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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7

1 - complément

이어지는 보충(complement) : 어리석음(La Betise, Stupidity)


라깡은 올해 첫 번째 세미나에서 사랑에 관해 수천 가지 단어로 여러분에게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소식이 전해져 유럽의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나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분석 카우치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내게 소식을 전해준 내담자가 정말로 사랑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도 내가 여러분께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해주세요!" 이는 노래와 같습니다. 나는 연애편지, 곧 사랑의 선언에 관해 말하였는데 이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같진 않습니다.


내 생각엔 여러분이 이를 공식화하지 않았더라도, 이번 첫 번째 세미나에서 제가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올해 이 세미나 제목을 <앙코르 Encore>로 정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험을 직시하게 됩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나의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것, 곧 '당신이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나의 현전자체만으로 (적어도 감히 이렇게 믿고자 하는데), 담화 안의 내 현전 자체만으로 내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곳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 그것을 보장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그것에 조력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겠죠. 나는 '여전히(encore)' 이곳에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분석담화에서 어떤 조건으로 돌아가서 -즉 이 진리, 즉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진리,  성적 관계가 없다는 진리- 우리가 무엇이 어리석고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상, 분석담화에 관한 어떤 것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석담화야말로 어리석음의 차원을 용인하지 않습니까?


이 차원이 명백히 존재하면서도 이 차원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걸까요? 결국 성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분석담화가 쓸모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묘한 차이입니다)  내가 겁먹기를(mouiller, 속어로 '겁먹다', 혹은 '성적 흥분을 느끼다'로 해석 가능) 주저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성 바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나와 관련 없는 지위와 계보의 사람들과 타협하게 되더라도, 이게 날 두렵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타자로서 여성은 이 메시지의 결과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여러분께 맞게 재생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어리석음은 어떤 경우에도 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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