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한 일들이 많은 날이지만 원하는 만큼 자고 일어난다. 비는 꽤 많이 내리고 있다. 전부 다 완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약간 든다. 시간에 맞추어 할 수 있는 만큼만 진행하기로 한다.
돌아가기 전날까지도 운동은 놓지 않는다. 2연투는 조금 버겁지만 깔끔한 마무리를 원한다. 1시간 정도 알차게 채우고 샤워실로. 시간에 쫓겨도 마지막 온탕은 안 놓친다. 그동안 진심으로 고마웠어. 덕분에 몸 멀쩡히 돌아간다.
타이밍을 놓쳐서 점심은 대충 해결한다. 순식간에 해치우고 빨래방으로 향한다. 운이 좋게도 이때 잠깐 비가 멈췄다. 비어있는 세탁기에 전부 밀어 넣고 나서 남은 시간을 활용해 근처 무인양품에 가 잡화 쇼핑을 한다. 아직 절반도 쓰지 않은 올인원크림의 가격이 괜찮아서 하나 더 구매. 이 정도 됐으면 전부 다 알아들을 법도 한데 여전히 계산대에서의 대화는 100% 성공률을 달성하지 못한다. 돌아가서 계속 공부해야지.
건조된 옷가지들을 방으로 가져와 차곡차곡 접어 침대 위에 쌓는다. 어차피 오늘 밤에 짐을 싸야 하니 번거롭게 서랍으로 다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많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모든 일을 빠르게 해치우고 나니 딱 갤러리에 갈 시간이 됐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적당히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선다.
집에서 지하철역, 타야 할 열차와 번호, 출구에서부터 갤러리까지 지도 앱을 열어보지 않고 해낸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약간의 뿌듯함을 느낀다. 대충 넘기지 않고 매일매일을 ‘집중’ 하며 살았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나? 오픈 시간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갤러리에는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진집으로 먼저 경험했지만 프레임 속에 인화된 개별 이미지들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나는 또다시 깊게 빠져든다. 대화는 조금 나중에 할게요.
뉴질랜드에서 광고업을 하고 있는 Luke, 전시작가인 Alain, 그리고 사장님과 함께 모여 이리저리 떠든다. 그의 스토리와 프로젝트의 배경설명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찍는 스타일과 마인드셋(인생관 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이 나랑 완전 정 반대여서 더 귀 기울였는지도. 이런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나의 무의식적인 경계와 선입견들이 조금이나마 허물어진다고 생각한다. 다음 약속 장소로 떠나기 전 단체사진을 찍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말이 잘 나오는 날이 아니지만 어렵사리 아는 영어 문장들을 뱉어낸다. Alain의 마지막 답례가 인상적이다. “지금은 정말 어려워. 내가 젊었을(5-60 대 정도로 보였다.) 때와 비교해 보면 끔찍한 수준이야. 결국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해.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만큼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랄게.”
금요일이지만 늘 그렇듯 열차 내부는 매우 삭막하다. 나 혼자만 다른 행성으로부터 온 사람 같은 기분. 이건 언제 마주쳐도 적응이 안 된다. 이 삶을 버텨내는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진심으로.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돌아왔지만 예고르와 Tim 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쌀쌀해서 저번에 갔었던 집 앞 가게부터 확인한다. 딱 한 테이블 남아서 바로 들어간다. 정말 마지막 날이라고 하늘이 길을 터주는 것인가. 바로 뒤이어 동주 씨까지 합세해 오늘의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한다. 첫 잔으로 주문한 레몬사와가 몇 모금 들어가니 비로소 오늘의 긴장감이(어쩌면 ‘이 여정 전체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두 내려간다.
3개월 동안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모일 때마다 정말 마음 편하게 대화하는 기분.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랫동안 친했던 애들과 함께해도 이런 느낌을 받기 쉽지 않은데 참 신기하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지는 주제들 덕분에 끝이 없다. 영업시간이 끝나 가게를 나온 뒤에도 인도에 서서 30분 넘게 떠들었을 정도니까.
11시가 조금 안 되어서 방에 들어온다. 얼마 안 가 곧바로 Tim 이 문을 두드린다. 내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며, 몇 시에 떠나냐 묻는다. 12시 즈음에 나가지 않을까? 그전에는 무조건 일어날 수 있다며 그는 호언장담하고 문을 닫는다.
방을 둘러본다. 첫날 이곳에 막 들어선 느낌과 별 차이가 없다. 공허하면서도 편안하다. 창문을 연다. 옆 집 창문에 반사되어 보이는 스카이트리는 웅웅 거리며 빛을 뿜고 있다. 그 어떤 특정한 색이 아닌 무지개 색으로.
-마이 퍼펙트 데이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