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2부 9. (2) 너를

2부. 9. (2) 너를 통해 나를 봤다

by 김희경 작가




붉은손톱.JPG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저자의 주관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9. 나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볼 자격이 없다.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은 이기적이다.라는 신념 부수기


9. 나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볼 자격이 없다.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은 이기적이다.


(1) 붉은 손톱

(2) 너를 통해 나를 봤다

(3) 타인의 과제를 타인에게 돌려주는 연습

(4)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이 타인을 돕는 것이다




나를봤다.JPG

AI 네컷만화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저자의 주관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9. 나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볼 자격이 없다.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은 이기적이다.라는 신념 부수기



(2) 너를 통해 나를 봤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끝나는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예전의 나에게 이 말이 어찌나 아프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끝난다는 건 곧 또 버려진다는 거라고 받아들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이 말이 조금 편안하다. 모든 관계를 영원히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내가 떠나보내도 되는 것들이 있구나, 그것이 삶의 지혜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걸 처음으로 몸으로 배우게 해 준 사람이 있다. 한때는 가족이라고까지 믿었고, 결국은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 이 글에서는 편하게 ‘A 언니’라고 부르겠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구하려 했고, 끝까지 붙들었다. 그 관계가 무너진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버려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나를 살리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걸.



내면세계를 외면한 사람일수록 외면 세계에서 노예가 된다고 했던가. 돌아보면 나는 오래도록 내 안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만 매달려 있었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그 당시엔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계속 외부의 어려운 과제를 스스로에게 안겼다. 누군가를 돕고, 해결해 주고, 대신 싸우고, 끝없이 감당하는 일들을 통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쓸모 있어.'라고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궁금했다. 왜 항상 같은(혹은 비슷한) 선택을 반복했을까. 왜 나를 위해 항변하지 않았을까. 그 질문들을 품은 채 긴 시간을 보냈다.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그 질문에 답할 단어들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 이 글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A 언니와의 인연은 한 마켓에서 소비자와 판매자로서 시작됐다. 그녀는 내가 아는 예수쟁이 중 가장 신실했고, 아름답고, 바른 사람이었다. 나도 예수쟁이다. 다만, 다소 믿음이 부족한 예수쟁이일 뿐이다. 언니의 가게에 다녀오면 이상하게 불끈불끈, 나도 모르는 힘이 솟아오르곤 했다. 가게 한쪽에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놓여 있었는데, 그때 빌려온 그 책이 지금도 내 서재 한편에 꽂혀 있다. 그 책이 딱 언니의 영혼을 닮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녀는 맑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오고 있다고 했다. 결혼 전에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라고 하던 남자가, 결혼 후에는 “이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라고 했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언니는 어린 자녀 둘을 품고, 일하며,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그녀에게서 내 엄마의 그림자를 봤다. 언니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녀의 삶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엄마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마음이 쓰였는지, 왜 그렇게 사랑했는지, 그땐 몰랐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언니에게 내 엄마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따뜻함과 연민 속에는 ‘엄마를 구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언니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큰 사건 이후였다.



20대 중반 무렵, 나는 ‘퍽치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사고라는 건 늘 그렇다. 내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예고 없이, 엄청난 크기와 압도력으로 삶을 덮친다. 그리고 사고 피해자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 선택지만 남는다. 그 자리에서 끝내(나) 거나, 살아남거나. 그때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매일 새벽에는 새벽 예배에 나갔다. 주말에는 하루, 이틀씩 시간을 내어 아동 보육 시설에서 온종일 봉사활동을 했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주변 사람들의 불행에 온통 관여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친구가 어떤 신발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신발이 내 발에 있다는 이유로 길을 가다 그대로 벗어줄 정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단순히 ‘착함’이 아니었다. 그건 나를 증명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만 살아있다고 느꼈고, 타인을 도우며 나의 결핍을 메꾸려 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자기 소멸적 이타성’이라고 부른다. 내면의 불안을 외부의 봉사로 덮어두려 했던 시기였다.



사고는 친동생의 병문안을 다녀온 밤에 일어났다. 밤에 병원에 간 이유는 매일 같은 시간에 대학원 진학을 위한 공부 스터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유일하게 시간이 났고, 밤 9시쯤 병실을 찾았다(학교에서 병원까지 걷는데만 40분을 사용했다.). 나는 동생에게 새벽 예배에 갈 시간까지만(새벽 4시) 머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동생이 지나치게 화를 냈다.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고 했다. 집에 가서 자라는 말에 쫓기듯 병실을 나왔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오라고 한 걸까.’ 병원 문을 나서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시간이 밤 10시 반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병원 로비에 앉아 있다가 새벽 예배에 갔어도 됐을 것이다. 그날 밤 굳이 서운함에 눈물을 쏟으며, 처량한 기분에 젖어 밤거리를 걸 필요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일부러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눈앞에 선 택시를 보내고, 혼자 걸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쓰리고 그렇게 안일한 선택을 한 내가 안타깝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자기 처벌적 선택(self-punishing choice)’이라고 부른다.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스스로를 벌주는 형태로 표출될 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위험을 향해 걸어가기도 한다.



