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2부 8. (3)

2부 8.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라는 신념 부수기 (3)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잠시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8.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라는 신념 부수기


(1) 상처의 대물림

(2) 양가적인 감정 안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3) 아직도 매일 꿈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언니에게

(4) 나는 더 이상 내가 나인 것이 아프지 않아




AI 4컷 만화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잠시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8.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라는 신념 부수기


(3) 아직도 매일 꿈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언니에게

구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처음 탈출한 건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빚 독촉 때문이었다. 시골 아버지는 해왔던 사업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사업의 실패는 함께 사업체를 꾸려 나갔던 가족 구성원들이 가난의 구렁텅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사업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운용했기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쯤에는 급하게 필요한 돈들이 많았다. 그래서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시골 아버지는 살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급한 불을 껐다. 그러다 더 이상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시골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게 됐다. 그때부터 시골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걸어 시골집을 지켜야 한다며 사채 빚을 해달라 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부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버지를 조종하는 친척이 있었다. 키워줬으니 그만큼 내놓는 건 당연하다며 아버지를 압박했다. 아버지는 그 말에 힘입어 “드디어 키워 준 값을 갚을 때가 되었다.”며 매일 열 통, 스무 통씩 전화를 해오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들어줄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내 안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끊임없이 자극되었다.


아버지의 매일 같은 설득과 협박에 이기지 못해 결국 사채 사무실에 갔다. 직원은 나를 앞에 두고 아직 미성년자라 400만 원까지 가능하지만, 두 달 뒤 성년(만 19세)이 되면 4천만 원 이상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친척이 입맛을 다셨다. 400만 원을 누구 코에 붙이냐며 두 달 후 다시 오기로 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막아 달라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 한마디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그 전화 후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라고 불렀던 사람들과 완벽히 단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은 빚이 생기지 않도록 완벽히 지켜내셨다.


가족으로부터의 첫 번째 탈출은 내가 살인사건 피해자가 된 스무 살 중반 무렵까지 이어졌다. 구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오더라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굳이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첫 번째 가족 탈출 후 나에겐 ‘이기적인 년’, ‘못돼 처먹은 년’, ‘배은망덕한 년’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안에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 그 신념이 나를 묶어두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라는 신념이 나를 더 깊이 옭아맸다.

가족들로부터 탈출한 후 적극적으로 내 삶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그때 은인이 되어주었던 친구와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오늘 이렇게 평안한 삶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했었다. 그때 내게 은인이 되어준 친구가 진짜 가난을 벗어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학교 수업과 성적에 본격적으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절학기까지 들으면서 부족한 학점을 채워나가며 꿈을 키워갔다. 보잘것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나는 어린 시절처럼 새벽 예배에 매일 나가면서 하나님께 진짜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2년 넘게 묻고 또 묻는 기도를 했다. 작은 성취가 쌓일수록 '선택받기 위해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조금씩 깎여 나갔다. 그것은 '나는 내 삶을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 선택받기 위해 삶을 버릴 필요 없다.'는 희미한 가능성의 빛이 되어주었다.


국가고시를 보겠다며 부족한 학점을 채우기 위해 계절학기를 듣던 때였다. 다음 날이 계절학기 시험을 봐야 했던 날이라 오늘까지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친척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는 내가 가장 힘들었던 고등학생 시절 유일하게 나와 동생을 찾아와 겨울옷을 사주고, 따뜻한 밥을 먹여줬던 사람이었다. 그때 언니가 동생에게 사줬던 노란색 솜잠바 덕분에 동생은 가족들로부터 버려졌던 방에서 2년의 겨울을 얼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따뜻한 기숙사 방을 굳이 놔두고, 주말이면 동생이 혼자 있는 방에 갔다. 얼마나 추운 겨울을 보냈던지 여전히 여름이 되면 습관처럼 겨울 옷을 미리 구입한다. 그때를 떠올리면 좀 더 동생에게 따뜻한 언니가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여전히 아쉽고 아프다.


