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다고 믿었던 세계의 균열

견디는 삶의 단편들 | 타운하우스, 전지영

by 레몬 브리

『타운하우스』라는 책 속, 8개의 단편들은 모두 다른 인물과 다른 사건을 다루지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하나의 뼈대처럼 이어진다. 말의 눈이 바라보는 인간의 모순, 자신에 대해서는 종종 눈을 감는 누군가의 맹점, 사람들의 익숙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언캐니 밸리,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안과 잔해들이 마치 타운하우스에 사는 이웃집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작가는 일상의 구조를 거의 변형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어딘가 잘못 끼워진 조각 하나를 드러내는 데 참으로 탁월하다. 그래서 이상하게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 바깥에 걸쳐 있는 느낌을 준다.



말의 눈,

가장 불편한 부분을 비추는 거울 같은 눈


한 여성이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딸을 국제학교에 전학시키기 위해 함께 섬으로 이사 온다. 그렇게 두 모녀는 학교폭력 피해의 기억을 뒤로한 채, 타운하우스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다. 그러나 딸은 새로운 학교에서 또 다른 학교폭력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엄마는 가해 학생의 엄마와 관계를 맺으며 그 사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보지 못했던 감정과 태도,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단순히 나눌 수 없는 관계의 복잡함과 마주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다시 보게 되는 과정에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말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신이 쉽게 가해자라고 여겼던 사람들과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스스로 오래 외면해 왔던 얼굴을 하고 있다. 인간은 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기억을 편집하고, 감정을 덧칠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말의 눈은 설명하지도, 해석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마치 너의 모순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의 눈은 웅덩이 같았다. 깊고 투명하고 맑았다. 수연은 그 눈에서 자신을 보았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수연은 필사적으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 사이 말은 차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외면하는 것들, 숨겨진 불편함


해군 관사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지만 그 안의 삶은 끊임없이 바뀐다. 누군가는 승진해서 떠나고, 누군가는 전역해 떠나고, 또 누군가는 그만두고 떠난다.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 자리를 옮기고 떠나지만, 어떤 불편한 진실은 그 공간 안에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쥐'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쥐를 없애려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누군가 화단의 구멍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은 자칫하면 아파트까지 번질 기세다. 쥐를 없애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불러온다.


여기서 방화범이 누구인지 언급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사모님'이란 인물을 떠올린다. 사모님 같은 인물이야말로 이 공간의 문제를 가장 잘 상징한다. 쥐 구명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해결하기보다는 빨리 없애고 흔적도 지우려는 사람의 조급하고 폭력적인 행위이다.


이 작품에서 쥐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그 공간에 숨어 있던 불편한 진실에 가깝다. 불만, 불공정, 억울함, 혹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택한 침묵 같은 것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것은 보지 않고, 어떤 것은 모르는 척하고, 어떤 것은 애써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쥐처럼 관사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그 불편함이 생기면 결국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 무서운 것은 쥐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온 방식이다. 여기서 쥐의 출현은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신호를 외면하고 지워버리려고만 한다.


나는 이 단편의 마지막 불이, 진실에 외면당한 자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그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없애버리려는 자의 조급한 처리 방식에서 비롯된 파국처럼 읽혔다. 쥐를 없애려는 불은 곧 진실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욕망의 은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숨겨진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채 자기식으로 급히 덮고 지워버리려 하면,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되돌아온다. 화단의 구멍에 붙은 불이 자칫하면 아파트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단편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쥐가 아니라, 쥐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다시 말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은폐하려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파트로 불이 번지는 이 장면이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없애버리려는 사람의 조급한 처리 방식에서 비롯된 파국처럼 읽혔다. 쥐를 없애려는 불은 곧 진실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욕망의 은유처럼 보인다.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채, 자기 방식으로 급하게 해결하거나 아예 은폐하려 든다면 결국 예상치 못한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서늘한 교훈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여기서 가장 이해하려고 애썼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윤진의 의식의 흐름이다. 누군가 쥐를 없애기 위해 화단 구멍에 불을 질렀는데 결과적으로 쥐는 한 마리도 튀어나오지 않고, 사모와 선도 보이지 않는다. 그 불은 관사를 다 태울 기세인데 윤진은 끝까지 '쥐는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한다.


구멍에서 쥐는 한 마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윤진은 그 사실이 의아했다. 쥐는 밤이 되면 움직인다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사모와 선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불기둥은 이제 관사를 모조리 태울 기세로 몸집이 불어났다. 윤진은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쥐의 행방을 생각했다.