내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이른 아침이든, 해가 질 무렵이든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건 사고의 영향이다. 사고 후 나는 낮이든 밤이든 외출을 삼가게 됐고,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잘 나누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그 사고는 내게 가장 큰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사고를 생각할 때면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사고 당시 나는 후두부와 얼굴 부분에 수차례 가격을 당했다. 내 기억으로는 십여 대가 넘었지만, 경찰 기록에는 몇 차례라고만 적혀 있다. 수술을 받은 부위만 해도 많다. 뒤통수의 두피가 길게 찢어지고, 얼굴 전면이 쓸린 데다, 이마 세 군데가 움푹 파이고, 앞니 두 개가 덜렁거리고, 아랫니 두 개가 부러졌고, 입 안쪽이 찢어졌다. 이마 윗부분에는 수술 후 누운 십자가 모양 형태로 약 15cm 정도의 흉이 생겼고, 한쪽 눈 밑에도 0.5cm 정도의 칼자국 같은 흐린 흉터가 남았다. 한두 대 맞아서는 그런 수술을 받을 수 없다. 두피의 절개된 부분을 꿰매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냈고, 완전히 깨져버린 안경 너머의 눈알이 터진 것 같다며 안과 선생님들이 나오셔서 한참 들여다보셨다. 그리고 두피와 이마 사이에 움푹 들어간 세 군데를 끌어올린 후, 약 15cm가량 절개된 부위를 수술하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학병원 성형외과에서 얼굴 전면에 쓸리고 작게 찢어진 부위에 대한 처치를 받았다. 의사들은 그때 얼굴 전면을 긁어내지 않았다면, 아스팔트에 쓸린 듯한 얼굴이 될 거라고 했다. 당시 사고로 입술이 짓이겨져 지금도 그 부분의 입술선이 흐리고, 입 안쪽 윗부분이 길게 찢어져 구강외과에서 꿰매는 수술을 받았고 흉조직이 지금도 남아있다. 앞니 두 개는 덜렁거려서 곧 빠질 것 같아 일반 치과에 가서 처치를 받았다. 입원 후에는 아랫니 두 개를 보수했다. 하나는 완전히 절단되어 기둥을 세워 씌웠고, 하나의 절반은 보수재로 채웠다. 그러니 경찰 기록 속 ‘한두 차례’라는 표현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고 당시 온 얼굴과 머리에 벽돌로 마사지를 받았는데, 나처럼 다친 사람이 얼굴이 돌아오고, 뇌와 정신이 멀쩡한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했다. 나는 사고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의 도우심을 가득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고당시 나는 기지를 발휘해 “시키는 거 다 할 테니, 말씀만 해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가해자의 휘두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죽는 건가.’ 싶어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나님, 제가 죽나요?'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툭 하고 튕겨져 세워졌다. 그때 나도 놀랐지만, 가해자도 놀랐을 것이다. 피죽이 되도록 누워 맞던 상대가 오뚝이처럼 일어섰으니 말이다. 일어선 순간 한쪽 신발이 없는 상태에서 근처 도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고 지나가던 차를 잡아 세웠다.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의 나는 이성과 감정을 초월한 상태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생존자 반응(survivor’s response)’이라고 부른다. 극도의 공포와 위협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과 정신을 분리시키는 것. 그날의 나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뛰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고 후 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응급실에서 12시간 대기했지만), 흉이 다소 남았지만(화장과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얼굴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짓이겨진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조차도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얼굴을 크게 다친 덕분에, 이후 외모에 대한 강박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나는 외모가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멍청한 생각을 가끔 했다. 이런 사고를 겪고도 얼굴 대부분이 돌아왔으니, 그때 나는 ‘평생 모은 운을 다 썼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사했다. 퍽치기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가 되면서 여러 언론 매체에 출연(모자이크 처리) 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사고 직후 붕대를 감은 내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얼굴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당시 대학원 진학을 지도해 주시던 교수님이 병원에 오셨는데, 내 모습을 보시고 복도에서 눈물을 쏟으셨다.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가끔 거울을 볼 때 그때가 떠오르면 외모가 이렇게까지 회복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사고를 통해 외모에 대한 강박까지 내려놓았으니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때 나는 많은 분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 사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그 지역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대. 뉴스 봤어? 피해자가 벽돌로 무지하게 맞아서 병원에 실려갔다던데. 세상이 너무 위험해. 그 사람 죽었을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나야.”


