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çon 6 : 1976년 2월 10일
요즘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조이스에 대해 생성된 방대한 문헌을 닦아내는, 말 그대로 ‘걸레질(éponger)’하는 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이스 본인은 이 단어, 즉 '문학(littérature)'이라는 표현에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지만, 결국 그 자신이 유발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것을 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주위에 엄청난 ‘블라블라(bla-bla)’, 말의 홍수를 일으켰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크 오베르, 여기 1열에 앉아 있는 그는 가끔 리옹에서 친절히 몇몇 새로운 저자들을 저에게 추천해주곤 합니다. 그는 이 일에 결코 무관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이 일에 무관한 사람은 누가 있겠습니까? 그 역시 조이스에 관해 무언가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왜 이런 걸레질을 하고 있는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가 이미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유가 그렇듯, 저는 왜 그걸 시작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제기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방식대로 말하자면, 질문은 이렇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사람은 미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제가 자크 오베르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제가 결코 해결하지 않을 문제이지만, 그 질문이란 이렇습니다. '조이스도 미쳤던가?'
이 질문에 당장 답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여러분께 제안했던 개념적 틀 — 즉 진실(le vrai)과 실재(le Réel)의 구분 — 을 따라, 저는 나름대로 방향을 잡기 시작합니다. 프로이트에게 이 구분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는 진실은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말했고, 그 점이 실재와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적어도 프로이트에게 실재는 기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프로이트가 말한 ‘(큰) 사물(la Chose)’을 살짝 비틀어 해석합니다. 저는 향락(jouissance)을 실재 그 자체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저를 많은 어려움으로 이끌었습니다. 가장 먼저, ‘실재의 향락’이라는 개념은 — 프로이트 자신이 나중에 깨달았듯 — 마조히즘(masochisme)을 수반합니다. 마조히즘은 실재가 주는 향락의 핵심이며, 프로이트는 처음부터 그것을 상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것이죠.
그렇기에 이 경로로 들어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명을 의미합니다. 증거는 분명합니다. 제가 처음 시작했던 저작이 바로 『영감을 받은 글들(Écrits inspirés)』이라는 것입니다.
Écrits inspirés는 J. Lévy-Valensi, Pierre Migault과 함께 라깡이 의학심리학회( Les Annales MédicoPsychologiques)에 게재한 논문이다.
그 중 <편집증적 정신병과 인격과의 관계에 대하여 De la psychose paranoïaque dans ses rapports avec la personnalité>는 라깡의 의학박사 논문으로, "에마 포(Emma/F.Aimée)"라는 여성 환자의 편집증(유명 여배우를 공격한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에크리(홍준기 등, 2019) 참고.
원문은 다음 링크 참고.
https://psychaanalyse.com/pdf/lacan_THESE_de_medecine.pdf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제가 지금 조이스와 맞닥뜨린 것을 놀라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앞서 여러분께 감히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 '조이스도 과연 미쳤던가?'
그의 저작들은 도대체 어떤 영감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조이스는 엄청난 양의 메모와 낙서, 즉 "scribbledehobble"을 남겼습니다. 이 표현은 코놀리라는 인물이 그가 발견한 조이스의 원고에 붙인 이름입니다. (그 인물을 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아직 생존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많은 메모를 남겼는가?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오히려 '연구자들'이 그 메모들을 찾아 나서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현재까지 세 권의 두꺼운 편지집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일부 편지는 거의 출판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거의(quasi)'라고 말한 이유는, 사실 그런 것 따위로 출판이 막히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나온 편지집은 『선택된 편지들(Selected Letters)』이라는 제목으로 리처드 엘먼(Richard ELMANN)이 편집한 것입니다. 그는 이전 권에서 ‘출판 불가’로 간주된 편지들 중 몇몇을 거침없이 포함시켰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잡동사니는 너무도 방대해서, 저조차도 길을 잃습니다. 물론, 몇몇 실마리들은 제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이스와 노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분석 경험 — 다시 말해, 제가 다루는 이들이 말하는 것을 통해 쌓은 고백들 — 을 바탕으로 어떤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결국, 다시 말해서 — 프로이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그들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이(transfert)의 논리를 통해, 그들이 저에게 ‘앎’을 부여하도록 만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히 조이스를 읽을 때, 그 끔찍한 점은 — 제가 결국 조이스를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분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점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분석을 받을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트위들덤(Tweedledum)과 트위들디(Tweedledee)라는 별명을 각각 프로이트와 융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건, 조이스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들에 특별히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책을 구할 수 있다면 꼭 읽어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오래된 프랑스어 번역본인데, ‘La Sirène’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영어 원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원문을 손에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비평적 주석들과 함께 실린 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 번역본이 더 읽기 쉬운 분들이라면, 거기서 조이스가 자신의 친구 크랜리와 나누는 대화 속 ‘재잘거림(jaspinement)’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엔 생각해볼 만한 요소들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스티븐이 뭔가를 말하려다 멈추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려는지 끝내 말하지 못합니다. 크랜리는 그를 다그치고, 집요하게 물으며, 신앙을 잃었다는 그 말에 대해 실질적인 태도를 보일 의향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 신앙은, 그가 교육을 통해 형성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입니다. 스티븐은 분명히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사유 전체를 지탱해주는 골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못합니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그 모든 체계 전체를 거부할 때 따라올 거대한 파급효과 때문입니다.