동생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혼자 살고 있던 상하방에 언니가 아들을 안고 찾아왔다. 그래서 언니의 만남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언니가 사준 따뜻한 점퍼를 입고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있어, 그날의 기억과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사진 속 나는 여전히 멈춰 있고,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고스란히 안은 채 살아 있다. 그때 언니는 가난한 시댁 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장애가 있는 시누이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쌍하다며 나와 동생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나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가족’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언니가 만나러 오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다음 날이 시험이라 다음에 오면 안 되겠냐고 묻자 언니는 잠깐만 얼굴만 보러 오겠다며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잘 보고 싶은 시험이었기 때문에 책과 노트를 펴 놓고 답을 적고, 외우면서 언니를 기다렸다. 1시간 조금 넘자 언니가 도착했다. 그때 내가 살던 상하방은 화장실이 외부에 있고, 한 공간에 씻는 곳과 부엌이 함께 있었다. 한쪽 벽조차 없어 기름보일러 통으로 대충 가려놓은 열악한 방이었다. 좋은 것을 내가 가질 자격이 없다고 믿었던 때라, 안전하고 좋은 방으로 이사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난은 단지 현실의 조건이 아니라 마음에 각인된 신념이었다. 그 신념은 대물림되듯 이어져, 불편함 속에서도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온 언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문턱은 계단 세 칸은 있어야 할 높이였지만 계단조차 없었기에, 아이를 안은 언니는 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방에 들어온 언니는 침대 위에 아이를 내려놓고, 아장아장 걷는 남자아이에게 앉아 있으라고 말한 뒤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친척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거든. 나도 어쩌다 보니 거기에 있었어. 그리고 그날 아빠가 얼마나 악마 같은 사람인지 알게 됐어. 그래서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야. 밥도 같이 먹고.."


언니의 이야기는 봇물이 터지듯 쏟아졌다. 나는 책을 눈앞에 두고 언니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열린 귀를 닫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이제 걷기를 시작한 아이는 침대 위에서 방방 뛰고, 안고 왔던 아이도 침대 위에서 구르며 까르르 웃었다.


"아빠가 말하는데.. 네가 시골에 처음 왔을 때, 너를 죽이고 싶어서 일주일 넘게 산 쪽에 있는 케이지(강아지 등을 가둬두는 상자 모양의 장)에 가둬 놨대. 물도, 밥도 주지 않고. 그런데 네가 죽지 않아서 그냥 살게 두었다고... 다시 그때가 오면 반드시 널 죽일 거라고 말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거야. 너무 화가 나고 충격이었어. 아빠가 얼마나 악마 같은지... 미안해.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려고 왔어. 밥 먹으러 가자."


그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가끔 꿈속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산 아래, 내가 어딘가에 갇혀 있고 누군가 불빛을 비추며 나를 들여다보는 꿈. 꿈 속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언니.. 나.. 내일이 시험이라 공부해야 돼. 잠깐 가운데 문 닫고 공부 좀 할게. "


"응 천천히 해. 기다릴게."


내가 살던 집은 가운데 여닫이 나무문이 있었다. 그 문을 닫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이어갔다. 눈물이 쏟아져 가슴이 조였지만 시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스스로를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가량 언니와 아이들을 문 옆방에 둔 채 공부를 하고, 문을 열었다.


"언니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먹자. 내일 시험 있는 거 진짜 잘 봐야 돼. 기대하시는 교수님이 계셔서 정말 잘 봐야 해."

"그래.. 그러면 시험 내일 보고 나서 다시 만나자. 꼭."


