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페트라 펠리니-
자동차에 뛰어들어야겠다.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눈이 휘둥그레진 채 피가 흐르는 상처를 빤히 보겠지. (중략)
나를 차에 뛰어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케빈과 후베르트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현실처럼 보이지만 현실이 아니다. 아마도 린다는 줄곧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에 뛰어드는 장면'이 그녀에게 상상처럼 툭하고 떠오른 듯하다. 모든 것과 서로 충돌하고 있는 그녀의 내면이 만들어낸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감과도 같은 첫 장면. "케빈과 후베르트, 이들 둘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작가는 마치 "나중에 이 두 사람이 린다 너를 살릴 거야"라고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열다섯 린다는 이웃집 노인 후베르트를 돌본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85세의 그를 간병인 에바(폴란드인)와 함께 지킨다. 40년 넘게 수영장 안전요원으로 일했던 그는 이제 느리게, 아주 느리게 세상을 떠나고 있다.
린다의 곁에는 친구 케빈이 있다. 린다와 케빈, 둘 다 이혼가정에서 자랐고, 어른들의 불안과 피로는 안개처럼 두 아이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들에게 삶은 종종 너무 빠르고,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서, 그들은 그걸 따라가느라 자주 숨이 차고 지친다. 그래서 슬프다.
호수에 잔물결이 인다. 잠수부들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왔다가 사라지고, 떴다가 또 가라앉는다. 모두 물속에 있으면 조용하다. 호수가 그들을 삼킨 것 같다. 어쩌면 죽음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잠수하고, 그걸로 끝.
린다는 죽음을 잠수처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잠수처럼 물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사라진 자리에 엄청난 고통이, 질문이, 부재가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은 사람을 산산이 깨뜨리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에게 케빈의 죽음은 죽음을 추상에서 현실로 바꿔놓는다. 결국, 케빈이 죽음으로부터 그녀를 붙든다. 그리고 어느 날, 잠수하듯 차에 뛰어들고, 우연히 어긋난 그녀의 계획이 그녀를 살려냈다. 그리고 케빈과 후베르트, 둘 다 린다를 붙잡던 존재들이 떠난 뒤 남은 빈자리에서, 죽음을 상상했을 때처럼 그들을 통해 삶을 붙들게 된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들이 산자를 살렸다. 떠난 이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에서, 린다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는다.
후베르트는 린다에게 '죽음'으로 삶을 가르쳐 준 존재이다. 그녀 자신과 혈연도 아니고, 이웃집 노인일 뿐이고, 돈을 받고 돌보고 지켰던 관계였다. 후베르트의 죽음은 그녀에게 '관계의 신비'에 대한 실체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를 통해 그녀가 생각하는 죽음이 추상적 개념에서 구체적인 현실로 바뀐다. 후베르트의 죽음을 지켜본 그녀는 살아가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의 죽음이 그녀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 것이다. 이렇게 그는 그녀가 삶을 붙잡게 한다.
린다처럼 케빈도 부모의 이혼 가운데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 삶에 몰두해 있었고, 어머니는 자주 자기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이가 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절망이었다. 관계에 대한 불안, 버려짐의 기억, 가족 붕괴, 자존감의 붕괴, 깊은 고립과 같은 자신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 고통을 누군가와 언어로 연결할 수 없었다. 이런 고통과 혼란을 겪고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정서적 어른의 부재는 그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사람을 감싸는 보이지 않는 껍질을 “오라”라고 부른다. 살아가는 동안 그 껍질엔 점처럼 검은 구멍이 박힌다. 상처, 결핍, 편견, 그리고 말해지지 못한 고통들. 그 구멍은 때로 기쁨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느껴진다. 케빈은 그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같은 고통을 겪어도 누군가는 붙잡을 손이 있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도 없다.