전화기 너머의 정적이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동생은 말을 잇지 못했고, 오히려 내가 더 명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충격 후 각성 상태(post-traumatic arousal)’였던 것 같다. 큰 사고를 겪은 직후, 살아남기 위한 신체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감정 대신 생존 본능이 앞서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명랑했다. 이후 병원에 찾아온 사람들은 내 처참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동안 해가 지는 오후만 되어도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에 그분들의 이름을 공책에 한 분 한 분 적어두었다. 그리고 몸이 조금 회복되자, 직접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A 언니 역시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 중 한 분이었다. 내가 병원비가 없을까 봐 걱정하며 병원비를 도와줄 분을 소개해주셨고, 퇴원 후에는 사회단체를 통해 김치도 보내주셨다. 사실 그때 언니가 아는 분을 통해 받은 건지, 범죄피해자구조센터를 통해 받은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 시절 주변 분들이 내게 주신 돈을 모아 이후 대학원 진학을 다시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생에서 ‘건질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큰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내 삶에 우연히 찾아온 그 사고 덕분에 나는 자를 것과 남길 것을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오시는 분들마다 5만 원, 10만 원씩 봉투를 건네며 “기도하겠다.”라고 말하던 그 손길들이 여전히 감사하다. 내 옆 침대의 교통사고 환자였던 아주머니조차 5만 원과 손 편지를 흰 봉투에 넣어 주셨다.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도움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이, 사실은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쩌면 그분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눈, 코, 입 하나 잃지 않고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한동안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그럼에도 새벽예배는 갔다. 새벽예배에 데려다주신 장로님이 계셨다. 감사하다.). 아직도 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네 개 관할서의 경찰관들이 동시에 수사에 들어갔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언론과 지역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은 어쩌면 젊은 여성을 노린 인신매매(혹은 장기매매)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얼굴만 집중적으로 다쳤고 다른 장기는 완벽히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안, 석 달 가까이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사람이(동일한)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눈을 마주쳤다. 마트, 학교 앞 횡단보도, 교내까지. 다섯 번 넘게 마주치자 나는 경찰에 연락해 신원조회를 요청했다. 강력부 형사님이 조사한 결과, 그 상대는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건이 발생한 시각, 사거리 건너편에서 나를 오랫동안 주시하던 사람이 있었다. 형사님은 그 사람이 맞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사고 당시 보았던 그 사람이 자꾸 내 주변에 나타난다고 말씀드리자 강력부 형사님이 직접 조사를 해 주셨다. 조사 결과, 그 사람은 실제로 그 장소에 있었지만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KTX를 타고 서울로 떠나 혐의를 벗었다고 했다. 게다가 외국 국적의 학생이라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셨다. 그 후부터 매일 발신자 제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또다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형사님은 우리나라 주요 통신 3사와 작은 통신사들에 조회를 요청했지만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느 통신사에도 속하지 않은, 이른바 대포폰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통화 기록을 남기고, 녹음만 계속했다. 전화는 매일 걸려왔고 그 소리는 내 안의 두려움과 고통을 매일 자극했다. 전화통화 너머로 들리는 규칙적인 쇠파이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면 몸이 저절로 떨렸다. 지금 돌아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사고 현장 근처에서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외국인 학생, 열세 개의 CCTV에 잡힌 흐릿한 범인의 영상, 사고 직후 누군가와 통화하던 모습. 범인이 통화하며 그 일대를 30여 분간 걷는 동안 그 시간대의 그 근처 기지국에서 통화한 사람만 2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경찰분들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매일 발신자 제한 표시로 걸려오는 전화, 어디서나 마주치는 같은 사람의 얼굴,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 심지어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로는 그 사고 당시 달려 있던 CCTV는 원래 고화질로 설치되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 범인을 찍었던 주변의 저화질 CCTV는 모두 고화질로 교체되었다는 말을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일들이 모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였을까. 그 의문은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 사고 이후 한동안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복용했다. 흩어지는 마음과 의지를 붙잡고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때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몇 달을 그렇게 고통 속에서 버티다 대학원 준비를 위해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지나간 위험’을 몸으로 계속 살아내고 있었다. 눈으로 본 세상은 끝났지만, 내 신경계는 아직 그날의 밤에 머물러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외상 후 과각성(Post-traumatic hypervigilance)이라 한다.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감지하려는 몸의 자동 반응. 두려움은 나를 갉아먹었지만, 나는 더 이상 ‘완전히 안전한 곳’이라는 걸 믿지 못하게 되었다. 몸은 늘 긴장했고, 밤길은 공포였으며, 새로운 사람은 잠재적 위험 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더 깊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돕고 붙잡아야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내 인생에 등장한 사람이 A 언니였다.



몸과 마음이 조금 안정된 뒤, 나는 A 언니에게 선물과 감사 편지를 들고 언니의 가게를 찾았다. 언니가 늘 내어주던 따뜻한 메밀차를 함께 마셨다. 그날 대화 중에 우연히 언니의 큰딸 이야기를 들었다. 전 남편에게서 아무런 양육비도 받지 못해 아이들의 공부를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 게 속상하다고 했다. 혼자 두 딸을 키우는 삶이 팍팍했고, 가끔 전 남편이 찾아와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보복이 두려워 경찰에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서러운 일을 많이 겪는다고 했다. 그중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들려주셨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성적도 썩 좋지 않아 친구들로부터 외면받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같은 반 친구를 대형마트에서 언니와 함께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일부러 어깨로 치고 지나가며 얼굴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지나가버렸다고 했다(일명 ‘어깨빵’). 자기 때문에 딸까지 무시받고 사는 것 같다며 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나는 마침 대학원 면접 합격 통지를 받은 때였다. 기쁜 마음도 잠시, 언니의 이야기가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언니에게 말했다.


“중·고등학생은 성적만 좋아도 친구들에게 무시받지 않아요. 딱 석 달만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리고 그 말이 내 삶의 또 다른 장이 열리는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석 달 동안 무료로 아이의 공부를 봐주었다. 언니는 매주 아이를 데리고 내가 사는 원룸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의 둘째 아이도 데려와 달라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두 아이와 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딱 3개월만 하겠다고 했지만, 언니의 부탁으로 매달 20만 원을 받고 아이들의 공부를 계속 봐주게 됐다. 언니는 “월세라도 내주고 싶다.”며 손에 봉투를 쥐여주었다. 그 돈을 받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무언가를 받고 돕는 건 진정한 도움이 아니라는 생각에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죄의식이 뒤섞였다. 매 끼마다 가장 싼 봉지라면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서 내 기본적인 필요조차 무시하며 주변을 돌봤다. 심지어 내게 스킨이나 로션이 필요하면 그것을 사서 보육시설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그때의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희생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따뜻함과 고통이 동시에 섞여 있었고, 나는 그 기묘한 달콤함에 깊이 중독되어 갔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한 헌신의 중독(compulsive caregiving)이었다. ‘주는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던 시절. 나는 그렇게 나를 돌보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돌봄으로써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이에게 지금이 삶을 바꿀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돌고 돌아 다른 선택지를 찾는 것보다, 지금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더 많은 가능성을 얻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그 아이에게 최고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그 시기가, 사실은 내 삶에도 최고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내 인생은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평일에는 언니의 가게 일을 돕고, 주말에는 보육시설 봉사와 아이 과외, 교회 봉사까지 하며 하루하루를 쉴 틈 없이 채워 넣었다. 지금 돌아보면 마치 멈출 줄 모르는 기차처럼, 나는 항상 피곤했고, 늘 조금씩 고장 나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제대로 해낸 게 있었을까 싶다. 그때는 그래도 젊어서 잠을 줄이고 무리해도 금세 회복됐지만, 지금은 조금만 무리해도 며칠을 앓는다.