시험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언니를 대문에서 배웅했다. 그날이 마지막 만남인 줄 모르고 나는 언니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한참 울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시험만은 오기를 부려서라도 잘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날 밤을 꼬박 새워 암기해야 할 것들을 전부 외웠다. 그리고 다음 날 시험을 마치고 나자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나 나는 이후 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구 가족들에게서 첫 번째 탈출을 한 후 다시 돌아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대 중반 무렵 벽돌 퍽치기 살인 사건 피해자가 되면서 경찰서에서 구 가족들에게 연락이 갔다. 그리고 거의 3년 만에 시골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이 날 아버지와 정말 많은 대화를 했다. 시골에 가면 어머니가 소금을 뿌리고 내쫓은 일 등 아버지는 내 이야기에 왜 그때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 때문에 싸우게 될까 봐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내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우선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타인을 위한다며 아주 쉽게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선택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선택받지 못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날 아버지께 친척 언니가 내게 해줬던 말들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보육시설에서 나와 시골에 동생 대신 가게 됐을 때 나는 호적이 없었다. 그때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학교 갈 즈음이 되어서야 호적에 올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언니 말대로 케이지(철장으로 만든 작은 감옥) 안에서 죽었다면 존재조차 모를 아이가 됐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차마 그때 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셨냐는 말을 끝내하지 못했다. 권력형 구조가 명확한 가족 내에서는 누군가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희생자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이 그 대상이 되고, 그 희생자를 중심으로 가족의 결속력이 더욱 단단해진다. 심리학자 머리 보웬이 말한 ‘희생양 삼각화(보웬, 가족 삼각관계 내에서 특정 대상에게 책임이 집중되는 현상)'의 구조로 이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가족 결속의 비용을 누군가는 치러야 하고, 가장 약한 이가 그 자리를 맡는다. 그 구조 안에서 나는 끝없이 속삭였다.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 어쩌면 이 핵심 신념은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항상 동시에 존재했다. 삶이 깊게 다가오면 삶이 무거웠고, 죽음이 목 끝까지 다가올수록 더 살고 싶어졌다. 살인 사건 피해자가 된 이후에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그 돈으로 대학원 입시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구 가족들과 끊어졌던 만남이 천천히 시작됐다. 시골 아버지는 내가 친근하게 대할수록 어머니와 더 가까워지길 원하셨다. 그리고 시골 아버지가 어머니와 내가 가까워지길 원할수록 건너뛰어버린 감정과 시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맞춤식 유교주의와 기독교의 효 사상을 왜곡시켜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때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나만 참으면 된다면서 내 감정과 욕구를 완벽하게 무의식에 묻어버렸다. 시골 아버지와 만남을 천천히 시작했지만 다른 친척들과 동생들을 만나는 건 준비되지 않아 미루고 또 미뤘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가 어떤 것에서든지 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친척 언니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장례식장에서였다.


"자꾸만 죽으려고 해서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감시하고 챙겼는데.. 잠깐 외출한 사이에 그렇게 됐다네. 장례식장 OO야. 마지막 가는 길 인사하러 오렴."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언젠가 꼭 만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만남을 미뤘는데 과거의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니. 정신없이 옷을 입고 남편(그때는 남자친구였음)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그날 인연을 끊었던 모든 친척들과 한꺼번에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붉은 눈초리들을 비춰냈다. 따가운 눈초리를 마주하면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언니 영정 사진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울었다. 언니 영정 사진 왼쪽에 앉아 있던 친척은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이제 와서 어쩌라고.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죽은 거야."


그 말이 얼마나 날카롭고 무섭던지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내 왼편에 서 있던 시골 아버지는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스스로 발등을 찍은 거야."


겁먹은 나를 달래려고 아버지도 모르게 뱉은 말을 다른 친척이 들었는지 나중에 그대로 소리 지른 친척에게 전달했다. 그 바람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부터 매일같이 꿈속에서 언니를 만났다. 살아있을 때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살아 내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언니를 보면서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언니를 위해 한 번도 기도하지 못했던 것, 언니가 전화를 했을 때 받지 않았던 것, 어쩌면 내가 언니를 만났더라면 언니가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게 스며 왔다. 꿈은 내 무의식이 만든 부고의 연습이자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 내가 더 잘했어야 한다는 신념의 또 다른 재연이었다.


친척들이 말하길 언니는 죽기 전까지 “이 집에 귀신이 붙었어. 이 집을 살리려면 누군가 죽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가야 해. 내가 가야 해.”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너무 착했기 때문에 누군가 죽어서 이 집을 살릴 수 있다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언니의 상처가 매우 깊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언니를 현실감이 흔들릴 만큼 아프게 만들었다. 언니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나서 나도 그랬지만, 언니의 마음도 산산이 부서졌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너무 나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죄책감과 죄의식이 매일같이 언니를 꿈속에서 만나도록 이끌었다. 언니와 미처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고리가 무의식에 남아, 끊임없이 꿈에서 언니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복 재생됐다. 그리고 언니의 죽음 앞에서 나의 초자아는 지속적으로 언니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속삭였다. 오늘이 되어서야 오래된 고통이 내 안에서 반복되풀이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무게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때 언니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언니 탓이 아니라고 말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친척 언니는 그날 밥을 먹으면서 자신 안에 들어온 죄책감과 죄의식을 씻어내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시부모님과 갈등 후(일방적으로 반복적으로 겪은 정신적·언어적 폭력이었다) 그분들과 연락을 단절하고 난 어느 날, 시누이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언니가 말했다.


