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길을 막아

길마가지나무

by 배초향

겨울이 깊어가면 사람들의 활동도 많이 줄어든다.

집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어 봤자 나오는 것은 뱃살밖에 없다.

나의 숲 친구들은 주말이면 다들 산으로 나온다. 봄에는 10명이 못되지만, 겨울이면 매주 만나도 10명이 넘는다.

겨울은 애경사 참석도 적고, 주말 약속도 적다 보니 더 많이 모인다.

오랫동안 만나다 보니 어느새 얼굴에 주름이 그려졌지만 주름이 있든지 말든지 우린 아직 청춘이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10년 전 우리들 사진을 앨범에서 꺼내 돌려 보며 그땐 우리도 젊었다며 감탄한다. 겨울 산에 뭐가 볼 게 있다고 찾아다니느냐고 하지만 언제나 새롭고 다양한 겨울나무 모습을 보는 재미는 백화점에서 명품 가방 사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다.


나무들이 잠들어 있는 겨울 숲 속은 나무들의 숨소리조차 잘 들린다, 황량한 바람 속 자장가 소리에 그들은 꿀잠을 잔다. 숲 속 움직이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산새들도 겨울에는 크게 울지 않고 다들 웅크리고 지낸다. 산속의 겨울바람은 차갑지만 춥지는 않다. 아마도 곁에서 살갑게 미소 짓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흥분해서 그러는지. 나무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며 살아간다.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칭한다. 식물인간은 두뇌가 움직이고 있는데 밖으로 표현을 못 한다면 맞는 말 이겠지만 나무는 살아가기 위해서,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변화를 거듭하며 전략을 꾸며가며 지금까지 긴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보통 겨울산 산책은 겨울눈과 엽흔을 보기 위해서다. 눈이 펑펑 내린 1월이었는데 어디선가 향기로운 듯한 냄새와 강한 끌림이 있었다. 살금살금 가보니 눈 속에서 조그마한 꽃이 피어있었다. 얼마나 안쓰럽게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지 가는 발길을 다들 멈추고 인사 나눴다. ‘어찌해서 지금 피어나서 고생을 하고 있느냐’고. 워낙 추울 때 피는 꽃이지만 따뜻한 겨울날을 봄으로 착각했나 보다.

그래서 봄이 되면 이 나무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다. 흔하지 않은 나무라서 찾아다녀야 볼 수 있는 길마가지다.




봄에 일찍 피는 대표적인 나무가 납매, 풍년화, 길마가지나무이다. 눈 속에서 가장 먼저 피는 납매는 중국에서 왔고, 풍년을 몰고 온다는 풍년화가 그 뒤를 따르는데 일본종이다. 풍년화가 지고 나면 길마가지가 피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다. 올림픽공원에 풍년화와 길마가지나무가 이웃하고 있다. 풍년화가 피었다 진 후인 3월 11일에 활짝 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올림픽공원이 우리 집에서 가까워 주말에 한 바퀴 씩 돌며 올해는 기필코 사진을 찍겠다고 벼뤘다. 기온에 따라 피는 날짜가 일정하지 않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른 봄꽃을 찍기 위해서는 발이 부지런해야 한다. 4번을 가서야 활짝 핀 길마가지나무를 영접할 수 있었다.


길마가지는 인동과의 낙엽 관목으로 3m 정도로 긴 줄기가 늘어진다. 줄기는 약간 너덜거리며 벗겨져 있다. 이른 봄의 나무나 꽃들은 모두 추위를 피하기 위해 털을 복슬복슬 덮고 있다.

꽃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양성화로 잎겨드랑에 2개씩 달고 아래로 향하고 있다.

꽃받침이 5갈래로 얕게 갈라져 있다

5개의 수술에 붙은 꽃밥은 노란 하이힐을 신고 날아갈 듯 걸려있다. 그리고 안에 하나의 암술을 잘 보호하고 있다.

꽃이 진 후 잎은 바로 마주 달린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로 향기가 좋다’라는 의미로 길마가지가 되었다. 노란빛이 도는 흰색의 꽃은 은은한 향기를 풍기지만 일주일도 못 버티고 사라져 버리는 아쉬운 꽃이다. 겨우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이 많은 송이들을 만들었겠는가 생각하면 대견스럽다.

한꺼번에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는 봄꽃들은 대개 무수한 꽃들을 쏟아내고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곧 피기 시작하는 벚꽃과 같다. 그들은 생을 짧고 굵게 선택했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열매가 5월이면 익어가기 시작한다. 2개의 열매 기부가 완전히 합착되어 작은 심장형으로 달린다. 어찌 보면 빨간 바지모양 같기도 한다. 또 한 번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사람과 같이 그들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니 너무 일찍 떠나 버린 이른 봄꽃의 퇴장을 아쉬워하지 않고 내년을 또 기다려야겠다.


풍년화

납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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