그 시절의 나는 '도처에 있는 예수님을 외면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내가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 것을 무리해서라도 쪼개 주려 애썼다. 그렇게 내 삶과 건강, 감정을 돌보지 않은 채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인정과 감사의 말로 내면의 고통을 덮으려 했다. 플라스틱이든 철이 든 계속 구부렸다 펴는 걸 반복하면 결국 부러지게 되어 있다. 이것을 ‘피로파괴’라 부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타고나도 지속적으로 구부러지고 상처받다 보면 언젠가 부러진다. 정신장애를 겪거나,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얻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쉽다. 그때의 내가 내 에너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서(나를 돌보면서) 타인을 도왔다면 나도, 타인도 조금 더 진정한 행복에 닿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무한히 받는 사람 역시, 받는 동안 불안과 미안함,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주고받음의 균형이 무너진 관계는 결국 서로를 피로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공의존적 자기희생(compulsive self-sacrifice)에 빠져 있었다. 돕는다는 명목 아래, 사실은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와 공부방에서 매주 만나면서, 나는 아이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나를 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릴 자격이 없어.”,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이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그 믿음들은, 어릴 적 내 안에서도 똑같이 울리던 말들이었다. 가슴이 저렸다. 아이 역시 자신만의 어둠 속에 갇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야?”


“뭐든 할 수 있어.”


“너는 정말 아름다운 존재야.”


그 말들은, 사실 내가 그 나이에 듣고 싶었던 말들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건네면서 동시에 어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그 아이의 진짜 이모라도 된 듯한 마음으로 살았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가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평일에는 A 언니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의 상황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공부 중에도 가슴 아픈 일들로 인해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더 세심하게 살폈다. 오히려 내 공부 시간을 쪼개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고민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모든 희생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다. 희생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 감정은 더 짙어졌고, 나는 그 달콤한 고통에 서서히 중독되어 갔다. 아이의 성적이 오르자, 성적 좋고 집안 좋은 아이들이 삼겹살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행복은 천국을 뚫고 올라갈 만큼 벅찼다. 그때의 나는 그 행복이 ‘고통의 얼굴을 감춘 행복’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 사이 A 언니는 나에게 “아이에게 내가 집안 사정이나 힘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절대 말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예민한 나이이기 때문에 그걸 알면 공부방에 가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고, “수능이 끝나고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때 솔직히 마음을 나누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불쑥 지나갔다. 아이의 공부를 봐주면서 수학은 잘하지만 다른 과목의 성적이 낮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영어를 중심으로 공부법을 다듬고, 매주 단위로 계획을 세워 과제를 내주었다. 그때 남편(당시에는 남자친구)에게 부탁해 국어 과외를 맡기며, 함께 공부방을 운영했다. 그 시절의 나는 아이를 돕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 안의 어린 나를 구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향한 연민 속에는 투사(projection)와 대리치유자 역할이 숨어 있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마음은 때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붙잡은 사랑의 방식’이 되기도 하니까.



그때 나는 이미 5년 넘게 보육시설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학습 봉사와 정서 지원, 상담, 청소 봉사까지. 그래서 따로 공부방 하나를 더 운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잠깐 학원 강사로 일한 적도 있었기에 아이 둘을 가르치는 일이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게 있다. 그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할 시기였다. 아이의 수능 준비와 함께 나 역시 대학원 시험을 치르며 내 인생을 쌓아가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그 시절의 나는 아이의 행복과 미래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내 미래는 늘 뒷전이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해 먼저 내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눈에 보였기에 더 깊은 인정중독에 빠져들었다. A 언니가 “고맙다, 네가 최고다, 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고, 이상할 만큼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은 내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였고 나는 그들의 인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타인을 일방적으로 돕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애정과 인정에 중독되어 그것을 얻기 위해 나 역시 그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와 함께하는 기간 동안, A 언니는 매달 20만 원을 건넸다. “집세라도 하라.”며 내 손에 봉투를 쥐여줄 때마다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걸까, 마음이 불편했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더 잘 가르치고, 더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나중에 남편이 그 시절의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넌 이미 다 이룬 사람 같았어. 다른 사람만을 위해 살았지.”


남편의 말이 지금은 아프게 들리지만, 정확했다. 게다가 A 언니와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돕는 게 ‘의무’라고 믿었다. ‘그 아이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있다.’는 내 머릿속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선의가 오히려 아이에게는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능이 끝난 후, 아이의 성적을 듣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언니로부터 “아이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마음이 벅찼다. 그리고 안도하며 언니에게 말했다.


“이제 아이와 대화하고 싶어요. 그동안 아무 말 안 했지만, 정말 잘 되길 바랐어요.”


그러자 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굳어졌다. 그리고 믿기 힘든 말을 했다.


“그동안 아이의 집안 사정이나 친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걸 절대 말하지 말아 줘요.”


나는 얼어붙었다. 언니는 덧붙였다.

“아이가 여러 번 물었어요. 언니가 내 사정 다 알고 있지?라고. 그럴 때마다 아니라고 말했어요. 성경책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 맹세까지 했어요. 그러니 제발 말하지 말아 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나눴던 대화와 신뢰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나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아이도 성인이 됐잖아요. 이제는 서로 대화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언니는 단호했다.


