는 얕은 냇가의 작은 물고기들까지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랬다. 모래 위에 앉아 물고기에게 말을 걸던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서 고요하게 숨 쉬고 있다. 어린 시절 내 곁을 지켜준 동물들 덕분에 따뜻한 기억이 많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양이를 입양한 건 내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없던 동물 알레르기가 발현했다. 나는 약을 먹고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랐다. 무엇보다 그 고양이는 동생이 가장 사랑하는 반려 묘였기에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알레르기와 만성 비염 치료를 위해 내과를 오래 다녔다. 주치의 선생님이 병원을 닫을 때까지(은퇴) 10년 가까이 나를 진료해 준 주치의 선생님은 결국 고양이를 다른 집에 보내라고 권했다. 앞으로 증상이 심해질 거라고 했지만, 당시 나는 매일 약을 먹으면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알레르기는 점점 심각해지더니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가 됐다.
음식 알레르기는 2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남편의 여자 친구였던 시절, 시어머니가 만들어 보내준 게 튀김을 먹고 일이 벌어졌다. 먹은 지 몇 분도 안 돼 배가 뒤틀리고, 설사가 쏟아졌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까맣게 꺼졌다.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은 붉게 달아오르고, 두드러기가 온몸에 번졌다. 혀와 얼굴이 부어오르며 호흡이 가빠졌다. 돌이켜보면, 시어머니가 건넨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새로운 알레르기가 생겼다. 이후에도 이전에는 문제없던 새우, 고등어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내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알레르기는 단순한 면역 반응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경계가 무너지고 내 목소리가 사라질 때마다 커졌다. 오래 억눌러온 긴장과 거부감이 신체화(somatization)라는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마음이 싫다고 말하지 못하니, 몸이 알레르기라는 경고로 대신 경계를 세웠다. 내 몸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하지 못한 거절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과 시기에 강하게 드러냈다. 남편이 부축해 주어 주치의 병원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진료 의뢰서를 써 주며 말했다.
“봐요. 이렇게 심각해서 죽을 수도 있는 상태인데도 웃고 있잖아요. 이건 웃을 일이 아니에요. 지금 정말 위험해요. 바로 큰 병원으로 가세요.”
응급 주사를 맞고 큰 병원으로 향하면서, 나는 선생님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힘들고 아플수록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은 나의 투구이자 방패였다. 애착 대상에게서 안정과 위로를 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울음 대신 웃음을 선택했다. 그것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울면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잖아. 참아.’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내 표정 근육과 몸에 습관으로 깊이 각인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툭하고 튀어나와 괜찮은 척 가면을 쓰게 했다. 이 가면은 20대 중반 벽돌 퍽치기 사건으로 살인 미수사건 피해자가 되었을 때도 그대로 발현했다. 이때도 나는 온몸이 피로 젖고, 얼굴과 뒤통수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나는 웃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 모습과 표정을 보고 대단하다고 말했다.
어릴 땐 참음이 살아남는 법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엔 그 참음이 나를 더 깊은 병으로 이끌었다. 억눌린 감정이 지속적인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들이 쌓여 결국 신체화 증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증상을 숨기기 위해 더 강하게 스스로를 억제했고, 가면을 썼다. 그 악순환이 나를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 묶어두었고, 결국 몸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질병을 발현시켰다.
큰 병원에 도착하자 바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입원 진단이 내려졌다. 의료진 분들이 일주일 동안 시간마다 상태를 살펴주셨다. 그 세심한 돌봄과 지켜보는 시선이 이상하게도 내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 어린 시절의 병은 혼자 견디며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들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경험한 병과 병원은 함께 견디는 시간이었다. 그 차이가 내 마음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내가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을 겪을 때와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되었을 때 보인 외부적 반응은 정서 억제(Emotional Suppression)와 표정 관리(Facial Management)가 결합된 방어기제였다. 위기 상황에서 웃는 표정은 실제 감정과 외부 표현을 분리해 안전해 보이려는 무의식적 생존 전략이었다. 상황과 맞지 않는 웃음 뒤에는 ‘아파도 참아야 한다.’는 학습과 ‘힘들다고 드러내면 더 위험해진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느낀 안정감은, 아동기에는 경험하지 못한 안전기지(Safe Haven)였다고 생각한다. 따뜻한 돌봄과 세심한 보호를 속에서 ‘견디는 대신 의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다. 이후 이 기억들이 내가 안전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버팀은 고립을 만들지만, 의지는 연결을 만든다는 차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가능성을 믿기 시작했다.
혹시 당신도 아픈 순간에 웃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웃음이 당신의 생존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안전하게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혹시 나처럼 당신의 몸이 이유 없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 경고를 무시하지 말고 마음과 몸이 말하는 말들을 적극적으로 들어봐야 한다. 마음의 메시지를 깊이 받아들이고, 보듬는 과정들이 회복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1. Gross, James J., Emotion Regulation: Conceptual and Empirical Foundations, Guilford Press, 2014
→ 사용된 개념: 정서 억제(Emotional Suppression) — 부정적 감정의 외현 표현 억제 전략, 장기적 심리·신체 영향, 감정조절이론
2. Ekman, Paul, Telling Lies: Clues to Deceit in the Marketplace, Politics, and Marriage, W. W. Norton, 2009
→ 사용된 개념: 표정 관리(Facial Management) — 사회적 상황에서 감정을 숨기거나 위장하는 표정 조절, 비언어적 의사소통 이론
3. Bowlby, John,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1988
→ 사용된 개념: 안전기지(Safe Haven) —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과 회복 기반, 애착이론
4.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신체에 각인된 트라우마 반응, 경계 침범에 대한 신체 반응, 트라우마 심리학
5. Keltner, Dacher & Lerner, Jennifer S., “Emotion,” Annual Review of Psychology, Vol. 61, 2010
→ 사용된 개념: 위기 상황에서의 감정 표현·억제 메커니즘, 사회·인지심리학
6. Lipowski, Z. J., “Somatization: The Concept and Its Clinical Application,”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Vol. 145(11), 1988
→ 사용된 개념: 신체화(Somatization) — 심리적 갈등과 감정 억압이 신체 증상으로 전환되는 과정
7. Boundary Theory (Ashforth, B. E., Kreiner, G. E., & Fugate, M.), “All in a Day’s Work: Boundaries and Micro Role Transitions,”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Vol. 25(3), 2000
→ 사용된 개념: 경계 침범(boundary violation)과 심리·신체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