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7일

by 이승윤




새벽 빗소리에 잠깐씩 눈을 떴지만 컨디션은 괜찮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나갈 채비를 한다.



안에서 보던 것보다 비가 훨씬 많이 쏟아진다. 이때부터 오늘 하루가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너무 순진했다. 어제처럼 걸어서 센소지 근처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왔건만 특별한 축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늘 그렇듯 북적임의 이유는 9할이 관광객 덕이다. 비가 와서 준비를 천천히 하는 걸지도. 대비하고 있었던 첫 번째 고난이 찾아온다. 다급할 정도는 아니지만 복잡한 뱃속을 비우러 화장실을 찾는다. 행사가 있는 날에는 주변 편의점들 대부분이 화장실을 막아놓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 범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 조금씩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지만 가뜩이나 아침 시간이라 문 연 가게가 몇 없다. 좌절감과 함께 끝을 이야기하려 하는 순간 눈앞에 오픈 준비 중인 미용실을 발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어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못 들어갔을 것 같다. “화장실은 무료입니다.”라는 대답에 ? 와 ! 가 같이 떠오르며 곧장 안으로 들어선다. 아직 지구에는 인류애가 충만한 게 분명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을 나왔는데 몇 분 전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걸음걸이와 표정이 그 리얼함을 제대로 표현한다. 모쪼록 잘 해결하시길. 북소리가 들리는 곳을 쫓아 움직인다. 조금씩 들썩일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많은 인파들 속으로.



30분도 안 되어서 벗어난다. 나 자신은 머릿속으로 ‘열정이 식어서’ 혹은 ‘과거에 안주해서’라고 부정적으로 기억할 테지만, 이 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므로 부연설명을 남긴다.




-많은 비로 인해 사람들이 우비를 썼고, 그로 인해 모든 그림들이 가려졌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을 위해 왔는데 그 의미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 있으면서 두 번째로 비바람이 거센 날이었다(장담하건대 1시간 이상 그곳에 머물렀다면 내 카메라는 고장 났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강인한 모델이 아니기에 애지중지해줘야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가까이 갈 기회가 없었다. 이 정도 거리의 사진들은 이전에도 수없이 찍었다.


-비를 맞으면 축축하고, 축축해지면 사람들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 다가가는 것은 나 때려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밖에 가져온 모든 물품들이 비에 쫄딱 젖었다. 크로스백 대신 백팩을 챙겨서 그나마 이 정도로 막아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을 넘어 날아가고 있지만 이런 날에만 안정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장소가 남아있어서 카마타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부터 1km 거리인데 정말 쉽지 않다. 이제는 정신을 놓고 그냥 웃으면서 즐긴다. 이게 바람막이인지, 이제 막 세탁기에서 나온 재킷인지 구분이 안 된다. 꾸역꾸역 도착한 놀이터. 항상 아이들이 놀고 있어서 계속 다음을 기약했던 곳. 공중화장실에서 카메라 꺼내 노출 맞추고 돌격. 최대의 집중을 발휘해 후딱 치고 빠진다.



오늘 날 제대로 잡았구나. 바람에 나무가 쓰러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선이 계속 지연 중이다. 이 여정에서 가장 기대했던 날이 완벽한 최악의 날로 변모해 버렸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살았다. 식당 테이블에 전부 풀어헤쳐 놓고 앞에 놓인 음식들을 욱여넣는다. 어디선가 물이 떨어져서 계속 피부에 닿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는 게 불가능하다.



체감상 2시간 반 정도 머문 뒤에 다시 역으로. 집 근처에 도착하니까 귀신같이 비가 멈춘다. 난 오늘 다 접었으니 당신 하고싶은대로 하쇼.



무언가 잘못됐다 싶으면 꼭 운세를 찾는다. 이건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신사 두 곳에서 모두 최악의 불운을 뽑은 게 떠오른다. 솔직히 이제 운이 안 따라 줄 때도 됐어. 벌써 몇 년 넘게 말이 안 될 정도로 받아먹었으니까. 그래도 난 계속 할거야. “어떻게 말해줘도 자기 하고싶은대로 할 거면서 왜 찾아왔어요?”라고 점쟁이들이 이야기할 정도니까.



드디어 집이다! 조심스럽게 하나둘씩 몸에서 해제한다. 에어컨 제습기능이 고생 좀 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수영복 같았던 반바지가 돌아오면서 거의 다 마른 게 참으로 신기하다. 침대에 엎어지기 전에 빨리 샤워부터 하자. 오늘은 버텨낸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