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47. 경계

47. 경계를 세우는 일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비난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관계와 감정은 특정 인물을 이상화하거나 동일한 관계를 반복하도록 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삶의 구원자, 기준, 전부로 삼는 관계가 지닌 위험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기록한 개인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전적으로 저자의 주관적 경험과 성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다만, 이 글은 특정한 관계를 미화하거나 모범 사례로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 각자의 삶과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기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 정서적 방임, 상실, 관계 의존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과 안전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나 과도한 감정 반응이 느껴질 경우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거나 누군가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돌아보며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한 개인이 겪은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담은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대신해 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건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회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I 그림



AI 그림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47. 경계를 세우는 일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사진서체: 네이버나눔명조체]

[AI 컷 만화]


관계에서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방식을 인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타인에게 나의 바람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이다." -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

생일 선물을 준비할 때마다 상대방의 취향과 필요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오랜 학생 시절을 지나 주부로 살아보니 쓸데없는 물건을 받는 일이 선물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빨래 삶통을 미리 사서 써본 뒤, 생일 즈음에 선물해도 되는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이미 젖병 소독기가 있고 아기 빨래는 세탁기의 고온 삶음 기능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 대안을 물었다. 백화점 상품권 20만원을 드릴지, 아니면 그 돈으로 샤넬 매장에서 향수를 사서 선물할지였다. 언니는 그냥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언니의 생일 선물을 준비할 때마다 나는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이 필요했는지, 어떤 것들을 불편해했는지. 그런 생각들이 이어진다. 이런 고민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기 때문에 2년 전에는 언니에게 강하게 부탁한 적이 있다. 서로 선물을 하지 말자고. 평소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데 그때는 긴 글을 여러 번 보냈다. 하지만 언니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선물을 보내왔다. 직접 만나지 않으니 남편을 통해 보내왔다. 그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몇 년 전 우울증이 심했을 때 오래된 친구에게 명절에 만나던 일을 잠시 미루자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긴 글을 보냈지만 열흘쯤 지나 명절에 언제 볼 건지 묻는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감정이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꼈고, 결국 그 관계를 끊게 됐다.

내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이런 마음이 든다. 내 감정이 중요한 만큼, 내가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만큼 상대도 내 감정을 존중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판기나 로봇이 아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방식대로 행동한다는 걸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나의 생각과 의사대로 상대방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모방한 로봇이거나 또 다른 나일 것이다. 내 감정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감정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년 조금씩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내 생일이 항상 언니 생일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언니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선물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선물은 종종 언니가 갖고 싶어 했던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사람들은 선물을 고를 때 상대의 취향과 필요를 고려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상대에게 필요할 것 같은 것, 상대의 취향을 떠올리며 선물을 고른다. 그런 과정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고받는 일을 그만하자고 말했던 것 같다. 물론 그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내 말과 상관없이 선물을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언니의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타인에게 나의 바람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이다."

불현듯 이 글귀가 떠오른 건 우연일까.

이번에 생일 선물을 전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이기적이지 않은 것처럼, 언니가 자신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이기적인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언니가 내가 했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거나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화가 났다. 그런데 이제야 그것 역시 언니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선물을 남편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뒤 그날 저녁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남편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지만 언니는 내 휴대폰으로 직접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 역시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짧게 답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라고.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면 언니는 참 고운 점이 많은 사람이다. 다만 언니와 나는 닮은 부분이 있어서 종종 타인의 감정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래서 나는 언니와 나를 위해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어느 날 "그때 내가 너를 신경 쓰지 못했어. 조금 더 신경 쓸 걸. 네가 그렇게 아플 줄 몰랐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 감정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언니는 언니 감정만 책임지면 된다고. 그리고 나는 잠수를 탔다. 언니와 친분을 이어가고 싶어도 여러 관계들이 얽혀 있고 결국 그 모든 부담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쪽에서 관계를 내려놓았다.

이번 생일 선물을 준비하면서 삶통, 상품권, 향수 이야기를 했더니 언니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졌냐고. 보고 싶다고. 언제든 부르면 바로 가겠다고. 대기하고 있겠다고. 언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래서 놀랍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고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언니는 아직 예전의 나를 기억하며 사랑하고 있구나 싶어 고마웠지만 다시 과거가 반복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어떤 관계든 완전히 좋거나 완전히 싫기만 한 경우는 없다. 인간 관계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좋지만 싫을 수도 있고, 너무 싫지만 좋은 면이 반드시 있다. 언니의 말을 듣고 난 뒤 며칠 동안 꿈을 꾸었다. 언니가 시집을 가게 되어 해외로 이사를 간다는 꿈이었다.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배를 타고 파도를 넘어 언니를 만나러 갔다.

"싫다. 보고 싶지 않다."

과거에 그렇게 독한 말을 했던 나와 달리,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언니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깨어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완전히 좋기만 하거나 완전히 싫기만 한 관계가 어디 있겠느냐고.

언니와의 관계를 끊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언니가 내 시누이였기 때문이다. 시댁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시누이와 깊은 우정을 이어간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것들과 얽혀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번 생일을 지나며 끊어 두었던 문자들을 다시 주고받았다. 나는 대부분 짧게 답했지만 오래된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다시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언니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한 작가님이 떠올랐다. 왜 나는 그 둘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 작가에게는 없는 단점까지 연결해 생각하려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고 고운 점도 닮아 있다. 어쩌면 상처까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주 둘을 내 안에서 뒤섞어 버리곤 했다.

이번 생일을 지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내 감정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의 감정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 내 감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역시 반드시 이기적인 행동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생일을 통해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빨래 삶통은 내가 먼저 사서 써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니 생일 선물이라며 포장해서 보냈다면 언니가 꽤 난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내 마음인 것처럼, 언니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마음을 보내든 그것 역시 언니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는 것 역시 나의 응답일 수 있으니까. 경계를 세운다는 건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는 일이라는 걸 이번 생일에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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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AI 그림 제작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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