“안 돼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언니가 덧붙였다.


“아이한테 언니가 화가 났다고 말했어요. 언니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않아서라고요. 그래서 언니가 화가 풀리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고 했어요. 기다리자고.. 그러니... 연락하지 말아 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의 나는 ‘돕는 사람’이이면서 동시에 ‘조종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과 애정이 보상처럼 주어지는 관계는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를 통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준 사랑은 무조건적인 헌신이 아니라, 내 결핍을 메우기 위한 거래였고 언니는 그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대화가 A 언니, 그리고 아이들과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듣고, 희망을 주고 절망을 돌려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았다. 그 후로 가끔 길을 걷다 아이들과 비슷한 뒷모습이나 눈빛을 가진 아이들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그 아이들이 아닐까,

만약 맞다면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상처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보지 않으려 했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남편에게 “혹시 그 아이들 아닐까?”라고 물으면 남편은 “아니야, 잘못 본 거야.”라고 했다. 그 말에 안심하는 척했지만, 내 안에서는 늘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았다. 십 년이 훨씬 지나서야 나는 그 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언니가 해결해야 할 감정과 사정을 내가 왜 대신 짊어졌을까. 그건 언니와 아이의 문제였는데, 나는 그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모든 걸 해결하려 했고 대신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나 사이에는 분명 약속이 있었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남자친구 이야기도, 미래의 고민도 함께 나누자고 했던 약속들. 그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언제든 대화하자던 약속도 있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난 후, 그 약속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A 언니와도, 아이들과도 완전히 끊겼다. 어쩌면 시절인연이라는 말처럼 그때가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끝난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언니의 그 한마디가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 후로 나 역시 대학원 생활로 본격적으로 바빠졌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고3 학생을 과외하며 정신없는 하루들을 보냈다. 그 무렵 친부가 잇따라 사고를 일으키면서 삶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A 언니와 아이들이 사라진 그 빈자리를 정확히 채워줄 사람을 곧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시어머니(당시에는 남자친구 어머니)였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이제 내 삶을 살아야지.’ 하던 그 시점에 그녀는 정확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다. 내가 내려 놓은 자리마다 항상 누군가가찾아와(내가 찾든디) 그 자리를 메웠다. 그때 나는 과거의 상처와 내면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상처를 마주하지 않으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에 이끌려 같은 상황을 다시 만들어낸다. 미해결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의식이 몸과 마음에 비슷한 경험을 계속 가져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당시 남자친구의 어머니)로부터 매달 20만 원씩 ‘월세’ 명목의 돈을 받기 시작했다. 그분은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에 집중하라.”며 은혜롭게 돈을 내어주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돈을 받은 이후 나는 매달 그 돈이 끊길까 봐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새로운 형태의 복종으로 변했다. 나는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와 필요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녀의 기분, 표정, 말투에 맞춰 살았다. 그녀의 행복과 불행을 대신 책임져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A 언니로부터 시어머니에게로 이어진 이 감정의 이동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하고 되돌아온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복강박이라 부른다.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믿음 아래, 사실은 같은 감정의 무대를 다시 연출하는 것. 나는 그렇게 또다시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려 했다. 돌이켜보면 그 20만 원은 생활비가 아니라, ‘충성의 약속금’이었다.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는 순간, 자유를 잃었고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건넨 20만 원 역시 똑같은 역할을 했다. 20만원의 의미는 ‘사랑’이 아니라 ‘복종 계약’에 가까웠다. 값은 작았지만 대신 구속은 깊었다.



지금도 아쉬운 점이 있다. 그때, 만약 몇 달만 더 기다렸다가 혹은 몇 년이 지난 뒤라도 아이에게 연락해 대화를 시도했더라면 아이에게도, 내게도 그렇게 큰 상처는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A 언니가 아무리 “안 된다.”라고 말했어도 나와 아이는 각자의 휴대폰이 있었다. 그러니 언제든 연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니의 말을 따랐다. 그때는 ‘순종’이 존중과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후회. 어머님이 내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매달 월세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벌며 공부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선택 하나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야 생각할 여유와 힘이 생겨 이런 후회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과거의 나날들은 여전히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내어주던 시절, 그때의 나는 ‘일방적으로 (많이) 주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받는 사람(받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었던 상대는 얼마나 힘겨웠을까 생각하게 된다. 받는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죄책감과 부담이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돌아보면, 언니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든 그건 언니와 아이가 풀어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나와 아이의 사이에서 서로의 약속과 신뢰를 지켜가야 했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우리 그런 이야기 나누자.”, “힘들면 언제든 대화하자.” 했던 그 약속들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러나 수능이 끝난 뒤, 모든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나는 한동안 아이의 감정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혹시 내가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나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 속에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때 정작 잃어버린 것은 내 감정이었다는 것을. 나는 분노와 슬픔, 허탈함을 느낄 자격조차 잃어버렸다. A 언니가 자신의 사정을 위해 내 감정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았다. 언니는 아마도 내가 계속 자신을 도울 수밖에 없도록 ‘사정과 환경’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건 무의식적인 조종이었고, 나는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었다. 한 번은 언니가 작은 아이가 준 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엄마,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엄마에게 액세서리 가게를 차려줄게. 예쁜 글씨로 써 내려간 그 편지를 보며 내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그래, 내가 도와드리면 그 꿈이 더 빨리 이루어질지도 몰라.’ 그 생각 하나로 다시 언니를 돕기 시작했다. 나는 20대 초반에 액세서리 도소매 사업을 하던 분을 도운 적이 있어서 그 분야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조언을 해주고, 물건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알려주고 도와드렸다. 그 무렵 언니는 정신병원에서 사역과 일을 함께 하던 목사님을 소개해주었다. 그 목사님은 나와 남편에게 이런저런 사역 이야기를 하시더니, “이제 사정을 다 알았으니, 반드시 도와야 한다.”라고 말하며 봉사활동을 ‘강요’했다. PTSD를 깊게 통과하고 있던 때라 사정을 설명하고 정신병원에서는 봉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로 요청하셨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안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동안 나는 봉사를 하든, 누군가를 돕든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도와주는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 즐겁게 타인을 도우면서 내면의 결핍을 채웠다. 목사님의 강경한 요청을 들었던 것이 돌아보니 한편으론 그 목사님이 참 솔직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들기만 하면 이용하기 쉬운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직접 설명하고 의도를 드러내 주셔서 거절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돌아보면 언니를 아끼고 사랑했다고 믿었던 마음만큼 배신감에 잠기게 된다. 그럼에도 언니 역시 어쩌면 내가 너무 모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속상함들이 존재하지 마련이니까.