그렇게 큰 불이 났는데도 구멍에서 쥐가 한 마리도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분명 쥐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을 텐데, 정작 마지막에 남는 것은 불기둥뿐이다. 작가는 불편한 진실(쥐), 은폐(사모), 폭로(선)가 모두 불길 속에서 한꺼번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만든다. 결국 파국에 이르면, 누가 진실의 편인지, 누가 은폐의 편인지, 누가 문제의 원인인지 하는 이런 구분이 모두 무너지고 모두 불길 속으로 사라진다고 말하는 걸까. 그래서 그 순간 남는 건 오직 불, 즉 파국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일까. 나는 일상에서 이와 같은 일을 종종 지켜본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진실을 들춰내는 사람도 늘 끝까지 중심에 남아 있지 못한다. 때로는 그 사람도 사라지고, 밀려나고, 보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둘러싼 것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 윤진은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왜 여전히 쥐를 찾고 있다. 그녀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파국 속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신만의 절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인가. 결국 사람들이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채 덮고 은폐하려 하면, 나중에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붙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힌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원망과 분노의 끝에서


12년 전 게릴라성 폭우에 둘째 아들을 잃은 혜경과 윤석. 같은 상실을 겪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을 견뎌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혜경은 남편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사격장을 다녔고, 윤석은 직장 상사였던 전 시장 A 씨를 마음속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슬픔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품으며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정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12년 동안 그들이 삶을 버티게 한 힘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비 오는 날, 그렇게 막아두려 했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돌아와 그들과 마주한다. 그 비는 그저 비가 아니었다. 12년 동안 애써 막아 두었던 기억이 다시 삶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혜경은 윤석에게 공기총을 실수로(?) 쏘게 된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감정의 끝을 마주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반복해 왔던 행위가 현실이 되고 나자, 더 이상 사격장에 갈 필요도, 그 분노를 계속 붙들고 있을 이유도 사라진 듯하다.


윤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원망의 대상이었던 A 씨가 실종되면서 그의 분노는 더 이상 향할 곳을 잃은 듯하다. 그리고 비 오는 그날 다시 정주못을 찾게 되면서, 그는 결국 12년 동안 피하고 있던 사건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붙잡고 있던 원망과 분노를 조금씩 내려놓은 듯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는다. 이 평범한 식사장면은 두 사람이 결국 긴 시간을 지나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두 사람이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다기보다, 그 슬픔을 둘러싸고 있던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과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혜경은 윤석에게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홀딱 젖어서 돌아왔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대신 둘은 마주 앉아 졸아붙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비는 늦은 밥까지 그치지 않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침수되었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며 인간이 자신의 감정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슬픔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분노와 원망, 적개심 같은 감정이 함께 따라온다. 문제는 그 감정을 외면하거나 다른 곳으로 밀어 넣을 때 시작된다. 혜경과 윤석처럼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왜곡되기까지 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감정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인정하고 스스로 솔직하게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그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그 감정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2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다시 바라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큰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온전히 마주하기보다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려 회피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의도적인 거짓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원망으로 버티고, 때로는 분노로 살아간다. 그런 모순되고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나 자신에게 조용히 당부한다.



맹점,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것


맹점은 원래 눈의 구조에서 나온 말이다. 눈의 망막에는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맹점'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분, 혹은 보지 못하고 있는 약점이나 허점을 비유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런 맹점을 가진 우리는 때때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실이나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은애가 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시간 아버지를 간병한 딸, 마약 중독 남편의 병원비를 감당하는 아내, 돈 때문에 의료 윤리를 넘는 동업에까지 가담한 의사. 겉으로 보면 은애는 늘 누군가의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처럼 보인다. 돌봐야 할 사람이 있고, 책임져야 할 관계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늘 궁지에 몰려 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삶'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은애의 맹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관계들을 끝내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던 사람 또한 자기 자신이었다. 여기서도 그녀는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지만, 그 감정들은 계속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한 대상들에게 향한다. 그러나 그 감정 속에서 정작 그녀가 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었을까. 눈을 치료하는 안과 의사가 정작 자신의 삶의 맹점은 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어둔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있는 요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끝까지 받지 않고 그것을 바다로 던져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그 전화는 남편과 이어져 있던 삶의 연결선처럼 보인다. 그 연결선을 끊어버리는 행동은, 나에게는 이제 다시는 그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선언처럼 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오랫동안 타인의 삶에 묶여 있던 사람이 비로소 자신의 삶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울릴 것만 같았던 진동은 한참 만에 잠잠해졌다. 은애는 먼바다를 향해 휴대전화를 던졌다. 휴대전화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은애는 전화기가 자취를 감춘 지점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떤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은애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언캐니 밸리

청한동은 언캐니 밸리일까.


