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7일

by 이승윤




연속으로 흐린 날을 유지하고 있지만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토요일에 왕창 뱉어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살짝 감돈다. 운동하는 날을 제외한다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오늘과 목요일뿐이다. 회심의 일발로 나리타, 혹은 그 너머에 있는 사와라라는 곳에 가 볼까도 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의미 없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에 결국 모두 접어서 버린다.



가보았던 곳을 또 가보고, 시간대 상관없이 움직여 보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다. 사진에 질린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프로젝트가 이미 종료되었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까닭 때문이다.(살짝 긴가민가 했지만 나는 지금도 매일 사진을 찍고 싶다.) 조금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5월 20일의 이야기가 그만큼 완벽한 마무리였던 것이다. 늦잠을 자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을 필요 없이 침대 위에서 세상 편하게 ‘휴가’를 즐겨보지만 그새를 참지 못하고 좀이 쑤셔온다. 안 되겠다. 집 앞에라도 나가자. 카메라와 함께.



두 달 전 처음 마주했던 철로를 다시 보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렇게 집이랑 가까웠었나? 그때나 오늘이나 건너려 할 때 맞춰서 열차가 지나가는구나. 여전히 조용하면서 아늑한 풍경을 가지고 있는 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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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알맞은 전원적인 음악이 들려온다. 음식을 판매하는 가게들 위주로 사람들이 모여있다. 계속 앞으로 앞으로 하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는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신기해 가까이 가 본다. 자그마한 카페다. 서로가 무척이나 친한 듯 떠들썩한 분위기에 불청객처럼 난입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인원들의 절반 이상이 영어를 제법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이 거리 주변에서 10년 이상 버틴 로컬 피플이라는 사실이 꽤나 놀랍기만 하다. 사연들도 제각각이다. 카페 주인 부부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커피를 배운 뒤에 다시 돌아와 이곳에 정착했고, 또 다른 이는 UN에서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본인이 그렇게 얘기함.) 부모님의 목욕탕을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설마 했는데 퍼펙트 데이즈에 나온 그 목욕탕이었다!) 나의 스토리도 위에 조금 얹는다. 역시나 놀라는 리액션. 나 또한 당신들의 삶이 신기할 뿐이오.



지난번 동생과 블루스 바에 갔을 때, 그리고 이 시간도 나를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이런 분위기가 아주 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결이 안 맞는다는 그런. 어떤 부분에서 어긋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의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나도 그들처럼(캐나다에서도 친구들을 보며 느꼈지만) 착륙하는 날이 오거나, 혹은 달리는 와중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도 그려볼 수 있겠지. 당장은 후자에 더 가까우리라 예상하고 있다.



하나둘 씩 더 모여드니 어느덧 스무 명 가까이 한 장소에. 국적 또한 다양하다. 내 입장에서는 영어를 더 쓸 수 있으니 좋지만 주객전도가 되는 느낌이 드는 건 또 별로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이탈리아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연배가 많은)가 말을 건다. 로컬 프로젝트 중 하나로 탁구대를 만들어서 공원에 갖다 놨는데 같이 탁구 좀 치고 가라고 한다. 나에게 남은 건 저녁식사뿐이니 안될 거 없지.



간단한 랠리와 함께 영어, 일본어를 오가며 대화를 이어간다. 생각보다 수월한 진행. 지나가던 여러 이웃들과도 인사한다. 그중에서도 자기 와이프가 한국사람이라며 인천에 장모님 뵈러 간 사진을 보여주신 할아버지는 더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돌아가기 직전에 이런 경험을 다 해보네. 하지만 ‘며칠만 더 있었다면..’과 같은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 진짜 세 달 동안 완벽하게 불태웠어.



6시가 조금 넘어서 헤어질 준비를 한다.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부부는 영화를 보러 시부야로 떠난다. “마타네!” 오늘의 마지막 일본어다. 아까는 활짝 열려있던 가게들의 셔터들이 지금은 모두 내려가 있다. 빈 거리를 홀로 걷는다. 약간은 쓸쓸하지만 나에게는 역시 이 색깔이 더 알맞지.



고개를 올려 쳐다본 스카이트리는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다. ‘내일’ 이 아니라 ‘다음 여정’을 떠올리고 있는 걸 보니 여기 생활도 정말 끝에 다 와가는 듯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