“네가 너무 아팠겠다. 내가 더 많이 신경 쓸걸. 내가 너무 몰랐어. 너무 미안해.”


그 순간 머릿속에 예전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딱 잘라 말했다. 시누이 언니는 자주 시부모님의 행동과 말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게 왜 언니 탓이에요.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언니는 그냥 언니 인생 잘 살면 돼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면 되니까. 괜찮아. 내 감정과 인생을 언니가 책임지려고 하지 마요.”


나와 시부모님 사이의 불화까지 언니가 책임지려 하다니. 그때부터 나는 시누이로부터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친척 언니를 봐왔던 건 아니었는지라는 생각을 했다. 시누이 언니는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때부터 나와 단짝처럼 지내던 언니였다. 남편과 연애를 하는 내내 시누이 언니가 힘들어하고 아플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친척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시누이 언니에게 겹쳐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적으로 공의존 패턴은 죄책감을 배경으로 강화된다. 상대의 고통을 빌려 내 상처를 씻으려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관계의 자율성을 해친다. 나는 시누이 언니에게 과도하게 매달리며, 사실은 친척 언니에게 하지 못했던 보살핌을 재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시누이 언니와 단짝처럼 지낼 때, 나는 내가 신고 싶어서 산 신발이나 옷, 화장품을 제일 먼저 시누이 언니에게 선물했다. 좋은 걸 내가 먼저 사용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시누이 언니에게 선물하면 이상하리만큼 과하게 돈을 써도 죄책감이 덜어졌고 마음이 편했다. 오늘이 되어서야 과거의 행동들이 내 마음에 깊게 배인 죄책감과 죄의식을 씻어내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는지라는 생각이 든다.


시누이 언니가 자신이 정한(시부모님이 ‘마지막’이라고 한) 마지막 국가고시를 보러 가던 때가 생각난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언니는 타 지역으로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부모님을 대동하고 나섰다. 언니의 부모님은(내겐 시부모님) 언니가 걱정된다며 굳이 같은 방을 잡아 언니를 돌본다는 이유로 시험을 따라나섰다. 문제는, 몸이 약한 시어머님이 가는 내내 그리고 오는 내내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냈다는 사실이다. 언니와 오랫동안 지내왔기 때문에 언니의 성격이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알고 있다. 남편과 비슷한 예민함을 가진 그녀가 인생 일대 마지막 시험을 보러 가면서까지 예민성을 자극할 부모님을 대동하고 시험을 보러 가는 것이 걱정이 됐다. 이때 나는 차라리 내가 갈까라는 생각을 했다.