사고 이후 생존한 린다가 거기서 멈출 수 있었던 이유는 후베르트, 에바, 할머니와 같은 버틸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게다가 케빈의 죽음은 린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새롭게 이해하게끔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지 않았을까. 반면에 케빈은 그 연결고리가 모두 부서진 상태였다. 케빈에게는 버틸 수 있는 구조가 없었다. 그래서 린다가 겪은 사고는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는 절망의 촉매제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린다의 생존은 '행운'이 아니라 '관계'였고, 케빈의 죽음은 '불운'이 아니라 '고립'이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다
여기에 나오는 유일한 '진짜 어른', 린다의 할머니. 할머니는 손녀, 린다에게, 그리고 린다도 할머니에게 호프만슈탈의 이 말을 서로에게 수시로 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우연의 산물이다. 세대가 다른 할머니와 손녀가 이렇게 교차하는 것도, 특정한 순간에 할머니와 손녀로 만나는 것도 어찌 보면 전부 기적 같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며, 그래서 서로에게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된다. 이 말을 통해, 할머니는 손녀에게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관계를 넘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그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린다의 삶에서 대부분의 어른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것에 빠져 있고, 아이에게 감정노동을 시키고, 불안을 떠넘기고, 린다를 그들의 방식으로 규정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만큼은 그녀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바라본다. 할머니가 손녀와 주고받은 말은 그냥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린다의 존재 전체를 인정해 주는 '존재론적 환대'에 가까운 언어다. 이 이야기에서 할머니만큼은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어른이다. 세상과 싸우지 않고, 아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던져놓지도 않는다. 린다에게 할머니는 무너지는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안전했던 세계였다.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존재 그대로 바라봐준 사람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내면을 읽어낸 어른이며, 죽음과 삶 사이에서 길을 밝힌 조용한 등불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는 린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이런 말이 없었다면, 린다는 케빈과 후베르트의 죽음을 '삶의 이유'가 아니라 '삶을 끊어야 할 신호'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붙잡는 할머니와 함께 주고받았던 이 말은 그녀의 세계관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같은 시간을 함께 산다는 것은 관계가 주는 신비로움이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통과하며 서로를 바꾼다. 후베르토, 케빈, 할머니, 주인공이 서로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관계를 통해 서로를 바꾼다. 그 과정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더 귀하고, 이해할 수 없어서 더 오래 남는다. 린다에게 후베르트와 케빈은 그런 신비로운 관계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주인공이 살아야 할 이유로 되돌아 온다.
삶을 돌려세우는 것은 종종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어긋남이다. '차에 뛰어든' 그날의 우연이 계획을 무산시키고, 그리고 삶을 다시 붙잡게 한다. 우리는 그 틈에서 겨우 숨을 돌린다.
후베르트와 케빈의 죽음. 여기서 두 사람의 죽음은 그녀에게 파괴가 아니라 질문이 된다. 남겨진 자는 묻는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린다는 결국 “누군가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보낸 순간들이 고스란히 내 시간 위에 쌓이고 겹쳐져, 서로의 삶을 바꾼다. 이 겹쳐진 시간에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린다에게 후베르트와의 시간은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들었고, 케빈과의 시간은 삶의 불안과 고립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만든다. 할머니와의 시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를 갖게 만들었고, 에바와의 시간을 통해 돌봄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시간들이 그녀의 삶에 덧입혀져 그녀를 바꿔놓는다. 그것이 바로 겹쳐진 시간의 신비로움이다. 죽은 자는 사라지지만 그들과의 겹쳐진 시간들은 남아서 린다를 살린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라는 점이다. 삶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이해가 된다. 어제 케빈과 나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이 불안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은 맹렬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거기 부응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항상 뭔가를 증명해야 하고, 자기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슬프다. 정말 슬프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여전히 증명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돌봄, 우연의 작은 어긋남이 우리를 살린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 우리는 지난 겨울, 계엄의 밤에 이 말을 증명해냈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신비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다.
나는 오늘, 누군가의 시간과 겹쳐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 삶의 궤적을, 그리고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바꿔놓을 때가 있다. 말 한마디, 작은 행동이 평생 기억에 남고, 내 존재를 흔드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가 내 삶에 남겨놓은 그 흔적이 '신비로운 의미'가 아닐까. 서로는 서로의 시간을 통과해 서로를 만들고, 그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살제로 기적과도 같은 신비로운 일이 나의 삶에도 일어난다. 그것을 내가 알든 모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