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처음으로 필름카메라와 함께 한다. 하지만 필름을 장착하지는 않는다. 왠지 이 카메라로 오늘 사진을 찍지는 않을 것 같아서(이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따로 챙기기만 한다. 온도를 확인하고 집을 나왔는데 너무 추워서 다시 갈아입고 출발한다.
아직도 ‘시부야’와 ‘신주쿠’를 헷갈린다. ‘하라주쿠’를 더하면 더 헷갈린다. 준비해 왔던 장소들의 90% 를 돌아본 현재 이 하라주쿠 주변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사진, 커피, 그리고 잠시 연결되었던 몇몇 사람들과도 잘 맞아서 그런 거겠지. 힘들 게 뻔하지만 오늘은 좁은 골목이 아닌 메인 도로로 나아간다. 주말 명동 거리 확장판이다. 결국 오래 못 버티고 탈출한다. 방문을 계획했던 어떤 장소는 패션위크 때문에 행사 중이라 들어가지도 못했다.
뜬금없이 머릿속에 ‘와세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조금 멀지만 홧김에 간다. ‘더운데 쌀쌀하다’라는 표현 외에 이 날씨를 표현할 자신이 없다. 눈에 '번쩍' 하고 들어오는 게 없다. 어제 끝까지 달려서 그런 걸 지도.
와세다 대학 바로 옆 작은 신사에서 잠시 휴식한다. 30분 정도 앉아서 앞에 놓인 커다란 나무를 바라본다. 많이 누그러진 빛을 고루 받아서 대비가 적다. 마음은 고요하다. 이상하게 이런 기분은 늘 금요일에 찾아온다.(적어도 도쿄에선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찾다가 도쿄 돔의 위치를 발견한다. 별로 안 멀어서 여기까지 찍고 귀가하는 걸로. 일종의 위기의식(?) 때문에 돌아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첫 주에 왔었던 카구라자카 또한 중간에 끼어있어서 우연찮게 두 번째 만남을 가진다. 하나 다행인 점은, 사진을 찍지 않았음에도 전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꽤 높은 롤러코스터와 함께 도쿄 돔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생에는 당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메이저리그 초청경기가 며칠 전에 다 끝났는데도 지나치게 사람들로 북적인다. 뭔가 이상해서 옆 코너로 돌아가 본다. 경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시간 반 뒤에 프리시즌 경기가 있다고 한다. 아키텍처로서의 돔구장을 구경하러 온 나는 곧바로 관람객으로 변신한다. 야구 꽤나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놓칠 이유가 없으니까. 티켓 부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말이 안 통할까 또 걱정이다. 괜한 마음에 옆 라인에 서 있던 젊은 남자에게 말을 건다. “이 두 개 중에 어느 쪽이 더 보기 좋아요?”라고 물어보고 티켓을 구매하려 했던 거였는데, 얼떨결에 나란히 같은 곳으로 배정되는 시나리오로 흘러간다. 그 친구도 혼자 왔다는데 괜히 시간도 뺏고 난처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내 카드로 간식을 결제한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애써 영어로 대답해 주려 노력하는 일본인은 이 친구가 처음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어렸을 적 기억은 남아있지 않으므로) 첫 경기장 관람, 첫 도쿄 돔.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돔 구장 내부는 매우 아름답다. 걱정과는 다르게 선수들이 모두 잘 보이는 센터 방면이다. ‘일본프로야구 출범 이후 이름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유일한 팀’이라는 이 구장의 주인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든다. 앉은 지 10분 밖에 안 되었는데도 다음 달 시즌 티켓 가격을 생각한다. 때마침 친구가 번역된 문장을 보여주는데, 이 경기가 끝나고 고향인 나고야로 내려가서 5월 중순 즈음에 다시 도쿄로 온다고, 그때 또 같이 보러 올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 그때 하는 주니치와의 경기는 꼭 봐야 된다길래(연고지 때문에 주니치 팬이냐고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라고. 이해를 제대로 못 했는데 집하고 위치 차이가 나서 팬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바로 라인 아이디를 건네준다.
서로 어찌어찌해서 관람하는 동안 단어 위주로 계속 소통한다. 그 와중에 두 팀 모두 야구를 너무 잘해서 놀라울 지경이다. 첫 직관 보너스인지 국가대표 출신 선발투수에, 홈런부터 162km 파이어볼까지 다 보여준다.
이 땅에 발을 들인 이후로 이따금씩 '내가 여기서 태어났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머리를 굴려본다. 확실한 건, 비슷한 가족의 색깔과 성장환경이었다면, 지금과는 아예 반대로 살았을 것이다. 적당히 돈 벌면서 사진 몇 장 찍고, 시간 날 때 조용한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직접적인 팬질은 아니더라도 주에 한두 번 정도 한 손에 맥주 들고 야구장으로 출근하면서 살 것 같은 그런 삶. 무언가에 전력을 쏟아붓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반대도 썩 괜찮을 것 같다는 걸 올해 처음 느낀다.
점수 차가 많이 나서 9회 초에 둘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선뜻 먼저 찍자고 물어봐 줘서 한번 더 놀란다. 이번 달 최고의 하루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경기장에서 나와 각자 갈 길로 간다. 라인에는 번역된 문장을 남긴다. 나중에 또 얼굴 보면 참 좋을 텐데.
다시 익숙한 곳에 가까워진다. 3주 차인데 사진 속 내 얼굴이 너무 까무잡잡하게 나와서 당혹스럽지만 뭐, 갈수록 더 진해질 테니 익숙해져야겠지. 역에 내려서 간식거리 조금 사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거치는 골목은 오늘도 조용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