여러분, 꼭 읽어보십시오. 그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크랜리는 스티븐에게 그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지만, 조이스는 그 결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조이스가 쓴 것은, 바로 그가 ‘무엇인지’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 나아갑니까?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좌표들 — 망명, 침묵, 교활함 — 은 단지 살아가는 방식일까요, 아니면 그 이상일까요?
저는 자크 오베르에게 묻습니다. 조이스의 글 속에는 —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 자기가 바로 그 ‘구세주(redeemer)’가 되려 했다는 의심의 흔적, 아니면 최소한 자기 자신을 그런 존재로 만들어가려 했다는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그 믿음을 대체하려 했던 것 — 다시 말해 신부들이 떠들어대는 “진짜 구세주가 있었다”는 이야기 대신 자신을 그 자리에 놓으려 한 것 — 바로 그것 말입니다.
자, 저는 왜 자크 오베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의 의견도 제 의견만큼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느낌’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조이스는 말해주지 않았고, 다만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결정적 차이입니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실재(le Réel)에 닿을 수는 있지만, 진실(le vrai)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크 오베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이스는 자신을 구세주라고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을까요?
자크 오베르 – 예, 흔적은 있습니다.
라깡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크 오베르 –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에, 아주 뚜렷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라깡 – 어디에요?
오베르 – 『스티븐 히어로』에요, 초판입니다. 아주 명확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라깡 –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란 게…
자, 들어보십시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꺼져버리십시오. 꺼지세요! 이 방이 비는 게 저에겐 더 낫습니다.『스티븐 히어로』는 저도 어느 정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결코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체가 구세주가 아니라 ‘신(God)’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 ‘예술가’로서의 신.
오베르 – 네, 제 기억이 맞다면, 조이스는 곳곳에서 자기를 가짜 그리스도(faux Christ)처럼 제시합니다. 또 그는 ‘태도 속의 수수께끼(enigma of manner)’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태도’는 일종의 매너리즘이자 동시에 수수께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한때 프란치스코회(Franciscanisme)에 깊이 매혹되었던 시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프란치스코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 하나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이라는 프란치스코회적 이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입니다.
– 또 하나는 시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작은 꽃들(Les Petites Fleurs)’ 같은 시적 전통 말입니다.
그리고 『스티븐 히어로』에서 조이스가 찾고 있던 것은 프란치스코 신학이 아니라, 자코포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의 시학이자 시였습니다.
라깡 –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것이 던져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디까지 그것을 믿었는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물리학'으로 그걸 다룰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제 매듭들(nœuds)이 — 그러니까 제가 다룰 수밖에 없는 것들,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루게 된 것들 — 바로 그 매듭들이 저에게 어떤 것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저를 묶어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이야말로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매듭의 역학(dynamique des nœuds)’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쓸모’는 없지만, ‘조인다’(ça serre). “s-e-r-r-e” — ‘조인다’라는 동사는, ‘봉사한다(ça sert)’는 말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봉사’하지는 않지만 ‘조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매듭들이 조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매듭들이 무언가를 조이고 있다고 ‘가정’합니다.그런데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이 매듭들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것들, 즉 가장 실재적인 것 그 자체(le plus Réel)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그 매듭들이 조일 수 있는 '무언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건 바로 제가 그곳에 '점(un point)'을 설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점은, 결국에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하나의 축약된 표기이며, 그곳을 통과해 한쪽에서 들어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는 하나의 줄(corde)을 상정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끈(corde)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한없이 단순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이 끈이라는 이미지는 얼핏 보면 우스울 정도로 멍청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름 아닌 위상수학(topologie)이라는 이론적 배경이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위상수학이란 최소한 — 더 말하지 않더라도 — 토러스(tore, 원환)라고 불리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는 뜻입니다.