진정한 연결이라고 믿었던 관계가 사실은 착취 위에 세워진 관계였다는 걸 깨닫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십 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나처럼 감정과 생각을 깊은 무의식 속에 묻어두는 사람에게 십 년이라는 시간은 긴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기도 하다. 아마 큰 사고들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누워서 생각만 할 수 있는 노년의 어느 날에야 그 상처를 꺼내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고 덕분에 방 안에서 상처를 곱씹으며 네 해를 버텼다. 그 시간을 지나며 ‘십 년이란 것도 결국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나는 고집이 세고, 쉽게 꺾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늘 ‘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이를 통해 인정과 찬사라는 보상을 얻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느꼈던 건 깊은 혐오감이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나는 사실 나 자신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처음으로 나를 조금 구할 수 있었다는 거다. ‘나는 중독돼 있었다.’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중독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아이와 언니를 꿈에서 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애잔하다. 마지막 순간에도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둘의 감정이 내 감정보다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끝내 내 안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도 미해결 된 감정을 남겨버렸다. 그 사실이 나를 오래 괴롭혔다.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내가 미울 때도 있었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쓴 시간만큼 나는 그들에게 예속되었고 스스로 만든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 사람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며 ‘어떤 것’을 기대한다. 그게 돈이 될 수도 있고, 칭찬이나 관심, 혹은 사랑일 수도 있다. 나에게 그것은 ‘수용’, ‘애정’, ‘따뜻함’, ‘교류’였다.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끊긴 상태의 나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고, 부딪히고, 부서졌다. 그리고 그제야 결국 내가 받고 싶었던 그것들 역시 결국은 교환가치 위에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수동 공격(passive aggression)’의 한 형태였을지 모른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행동과 응답을 기다렸을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기다려야 했던 그 시간들.



과거의 나는 인정중독에 빠져 있었다. 그건 고통을 피하기 위한 회피의 방식이었다. 중독의 그늘 아래 나는 유사한 충만감, 가짜 행복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나는 입을 닫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이제야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마주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제야 내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명확히 인지해가고 있다. 관계 중독의 본질은 ‘사랑을 주는 척하면서 사랑받으려는 욕망’에 있다. 내가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려 했던 건, 사실 내 안의 결핍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핍을 직면하지 않으면, 인간은 같은 형태의 관계를 반복하며 자신을 소모한다. 내가 시어머님을 여자친구였던 시절부터 그녀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려 한 것처럼 말이다.



내 삶에 ‘고쳐야 할 사람(도와야 할 사람)'을 더 이상 끌어들이지 않게 되면 잠시 외로울 수는 있지만, 진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시작이 열린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정서적 충족을 스스로 채우는 법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배우고 있다. 타인의 여정에 쉽게 끼어들지 말 것. 그들의 회피를 대신 막아주지 말 것. 그리고 내 안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심리적 마취제를 하나씩 제거할 것. 그 다짐들을 되뇌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피하고만 싶었던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느끼고, 깊이 느끼는 연습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배웠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를 잃지 않고 소진되지 않은 채로 돕는 것임을. 타인의 짐을 짊어지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삶이 오히려 더 풍요로워졌다. 이제야 살수록 행복이 자라난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나는 때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잠깐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내 감정을 무시하면, 그 대가는 결국 10년 넘는 고통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오늘의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타인의 잘못과 감정적 책임을 그들에게 돌려보내는 용기를 내려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를 둔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 아이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를 사랑했다고. 정말 아꼈다고. 세상 누구보다 너는 아름답고, 귀하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였다고. 그리고 한 명의 성인으로 너를 인정하지 못하고, 끝내 아이로만 바라본 나를 용서해 달라고. 그 모든 미숙함이 미안하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빌려 나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다. 타인을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나를 버리고 무시했던 모든 순간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그 순간들 속에서도 죽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끝내 살아남아 오늘의 나와 친구가 되어준 내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진정한 자립은 ‘외로움을 견디는 힘’에서 시작된다. 이제 나는 관계의 균형을 배워가며, 돌봄이 아닌 교류로, 희생이 아닌 선택으로 사랑하려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은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건 너의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 ‘나는 지금 쉬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나는 괜찮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그 말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일상을 살면서 나는 드디어 평안이라는 행복을 얻었다. 타인을 구해주지 않아도, 나는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평안. 그 평안이 당신에게도 드리우길 바라본다.



