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앞의 생'이 말하는 사랑의 연속성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이 책을 읽기 전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작가를 먼저 알고 들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그가 이미 작가로 이름이 알려진 로맹 가리였다는 것. 안타깝게도 로맹 가리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을 그의 방식으로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유서에 이렇게 남겼다.
에밀 아자르는 나였다.
그리고 어떤 문학적 사기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작가가 새로운 형태를 찾아낸 것뿐이다.
그는 그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이름을 바꿔 등단한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한 사람이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나는 로맹 가리가 쓴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낯설지만 솔직한 시선으로 이 작업을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는 가난, 질병, 노년, 차별, 이민자, 매춘하는 여성들의 아이, 폐기되는 삶과 같은 소재들이 사용된다. 슬픔과 비극을 연상시키는 이 소재들을 작가는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인간의 존엄이 그의 작품에 일관된 주제였다고 하는데 그는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인간 존엄은 죽지 않고 버텨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생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안락사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을 더 견뎠으면 다시 뭔가를 새롭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은 누구나 공백을 경험한다. 말이 안 나오는 시기, 창작이 막히는 시기, 의미가 사라지는 시기. 우리는 어차피 완벽하지도 않고, 늘 잘할 수도 없다. 어쩌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간의 무위함을 인정하고 버텨내는 것, 이것이 삶을 살아내는 힘이고, 이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것은 아닐까.
그가 선택한 삶의 마지막과는 달리, 그는 이 소설에서 끝까지 버티고, 서로 기대고, 무너져도 다시 살아가는 파리 빈민가의 인물들, 모모, 로자 아줌마, 롤라 아줌마, 하밀 할아버지, 카츠 선생님 등을 그렸다.
모모는 태생적으로 강한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조건만 놓고 보면 아주 취약한 상태에 있는 아이다. 그러나 모모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존재를 버티게 해 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만 알았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내가 몹시 슬퍼하는 것을 보고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중략) 그러고는 나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그녀에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몇 번이고 맹세했다(1).
로자 아줌마는 완벽한 어른이 아니다. 불안하고, 고집 세고, 때로는 아이에게 짐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모모에게 자신이 끝까지 버려지지 않을 존재라는 확신을 준다.
카츠 선생님은 비송 거리의 유태인과 아랍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적인 자비심을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밤늦게 찾아오는 사람 사람까지 다 치료해 주었다.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건네는 관심 어린 말을 들은 것도, 내가 무슨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양 진찰을 받은 것도 바로 그의 진료소에서였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만약 내게 아버지가 있을 수 있다면 카츠 선생님 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3).
카츠 선생님은 제도 안에 있는 사람이지만 제도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어른이다. 사람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고치려 들지 않았고 모모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런 어른을 한 번이라도 만난 아이는 "세상 전체가 나를 적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하메드,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너 자신 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참 좋은 아이야. (중략) 할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다. 만약 평생을 양탄자 행상으로 떠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마그레브의 다른 성인인 시디 우알리 다다처럼, 물고기들이 짠 하늘을 나는 양탄자에 앉아 있는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4).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기다리는 법과 시간의 깊이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어주는 관계로, 인생이 지금 당장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이것은 즉각적 해결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힘, 즉 회복탄력성의 핵심이다.
다행히도 우리를 도와줄 이웃이 있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롤라 아줌마였다. 그녀는 불로뉴숲에서 동성연애자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아줌마에게는 차가 있었기 때문에 일하러 가기 전에 종종 우리 집에 들러 일을 도와주었다(18).
롤라 아줌마는 사회적으로 가장 주변부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람들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이건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이다.
이 어른들은 공통적으로 모모를 판단하지 않고 그냥 한 인간으로 대했다. 사람은 혼자 회복되지 않는다. 회복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모모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붙잡아주는 관계가 여러 방향에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모모의 회복탄력성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불완전한 선의가 서로 엮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완벽한 어른은 한 명도 없지만, 그 불완전함들이 모여 아이 하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정해진 법 때문에 자기 뜻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할 적마다 울음을 터드렸다.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12).
로자 아줌마는 병원 가기를 싫어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잔인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의 손에 맡겨 어떤 상태로 자기 삶의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주장한다. 적어도 마지막은 이래야 한다는 로자 아줌마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인간 존엄인 것 같다. 로자 아줌마의 이러한 말은 아마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듯하다.