저의 훌륭한 친구들인 소리(SOURY)와 토메(THOMÉ)는, 보로메오 매듭과 토러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했습니다. 즉, 두 개의 원이 서로 겹쳐 접혀 있는 구조 — 바로 이 구조가 문제입니다 —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 중 하나가 접히면서 다른 하나를 풀어주는 구조이고, 사실 이것이 보로메오 매듭의 핵심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바로 이런 식으로 구성된 토러스 안에 배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밝혀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 무한직선(droite infinie)을 통과시키게 되면 — 이 직선은 매듭 이론에서 결코 배제되지 않습니다 — 이 직선은 단순한 ‘가짜 구멍(faux trou)’이 아니라, 진짜 구멍(vrai trou)을 만들어냅니다.
즉, 평면 위에 재현될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평면화(mise à plat)’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 평면화는 과연 적절한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매듭들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평면화는 매듭들이 요구하는 하나의 표현 장치, 즉 ‘원근법적 도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어떤 연속성(continuité)을 보충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연속성이란, 무한직선이 어디서 나와서 — 어디서 나옵니까? —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는 그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멍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가장 단순한 경험, 즉 반지(anneau)의 경험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반지는 단순한 추상적 선인 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원에 ‘몸체’를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일관성(consistance)을 부여해야 하며, 그 원이 어떤 물리적인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야만 이 모든 구조가 사고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penser)한다는 것은 곧 ‘몸을 돌본다(panse)’는 것이라는 언어유희에 도달합니다.
자, 어쨌든 오늘의 주제였던 조이스(JOYCE)의 궤적으로 돌아갑시다. 아까 제가 제기했던 질문으로 다시 가보죠: '노라(Nora)에게 보낸 조이스의 연애편지들은 도대체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 안에는 몇 가지 좌표를 반드시 표시해두어야 합니다. 조이스와 노라의 관계는 대체 무엇인가? 저는 이것이 하나의 성관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물론, 제가 늘 주장하듯,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지만요 — 다만 이건 좀 특이한 성관계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혹은 해도 아주 가끔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오른손에 왼손 장갑을 뒤집어서 끼지는 않으니까요. 이 비유는 칸트에게서 나옵니다. 하지만, 누가 칸트를 읽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장갑 비유는 여전히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칸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 아마 그 시대에는 장갑에 단추가 없었기 때문일 텐데 — 장갑을 뒤집으면, 단추는 안쪽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이 비유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제가 방금 한 말을 잘 따라오셨다면, 이 장갑들은 결코 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집힌 장갑이 바로 노라입니다. 조이스는 그녀가 자기에게 ‘꼭 맞는 장갑’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이스에게 있어 여자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동일한 모델로 반복됩니다. 그리고 조이스는 극도의 혐오 속에서만 그 ‘장갑’을 끼려 합니다. 그는 거의 고통스럽게 자기를 쪼여오는 것처럼 노라를 선택합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트리에스테(Trieste)에 살던 시절의 관계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이가 생길 때마다 —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 드라마가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짐(Jim, 조이스의 별칭)과 노라 사이에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노라는 조이스에게 편지할 때 그를 ‘짐’이라고 불렀고, 그 호칭이 기록된 것입니다.
아이, 즉 후손이 나타날 때마다 — 항상, 매번 — 그들 사이에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제 제가 아까 말한 ‘단추’로 돌아가 봅시다. 이 단추에는 어떤 기관, 즉 신체 부위에 붙는 명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클리토리스(clitoris). 그것은 이 구조에서 일종의 ‘검은 점(point noir)’입니다. 메타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검은 점'이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관찰하지 못한 여성의 행동 속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성이 ‘검은 점들’에 대해 그렇게도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서 가장 먼저 ‘블랙헤드’를 짜내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검은 점 — 즉 자기 몸의 특정 부위가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장갑의 ‘단추’에 대응됩니다.