시험장에 가는 내내 어머니는 몸이 아프셨고(허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몸이 가렵다, 배가 아프다 등), 아픈 어머니를 언니와 시아버지께서 절절매며 걱정하고 돌봤다고 했다. 그리고 시험장에 들어간 언니는 긴장을 너무 많이 하고 잘 봐야 한다는 부담감에, 연습장에 서술형 답안을 다 써놓고도 시간이 부족해 다 쓰지 못하고 나왔다고 했다. 시험 결과가 난 날 나는 시부모님 댁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기억한다. 언니는 언니 방 안에서 울고 있고, 시아버님과 시어머니는 그들 나름대로 오랫동안 언니를 도와줬던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 엄청난 분노를 쏟아냈다. 모든 분노와 결핍들이 쏟아진 날이었다. 아주 안타깝게 그때 시부모님 댁에 친부를 피해 피신해 있던 상황이라 모든 광경을 목격했다. 그 상황에서 언니가 혹여 창밖으로 뛰어내리면 어쩌지라는 극심한 두려움이 들어왔다. 정말 험악하고 무서운 분위기가 지속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언니 옆에 찰싹 달라붙어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본격적으로 이때부터 언니의 삶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때 나는 마트에서 도라지 음료만 봐도 “언니가 목이 안 좋던데. 필요하겠다.”라며 나보다 언니를 신경 썼다. 단적인 예지만, 정말 내 머릿속에 온통 언니 생각뿐이었다. 다시는 친척 언니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 그 안에 있었다. 그 결과 내 인생을 스스로 또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고, 상대 역시 잘못된 의존을 하도록 이끌었다. 지금에야 깨달은 거지만, 이때 나는 과거부터 앓고 있던 공의존적 패턴이 더 깊어졌다. 시누이 언니에게 했던 과도한 집착과 걱정은 친척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들이 겹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처럼 행동하지 않으려고, 오늘이 되어서야 노력하며 산다. 이 외에도 친척 언니와 남은 감정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의 삶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과거에 내가 했어야 할,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것들에 책임을 느끼면서 타인들을 통해 재연했다. 그러면서 타인이 거쳐야 할 여정들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리만큼 간섭했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나는 ‘막았어야 했던 일들’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며 타인의 여정을 과도하게 붙들었다. 오늘에서야 그게 간섭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간섭이 타인의 자율성을 해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타인의 몫을 타인에게 돌려준다. 오히려 내 행동이 타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헤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시험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전문성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활용해 돕지 않아야 할 타인을 돕느라 내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낭비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받지 못한 것이 내 탓이라는 신념은 선택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상의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유리병에 큰 돌을 채워야 할 공간에 자잘한 모래들을 가득 채웠다. 시간과 에너지를 ‘큰 돌’(나의 장기 목표)부터 담아야 하는데, 나는 죄책감 때문에 먼저 ‘모래’(타인의 일과 급한 부탁)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살아야 할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친척 언니와의 작은 추억들을 회상했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꿈속에서 친척 언니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어제 꿈속에서 언니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봤다.


아주 오랫동안 언니를 위해 단 한 번도 기도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언니의 연락을 피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죄책감으로 가지며 살았다. 언니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이제 10년도 훨씬 넘었지만, 그 시간들 동안 내 꿈속에서 살아 숨 쉬고 내 손을 잡아주던 언니가 있었다. 덕분에 꿈에서 깰 때마다 더 깊게 죄의식에 잠겼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언니와의 이야기를 통해 내게 더 이상 어두운 감정에 갇히지 말라고, 끝없이 행복한 이야기들만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가 선택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라고. 나쁜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말해줬던 친척 언니를 오늘도 기억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언니에게 미안하다. 이제 나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책임지지 않아야 할 일들을 책임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글을 마친다. 오늘 나는 새로운 신념을 세운다. 오래된 신념은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었지만, 이제 나는 타인의 몫을 타인에게 돌려주고, 내 삶을 내 중심에 세운다.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었던 언니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랑 많고, 마음이 따뜻했던 언니가 오늘도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지난밤에도 나를 찾아와 준 언니를 살아 있을 때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나에게서 언니를 보내주려고 한다.


안녕, 언니. 정말 고맙고 많이 사랑했어. 사랑해. 정말.


보내는 일은 잊는 일이 아니다. 언니의 사랑은 내 안에 두고, 죄책감만 문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나는 오늘 다시 선언한다.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를 위한 선택할 것이다.



오늘, 나는 다시 선언한다.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다.
타인의 몫은 타인에게 돌려준다.
죄책감은 문밖으로, 사랑은 내 안으로 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를 선택한다.



국내 도움처 : 국번없이 1393(자살예방상담전화)



2부 8. (3) 참고 자료


1. Bowen, Murray,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1978

→ 사용된 개념: 삼각화(희생양 구조), 가족 불안, 역할 고착


2.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사용된 개념: 애착 손상, 상실 반응, 안전기지


3. Herman, Judith L.,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1992
→ 사용된 개념: 외상 후 회복 단계, 애도 지연과 통합


4.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외상 기억의 재경험(꿈·신체화), 신경생물학적 통합


5. Worden, J. William, Grief Counseling and Grief Therapy, Springer Publishing, 2009
→ 사용된 개념: 애도의 과업(관계의 내면 재구성, 지속적 유대/continued bonds)


6. Beck, Aaron T., Cognitive Therapy and the Emotional Disorders, Penguin, 1976
→ 사용된 개념: 핵심 신념(core belief) 재구성, 인지적 재평가


7.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죄책감 기반 자기 억압, 보상적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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