2부 9. (2) 너를 통해 나를 봤다

참고 자료


1. Freud, Sigmund, The Ego and the Id, W. W. Norton, 1923

→ 사용된 개념: 자기 처벌적 선택(Self-punishing choice), 초자아의 공격성, 무의식적 죄책감


2.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사용된 개념: 투사(projection), 애착 손상, 대리치유자 역할, 안전기지의 상실


3.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자기소멸적 이타성(self-annihilating altruism), 자기확인 욕구, 공의존적 자기희생(compulsive self-sacrifice)


4. Fairbairn, W. R. D., Psychoanalytic Studies of the Personality, Routledge, 1952
→ 사용된 개념: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내면화된 부정적 대상,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


5.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2014
→ 사용된 개념: 생존자 반응(survivor’s response), 외상 후 과각성(post-traumatic hypervigilance), 신체화된 트라우마 기억


6. Skinner, B. F., Science and Human Behavior, Macmillan, 1953
→ 사용된 개념: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 보상 기반의 관계중독


7. Melanie Klein, Envy and Gratitude and Other Works 1946–1963, Hogarth Press, 1975
→ 사용된 개념: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 내면의 어머니상 투사, 분열과 이상화의 반복


8. Horney, Karen, Neurosis and Human Growth, W. W. Norton, 1950
→ 사용된 개념: 자기 부정(neurotic self-hate), 이상화된 자아 이상에의 복종, 도움을 통한 자기확인 욕구


9. Bowen, Murray,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1978
→ 사용된 개념: 역할고착(role fixation), 삼각화(triangulation), 세대 간 정서 전이


10. Orloff, Judith, The Empath’s Survival Guide, Sounds True, 2017
→ 사용된 개념: 엠패스(empath),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현상, 정서적 피로(burnout)





KakaoTalk_20251014_175957377_02.jpg

목차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부제: 코디펜던트 가족 탈출기


프롤로그



‘상처’에서 ‘자유’로, ‘의무’에서 ‘선택’으로 나아간 김희경 작가의 신작.

가족이라는 감정적 언어 속에서 길을 잃었던 한 개인이 자아와 회복을 향해 걸어온 심리적 여정.



1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상처들

가족 체계 속 얽힘과 감정의 왜곡,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기


1. 가족이라는 이름의 상처

혈연이라는 이름이 만든 구조적 폭력


(1) 가족이라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을 때

(2) 가장 아름다웠던 날, 가장 잔인한 기억

(3) 생애 첫 기억 속 무가치함의 내면화 시작

(4)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


2. 가족이라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가족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한다는 믿음의 해체


(1)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장면들

(2) 유일한 내 편이면서, 동시에 나를 파괴한 사람

(3) 누가 나를 구원해 줄까

(4)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손조차 잡을 수 없었다


3. 가족 내에 형성된 내 역할을 점검하라

역할고착(Role entrapment)과

삼각관계(Triangulation)


(1) 역할 고착과 삼각관계, 그리고 세습되는 역할

(2) 아이로 태어나 희생자가 되기까지

(3) 희생양이 된 아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희생양을 자처하다

(4) 희생자 가족 재판에 서다

(5) 반복되는 구조, 멈출 수 있는 용기


-추가 : 가족 속에서 반복되는 심리 구조 6가지


4. 불쌍하지 않은 걸 불쌍하다고 말하지 마라

감정의 무효화(Emotional invalidation)와

2차 피해


(1) 기억 속 어머니의 따뜻한 도시락과

차가운 뒷모습

(2) 감정의 무효화와 2차 피해

: 이중의 상처

(3) 가사노동의 굴레 안에서 사라진 존재들

(4) 반복 강박 속에서 깨달은 진짜 감정

(5)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챙겨야지

(6) 타인의 불쌍함은 타인의 몫이고,

내 감정을 지키는 건

내 몫이고 나의 책임이다.


5. 사랑이라는 말의 함정에 주의하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통제의 언어


(1)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상처의 유산

(2) 사랑이라는 말의 함정

(3) 왜곡된 사랑과 고통의 반복

(4) 성공을 바란다며 발목을 잡는 사랑

(5) 왜곡된 사랑과 경계의 설정

(6) 자기 사랑의 회복과 치유의 여정


-추가 : 알고 가기


6.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연민은 선택이지만,

용서는 강요가 아니다


(1)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부모들

(2) 단돈 천원도 못 벌어오는

너는 불필요한 존재야

(3) 나중에 나랑 시골에 집 지어서 같이 살자

(4) 여행이 싫은 이유

(5)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2부. 나의 진짜 신념을 세우기 위해 – 경계 짓기와 믿음 바로잡기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생존의 신념들을 찾고 부수기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


(1)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는 신념

(2)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생존의 신념들

(3) 나는 사랑받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 - 공의존, 반복강박

(4)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 네가 이해해야 해라는 말의 함정


- 1. (1) 추가 :


(1)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

/ 심심 출판사]

책 내용 중 ACE 항목을 가져왔습니다.

(2) ACE 점수에 따른 건강

리스크 해석 (Nadine Burke Harris 정리 기준)


2. 내 감정은 타인의 감정보다 중요하지 않다.

감정보다 의무가 우선이다.


(1) 벌써 마흔

(2) 충전되지 않는 삶, 회피에서 글쓰기로

(3)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4) 네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야

(5) 내 감정은 그 누구의 감정보다 중요하다


3. 나는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다.


(1) 누구나 마음에 유리조각 하나를 품고 산다

(2) 속옷 속에 숨겨진 이야기

(3) 타인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

(4) 거짓 행복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다짐


4. 내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

나는 중재자이자 책임자여야 한다.


(1) 어린 시절의 상처가 30%만 영향을 준다고?

(2) 당신이 해결하지 않은 과거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다시 반복된다

(3) 파랑새를 만난 줄 알았다.