청한동은 안전하고 완벽해 보이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 세계가 사실은 기묘하게 일그러진 장소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는 세계가 얼마나 쉽게 낯설고 불안한 공간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야간 택시 운전을 하는 크로키 화가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언캐니 밸리'는 본래 과학적 용어다. 익숙한데 동시에 섬뜩하고, 현실 같은데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구간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한동은 이 단편의 언캐니 밸리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안정적인 장소이지만, 그 안에는 폭력, 불안,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이 숨어 있는 어긋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로 택시 승객들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리는 크로키 화가이다. 그는 사람의 숨겨진 얼굴과 일그러진 모습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불편해한다. 그런 그가 청한동에서 마주한 것도 그 안전한 표면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일그러진 세계이다. 겉으로는 질서 있고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염산 테러 사건은 그 세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그가 태워주었던 요가강사는 어쩌면 그 저택에서 보지 말았어야 할 무언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눈이 공격당했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는 끝내 사건의 진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공백 때문에 청한동은 더 기묘하고 불안한 공간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청한동이라는 상징적인 장소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언캐니 밸리인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그 저택의 담을 넘으려 한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 화가로서의 본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일그러진 감정을 찾아내듯이, 그 완벽해 보이는 청한동 안에 숨겨진 뒤틀린 진실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보지 않는 편이 안전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질서와 안정이 유지되는 곳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는 세계이다. 청한동이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낯선 세계여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계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담을 올려다보다가 불룩 튀어나온 자갈 위에 왼발을 올린다. 자갈은 시멘트에 단단히 박혀있다. 발에 힘을 주면서 두 손을 뻗어 어깨쯤 위치한 자갈을 하나씩 움켜쥔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아귀에 꽉 힘을 준다. 담을 반쯤 올라갔는데도 방범 경보음은 울리지 않는다. 담 너머에서 개가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소리 소문 없이,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 불안


예고 3학년이던 주인공은 1년 동안 청한동 저택 지하방에 세 들어 살며, 완벽하고 안전해 보이던 상류층의 삶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여름 장마로 저택이 침수되고, 집주인 성박사의 남편과 아이들마저 떠나면서 그 집의 고요한 균열이 드러난다. 돈도 없고 실기도 못한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시간이 흘러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동창의 독주회를 계기로 그 시절의 기억과 다시 마주한다.

그녀는 청한동 저택에서 '겉보기와 실제는 다르다. 그리고 안전한 삶이라는 건 환상일 수 있다'와 같은 불안의 감각,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현재의 삶 사이에 남아 있는 공백,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소리 소문 없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다. 그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약국에서 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데놀을 하루에 한알씩 지속적으로 삼켰는지 모른다.


청한동을 떠난 이후, 주인공은 오래도록 불안에 지배당해 온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 불안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없애려는 쪽으로 살아간 듯 보인다. 불안을 불러오는 세계였던 피아노를 그만두고, 더 안정적인 삶으로 이동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착한다. 겉으로 보면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불안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삶의 외형을 바꾼다고 해서 감정의 뿌리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약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정신적으로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도록 자기 안에 남아 있던 불안을 끝내 제대로 해석하고 해결하지 못한 결과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더 안전한 선택을 하고, 더 익숙한 길을 고르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삶을 꾸리려 한다. 그러나 불안은 단순히 피한다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 깊은 곳에 남아, 삶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모호함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불안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내가 왜 그 감정 앞에서 자꾸만 다른 길로 달아나려 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의 불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불안을 피하는 삶은 안정되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정이 내 삶의 얼굴이 아닐 때, 그 모호함은 불안보다 내 삶에 더 큰 균열을 가져올 수도 있다. 다행히도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불안을 피해 만든 지금의 안정된 삶에서 자기 자신에게 다시 닿으려는 아주 조용한 시작이 감지된다. 닫아두었던 피아노를 열고, 피아노를 처음 배우던 때를 떠올리고, 아이를 끌어안아 빰에 입술을 비빈다. 불안은 여전하지만 그녀가 자기 다운 삶의 방향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결말처럼 읽힌다.