법이란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은 오랜 삶의 경험에서 나온 뼈 때리는 말이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법을 왜곡해서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기득권들을 우리는 지금도 인내로 견뎌내고 있다. 법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 이미 삶이 무너진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에는 소극적이다. 오히려 법이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구속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재산이 있고, 가족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더 적극적이다. 아마 그들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은 선택권이 있는 가진 자와 선택권이 없는 사회적 약자, 이들 모두에게 허락되는가? 로자 아줌마는 마지막조차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노인들은 겉으로는 보잘것없이 초라해 보여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 그들도 여러분이나 나와 똑같이 느끼는데 자신들이 더 이상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보다 더 민감하게 고통받는다. 그런데 자연은 노인들을 공격한다. 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라서 그들을 야금야금 파먹어간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인을 안락사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 그들을 천천히 목 조르고 결국엔 머리에서 눈알이 튀어나오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 더 늙을 수 있었다(19).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명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30).
지하실에 도착하자마자 로자 아줌마는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중략) "모모야, 언젠가는 이 방이 나한테 꼭 필요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식물처럼 살면서 세계기록을 깨는 일은 없겠구나(30)."
로자 아줌마와 모모가 말하는 죽음의 공포는 삶의 마지막을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가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가. 로자 아줌마는 그러기 위해서 모모를 선택했다. 모모는 그녀의 선택을 도와, 그녀의 삶을 이해해 준 증인으로 남아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자 아줌마의 존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가장 또렷해진다. 그 순간에 모모에게 그녀는 환자도 아니고, 문제의 대상도 아니며 짐도 아니었다. 그냥 그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열네 살 소년은 끝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시선으로 대했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나딘 아줌마 가족)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중략)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31).
하밀 할아버지는 사랑을 영원한 약속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은 한 시기를 살아내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이 사라져도, 다음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그녀는 영원히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이 다음 사랑을 금하지는 않는다. 모모에게 사랑은 연속성으로 이어진다. 로자 아줌마와 함께 했던 시간, 하밀 할아버지와의 시간, 롤라 아줌마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용, 카츠 선생님의 이해, 그리고 이제 나딘 아줌마의 돌봄으로 그 사랑은 이어진다. 이렇게 그들과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모는 상실이 결핍이 아닌 관계의 흔적으로, 사랑의 끝이 공허가 아닌 다음 삶으로 건너는 다리로 방향 전환을 하려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세상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이다. 사람은 한 사람을 잃고도 살 수 있다. 단, 그 사람이 남긴 사랑을 다음 삶으로 가져갈 수 있다면 말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모모는 그것을 아주 자연그럽게 배웠다.
이 소설은 모모의 어린 시선 때문인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기이한 따뜻함과 유머가 있다.
결국, 인간이 가진 존엄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인간의 존엄은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가 허락해 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지켜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존엄은 법이나 제도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하고 관리하고 구제한다는 논리로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존엄을 보장하기보다는 존엄을 박탈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때가 많다. 로자 아줌마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분노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엄은 제도 밖에서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모모 주변의 완벽하지 않지만 선한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그 경험이 쌓이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은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만들어낸 존엄이다. 우리는 흔히 "존엄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존엄은 상대에 대한 나의 존중의 의도와 함께 누군가가 나를 끝까지 인간으로 대해주었을 때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존엄은 상대방의 이런 의도 뿐 아니라 내가 상대에 가진 의도도 나의 존엄을 강화시킨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서 자신이 존엄을 되찾고,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돌보면서 자기 존엄을 배우게 된다. 로자 아줌마의 공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쓴다.
인간의 존엄은 "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확신이 생길 때 만들어진다. 그 확신은 혼자서는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내 삶의 속도를 기다려줄 때, 그래서 내가 나로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에 만들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가볍게 다루지 않고, 나와 같이 생각을 가진 존재로 대할 때 나 자신을 존중의 주체로 경험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존엄이란 함께 상호작용에 의해 나의 존엄이 생기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나, 상대의 태도와 행위에 따라 흔들리는 나의 존엄이 아니라, 상대와의 다름을 견디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라고 정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