물론, 때때로 여성들이 원숭이 암컷들처럼 몸을 돌보며 벼룩을 잡아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충을 눌러 죽이는 것과 ‘검은 점’을 짜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자, 우리는 이 순환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구세주가 되려는 상상력(imagination d’être le rédempteur)’ — 적어도 우리 전통 안에서는 — 그것이야말로 제가 ‘아버지-판본(père-version : 성도착perversion의 언어유희, 역자주)’이라고 적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구세주’라는 이 미친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 문제, 즉 사디즘(sadisme)과 마조히즘(masochisme) 사이의 엉뚱한 연결 — 그 유일한 접점 — 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습니다. 사디즘은 아버지의 몫이고, 마조히즘은 아들의 몫입니다. 두 개는, 철저하게,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 마치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 그걸 무언가처럼 여깁니다.
이 무한 직선(droite infinie)이 토러스 안으로 침투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상징적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이 설명은 충분히 이미지화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단순한 능동과 수동의 양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순진한 발상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무언가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세입니다. 팔루스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이되는 것이며, 그 전이는 아들이 팔루스를 가질 권리를 획득하기에 앞서, 아버지의 팔루스를 무효화하는 구조를 내포합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상징적 기제를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묻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이론 속에서 이 둘은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진실(le vrai)의 비판이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실재적 진실(le vrai Réel) 말고, 또 어떤 진실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이 구분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Echt(독일어로 '진짜의, 실재의'라는 뜻으로 불어 réel에 대응, 역자주)’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끌어와야 할까? 하지만 ‘Echt’란 개념은 분명 실재의 편에 서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은 이 ‘Echt’라는 개념에서 결국 한계에 봉착합니다. 그가 쓴 작은 단락 속에서조차 그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실패를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재는 언제나 진실의 꼬임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제가 매듭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출발점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스스로를 꿰뚫고(s’autoperfore), 그것의 사용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미끄러지며, 흡인되고, 마침내 그것이 발화되는 신체의 구멍 — 이를테면 빠는 입 — 의 이미지로까지 끌려 들어갑니다.
시선은 하나의 역학, 보다 정확히는 원심적 역학을 형성합니다. 이 시선은 보는 눈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맹점에서도 출발합니다. 그것은 ‘보는 순간(l’instant de voir)’에서 기점을 얻고, 그 자체로 지탱점을 형성합니다. 눈은 실로 즉각적으로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직관은 이미지 안에 공간이라는 것을 이중화합니다.
그러나 ‘실재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간은 전적으로 언어적 구성물입니다. 우리는 그 공간을 세 개의 차원으로 분해하여 철자화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하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기하학은 사실상 공 혹은 구(sphère)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상은 기본적으로 운동감각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구강-항문적 감각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제가 ‘작은 대상 a(objet petit a)’이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상 단 하나의 대상입니다. 제가 그것을 다시 ‘대상’이라 부른 이유는, 그것이 상상계의 중심성, 즉 확장하는 원형의 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상상계란 본래 집어삼키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개념 — 개념이란 결국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무기처럼 취급되는 것이니까요 — 그 개념성의 구조를 통해 기능합니다.
몇몇 결코 어리석지 않은 독일 철학자들이 말했듯, 무기란 애초부터 팔의 연장이 아니라, ‘투척 무기(arme de jet)’였습니다. 인류는 대포를 만들기 전부터 이미 부메랑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성관계’의 유일한 잔재는 앞서 제가 ‘장갑’의 비유와 함께 이야기했던 바로 그 기하학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관계를 지탱하기 위해 가진 유일한 구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처음부터 ‘숨의 문제(soufflure)’ 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안에 고체(le solide)를 더하거나 빼면서 다뤄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고체의 절단면과 고체 자체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숨’이라는 개념 속에서, 즉 구형, 동심원 속에서 가장 ‘일관적인 것’ — 가장 단단한 것 — 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끈입니다. 끈은 원을 그리고, 회전하며, 고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평면 위에 펼쳐질 때, 하나의 유일한 구조가 됩니다.