- 안전기지의 환상, 반복된 구원의 시도

(4) 여우를 피해 갔더니 호랑이를 만났다

(5)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내가 잠식되어 갔다

(6) 무기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효도라는 이름으로 나는 나를 잃었다

(8) 우리는 서로의 부모가 되어주었다

(9) 더 이상 나를 구해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겠다


5. 진짜 나를 보여주면 버림받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1) 어른이 되었어도 일부 미성숙한 사람들

(2) 내가 나라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3) 네가 너라서, 딸이라서 버려진 거야

(4) 이랬다가 저랬다가

(5) 나라는 사람 그대로 수용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

(6)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고,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들

(7) 처음으로 나를 위해 경계를 세우다

(8) 진짜 나를 보여주면 버리는 사람들이라면

나도 필요 없다


- 추가 :


(1) 엠패스 테스트

(2) HSP 테스트

(3) GHATGPT

심층리처시를 활용한 HSP,

엠패스, 초예민자에 대한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통합 보고서


6. 내가 잘해야만 관계가 유지된다.

내가 못하면 사랑은 끊긴다.


(1) 너를 버릴 수도 있어

(2)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은

그대를 사랑해야 할 때

(3) 내 냉장고 열어봐 봐

(4) 내가 잘해야만 관계가 유지될까

(5) 내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뿐이다


7.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다.


(1) 저 감은 시어서 못 먹을 거야

(2) 나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다

(3) 누더기를 걸친 마음

(4) 가면 속에 감춘 마음

(5)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


8. 내가 선택받지 못한 건 내 탓이다.


(1) 상처의 대물림

(2) 양가적인 감정 안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3) 아직도 매일 꿈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언니에게

(4) 나는 더 이상 내가 나인 것이 아프지 않아


9. 나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볼 자격이 없다.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은 이기적이다.


(1) 붉은 손톱

(2) 너를 통해 나를 봤다

(3) 타인의 과제를 타인에게 돌려주는 연습

(4)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이 타인을 돕는 것이다


10. 내 감정을 드러내면 벌을 받고,

내 고통과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1) 영웅의 서사인가, 신의 은총인가

(2) 고통스러웠던 20대

(3) 도망가느라 바빴던 30대

(4) 내 생각과 마음이 가장 중요해



3부. 새로운 가족의 의미와 용서의 속도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1. 가족은 모두에게 따뜻한 단어가 아닐 수 있다


(1) 가족 신화와 현실 사이

(2) '가족'이라서 참아야 했던 순간들

(3) 이상화된 가족 상(像)이 주는 심리적 함정

(4) 가족의 언어 속에서 탈출하기


2. 구 가족과 신 가족을 구분하라


(1) 원가족과 선택 가족의 차이

(2) 경계를 세운다는 것의 의미

(3) 배우자의 원가족과의 관계

: ‘우리’와 ‘그들’의 구분

(4) 혈연이 아닌 유대로 맺는 가족의 힘


3. 자녀는 부모가 선택해서 태어난 가족이다


(1) 돌봄은 책임, 효도는 선택

(2) 불효라는 낙인이 만든 죄책감

(3) 부모의 한계와 자녀의 권리

(4) ‘돌봄의 책임’을 바로 세우기


4. 타인의 시선에 갇힌 나를 구하라


(1) 사회적 자아와 진짜 자아

(2) ‘좋은 딸’, ‘좋은 아내’라는 가면

(3) 인정 욕구와 수치심의 굴레

(4) 타인의 지옥을 내 삶에 끌어들이지 않기

타인의 지옥, 나의 지옥 각자가 걸어갈 길


5. 돕고 싶다면 나를 먼저 도와라


(1) 자기 돌봄은 이기심이 아니다

(2) 심리적 경계와 윤리적 선택

(3) 먼저 나를 구해야 남도 구할 수 있다

(4) 가장 먼저 용서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

스스로를 연민하지 말 것


6. 스스로에게 행복과 자유를 허락하라


(1) 자기 연민과 자기 인정의 차이

(2) 행복을 선택할 권리

(3) 용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4) 가장 마지막에 도달하는 회복의 단계,

그 속도는 온전히 나의 것



4부. 실천챕터


1. 삶이 어려울수록 글을 써라.

기록은 치유의 시작이며,

내면의 감정을 안전하게 꺼내는 방법이다


(1) 감정을 언어화하는 힘

: 글쓰기로 마음의 무게 내려놓기

(2) 하루 10분 글쓰기

: 짧아도 꾸준히, 무엇을 써도 괜찮아

(3) 나만의 안전한 글쓰기 공간 만들기

(4) 쓰기를 통한 내 안의 목소리 발견

(5) 기록이 가져다준 회복의 흔적과 증거 쌓기


2.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찾기

감정적 회복탄력성을 기르기 위한

구체적 실천 가이드

문화, 예술, 취미, 레저의 유익


(1)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작은 실천 만들기

(2) 요리가 즐거워

- 만들고, 먹고, 먹이고

(3) 액세서리를 만들면서 발견한

내 안의 욕구

(4) 식물 속에서 발견한 인생

(5) 작은 소모임 또는 혼자 놀기

(6) 세상과 소통을 멈추지 않기


3. 작은 성취라도 내 노력으로 획득할 것

작은 성취를 통해 내면에 영양제 먹이기


(1) 작은 성취로 자기 효능감 회복하기

(2) 성취를 기록하고 스스로 칭찬하기

(3)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연습

(4) 노력의 과정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와 연습

(5)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



에필로그


가족을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사랑의 이름 아래 스스로를 잃어갔던 시간을 넘어,

이제 나를 회복하는 길


참고자료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29화<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2부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