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즈음에 이케부쿠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네온사인을 찍으려던 게 전부였지만 놀면 뭐 하냐는 생각에 오전부터 방을 나선다.
그냥 반바지 입고 나올걸.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렸네.
이케부쿠로 역 주변은 하도 많이 돌아봐서 미리 자리나 잡아볼 겸 일찍이 지정된 장소로 간다. 생각보다 앵글이 애매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본다. 쉬운 줄 알았는데 사진가들이 기가 막히게 찍어낸 거였구나.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조금 더 걷는다. 그 어떤 목적이나 생각 없이 말 그대로 흐름에 맡기는 산책.
네리마 구 초입까지 닿고서 다시 돌아온다. 예상외로 여러 장을 찍었다. 예전에 캐나다 사는 동생이 “형은 정말로 찍고 싶은 거 전부 다 찍잖아.”라고 말했던 게 최근에 다시 떠올라 속박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진 덕이다. ‘의미’ 보다는 ‘본능’, ‘본능’ 보다는 ‘순수한 몰입’.
돌아가는 길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서 편집샵 같은 분위기를 띄는 가게를 하나 발견한다. 엄청 좁은 공간인데 궁금해서 한 번 들어가 본다. 여러 잡동사니들의 모양새가 꽤나 괜찮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보조 선수들이고 맥주가 메인메뉴다. 번역기를 꺼낼 시간. 중년의 사장님은 잔잔한 말투로 수제맥주를 한 잔 넘겨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Nujabes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타이밍도, 맛도 모두 완벽하다.
내가 일본어를 못하는 걸 아시는데도 틈틈이 말을 걸어 주신다. 노력하되 안 되는 건 바로 번역기 행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떠들며 가게랑 사장님 모두 자연스럽게 기록한다. 중간에 들어온 손님과도 친구가 되어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언어가 안 돼도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오늘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바로 옆에 오래된 야키토리 집이 매우 괜찮다며 다 같이 밖으로. 해가 진 줄도 몰랐다. 가라아게 포함해서 부위별로 2개씩 잔뜩 골랐는데 말이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 긴자에서 먹었던 곳은 정말 터무니없게 비싼 거였구나.
결제하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사장님이 사장님에게 나를 대신 소개해주시더니 대뜸 번역기로 “이왕 하는 김에 이 분들도 찍는 거 어때?”라고 물어보신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일이 어떻게 이렇게 진행되는 거지?
지금은 바빠 보이시니 이따가 문 닫을 때 즈음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가게로 들어온다. 좋은 안주들이 아까워 다른 종류로 한 잔 더 부탁드려요. 일본에 와서 내가 술을 아예 못 먹는 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주면 주는 대로 곧잘 받아먹는 모습이 나조차도 신기할 뿐.
형님께서 통역을 도와주신다며(비슷한 연배인 줄 알았는데 무려 나보다 10살이나 더 많았다!) 그의 뒤를 따라나선다. 진짜 불가능한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되긴 되는구나. 가게 안까지 들어서서 또 다른 부자를 향해 찰칵. 유쾌하신 아버님이 인상적이다. 90도 인사로 마무리.
도와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형님한테 말을 전했는데 느낌상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 짜샤!”라는 문장과 함께 내 어깨를 툭 건든다. 이 리액션마저도 감동적이다. 그러더니 요 앞에 리모델링한 가게에서 로컬 친구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2차 장소로 안내하겠다고 한다. 사장님과 악수하고 헤어진다. 정말 고마웠어요 센세.
완전한 소통은 불가해도 형님이 남들에게 소개해 줄 때마다 인사와 말 몇 개 던지는 걸로 퉁친다. 아아 이게 바로 ‘로컬’입니까? 그 어떤 거리낌 없이 성역 안에 들어온 듯, 전부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어떻게든 대화가 형성된다. 고구마 소주도 한 잔 얻어먹고 참 복 터진 날이구먼.
오늘의 Highlight Question : “도대체 너는 어떻게 이 거리에 오게 된 거야?”
스미다 구에서 넘어온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유니크한 이야기지만, 이 거리까지 당도한 게 그렇게나 신기해 보였던 듯. 솔직하게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여기에 와 있었다.”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다들 자지러지듯이 웃어재낀다.
그 와중에도 ‘캐주얼’ 한 만남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추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너무 솔직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식적이지도 않은, 딱 적당선을 지킨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
“너무 많은 지역, 국가의 사람들이 얽혀있다 보니 이곳에서는 다들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십수 년 이상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이니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도시는 참 어렵단 말이지.
막차 놓치기 전에 오늘의 만남을 모두 마무리 짓는다. 다시 혼자가 된다. 시간이 조금 남아 꾸역꾸역 네온사인까지 찍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친 하루다.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열차 속 인구밀도는 출근 시간때와 크게 차이가 없다. 이들과는 다르게 시간과 신분의 경계가 불분명한 나의 도쿄는 그렇게 점점 종장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