결국 무엇이 이를 입증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선이 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그것이 자기 자신과 다시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굳이 매듭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잘못 이름 붙여진 ‘보로메오 매듭’이라는 구조 — 사실은 ‘사슬-매듭(chaî-nœud)’이죠 — 안에서만 매듭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조는 자연스럽게 클로버 매듭을 생성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조는 이곳, 저곳,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서로 연결되며 접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거꾸로 뒤집히는 순간, 드러나는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긴 수다의 끝에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여러분에게는 그리 자명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아주 빠르게, 매우 분명하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
그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겁니다:
여기에서, 이 매듭의 — 그러니까 매듭의 한 '날개'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 아래를 통과하는 구조에서 — 무언가를 살짝 바꾸기만 하면,
그 결과로 매듭 전체가 즉시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매듭은 전면적으로 무효화(aboli)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차피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조이스(JOYCE)가 과연 미쳤는가, 아닌가를 묻는 문제라면 — 왜, 도대체 왜, 그가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합니까?
더욱이 이것은 어떤 특권도 아닙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상징계(Symbolique), 상상계(Imaginaire), 실재계(Réel)는 서로 너무도 뒤얽혀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 계속 이어지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셋을 구별할 수 있는 작용,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보로메오 매듭의 사슬(la chaîne du nœud borroméen)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작용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사실 말하자면, 이른바 보로메오 ‘매듭’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의 매듭(nœud)이 아닙니다. 그건 사실상 사슬(chaîne)입니다.
그렇다면, 왜 각 고리(boucle)가 각 사람 안에서 서로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이어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면 결국, 미쳤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 아닌 셈입니다.
제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조이스의 사례를 하나의 보완(suppléance)으로 이해해보자는 것입니다 — 그가 바로 이 풀려버린 구조(dénouement), 그 결속이 해제된 상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존재였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제가 여기서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 하나의 원이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구조는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고… 단순히 접어내리기(rabattre)만 하면 됩니다.
바로 이 접기 동작에서 숫자 8(형태의 구조)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구조에 대해 어떤 보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보완이냐고요? 여기에 하나의 고리(boucle)를 더해주는 것입니다.
그 고리 덕분에, 이 구조는 클로버 리프 매듭(nœud de trèfle, cloverleaf) 형태로 고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겨날 수 있는 풀림(floch) 상태로 흘러가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조이스의 사례를 이렇게 가정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모두에게, 혹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결코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compensation)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아버지는 단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방기하였고, 결국에는 모든 교육을 "좋은 예수회 신부들"에게, 곧 외교적 교회(Church Diplomatic)라는 체계에 맡기게 됩니다. 이 표현은 조이스 자신의 저작, 특히 『스티븐 히어로』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아버지는 교회를 “훌륭한 제도”로 칭송합니다. 여기서도 “외교적(diplomatique)”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조이스가 스스로 어떤 강박적인 소명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impérieusement appelé)는 이 사실 —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이 표현은 — 바로 그 부친의 실질적 폐제(Verwerfung)에 대한 보완적 구조로 작동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유명(nom propre)’이라는 것이 조이스에게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고유명에 대해 말씀드리겠다고 했고, 이제 비로소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조이스에게 고유명은, 단순히 아버지의 자리에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세운 가치로 이해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고유한 이 이름에만, 그 누구에게도 바친 적 없는 찬사(hommage)를 바치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조이스의 고유명이 단순한 주체표식 S₁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의 체계(S₂)로 향하는, 축적적 사슬 속에서 작동하기를 바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중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James Joyce, 그리고 Dedalus. 후자는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창조해낸 상징이자, 명백한 별칭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을 계속해서 쌓아올리다 보면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것은 고유명이 결국 보통명사(nom commun) 속으로 회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피로를 느끼셨을 겁니다. 아마 제 이름 “자크 라깡”도 이쯤 되면 지겨워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기에 “앙(han)!” 하고 안도의 한숨을 덧붙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han은 찾아보니 불어로 고된 일을 마치고 내쉬는 한숨, 혹은 '얏, 여차'하며 힘 쓰는 소리로 번역되는 듯 합니다. (역자주)
오늘 저는 제 고유명을 가장 보편적인 이름, 다시 말해 가장 흔한 이름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비로소 해방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