뼈와 살,

자신이 지나온 흔적 속에서 창작의 모티프를 찾다


곧 철거될 시영아파트 작업실을 후배 이선과 함께 쓰는 주인공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도 창작을 이어가는 후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2년 전 후배의 전시를 본 뒤 느꼈던 질투와 자괴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후배가 잠든 밤 몰래 백팩과 노트를 뒤지며 자신의 개인전에 쓸 아이디어를 찾으려 든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창작자로서의 불안과 결핍, 그리고 타인의 가능성을 탐내는 초라한 마음이다. 창작의 세계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가난만은 아니다. 더 젊고, 더 살아 있는 타인의 가능성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이 단편의 제목「뼈와 살」과 연결해 보면, 이 야기는 예술가의 내면이 발라지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체면, 선배, 예술가라는 겉모습 같은 '살'이 후배의 노트를 들여다보는 순간 벗겨진다. 질투와 결핍, 불안과 초라함 같은 감정이 '뼈'처럼 드러난다.


프로젝트 지원금 선정에서 탈락한 데다 퇴거해야 하는 시점까지 겹치면서 후배 이선은 자연스럽게 그 집을 떠난 듯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마치 집이 그녀를 집어삼켜 벽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사라짐은 그녀를 바라보던 주인공의 내면을 반영한 듯 보인다. 이 이야기는 결국 타인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비추는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드러난다. 철거 중인 시영아파트 공사장에서 주인공은 한때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과 시간을 떠올리며, 철거 공사장의 파편을 줍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작품 재료를 사려고 가져온 가방에 담는다. 이 장면은 그녀가 자신이 지나온 삶의 폐허와 잔해 속에서 비로소 창작의 모티프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뼈와 살」은 더욱 선명해진다. 철거된 건물의 파편은 그 공간의 뼈와 같고, 그곳에 얽힌 기억과 사람들의 삶은 살과 같다. 결국, 주인공은 타인의 아이디어나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폐허에서 창작의 재료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이 완전히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창작의 방향이 비교와 질투에서 자기 삶으로 바뀐다.


나는 공사장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건물의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시멘트 모양의 돌덩이, 방문 손잡이, 찢어진 이불 조각, 유리 파편, 플라스틱 바구니 같은 것들을 하나씩 모았다. 현장 소장이 나를 향해 안내봉을 거칠게 휘둘렀다. 나는 백팩에서 일회용 비닐 가방을 꺼내어 건물의 파편들을 담았다. 재료를 사려고 들고 온 가방이었다.



남은 아이,

떠날 수 없는 사람


이 마지막 단편은 제철소 폐쇄라는 지역의 불안과, 아들 선우의 성추행 혐의 사건이 겹쳐지며 시작된다. 긴 공방 끝에 선우는 형사처벌은 면하지만 서면사과와 출석정지, 특별교육 등의 징계를 받고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건의 결론이 아니다. 그 이후를 살아내는 엄마의 시간인 것 같다. 아들을 향한 실망과 연민, 수치심과 방어 본능, 분노와 죄책감이 한꺼번에 뒤엉킨 채 무너진 일상을 견뎌내는 엄마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더 길고 지난한 싸움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남은 아이」는 선우라기보다 태이를 더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선우의 가족은 그 사건 이후 해전시를 떠난다. 하지만, 태이는 할머니와 엄마를 도우며 그곳에 남아 살아가야 하는 아이다. “태이는 아이들이 모두 학교를 떠나도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었다”라는 책 속의 문장은,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와 기억 속에 끝내 남겨지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선우가 사건의 흔적을 안고 떠나는 아이라면, 태이는 그 사건과 그 도시의 무게를 모두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 하는 '남은 아이'다.


선우가 해전시를 떠나기 전날 밤 태이와 한 시간 동안 놀이터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과였을 수도 있고, 변명과 사과 사이의 어정쩡한 말들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사건과 상관없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둘만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처리한 절차와 징계와는 별개로 선우와 태이는 마지막으로 그들만의 어떤 시간을 함께 통과했을 것이다.


해전시에서 마지막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엄마는 태이가 해수욕장에서 모아두었던 불빛에 반짝였던 유리 조각들을 떠올린다. 그 깨진 조각들은 선우 엄마에게는 태이가 감당해야 했던 상처와 기억의 형상처럼 보인 듯하다. 엄마가 가슴 한가운데 돌이 누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은 단지 자기 아이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이라기보다 태이라는 남은 아이의 고통이 비로소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처럼 읽힌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가슴팍을 토닥이는 몸짓은, 자기 자신을 달래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그 '남은 아이'를 토닥이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화단에서 파낸 태이의 유리조각들이 그 아이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엄마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선우 엄마로서 방어하고 버티고 흔들렸다면,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태이라는 아이의 아픔까지 자기 안으로 들이게 된다. 그래서 태이의 여러 조각난 아픔이 엄마 안에서는 하나의 무거운 돌덩이처럼 응축되어 내려앉는다.


마지막 불꽃이 터진 뒤 화면은 연기가 머문 하늘을 비추었다. 나는 태이가 모은 유리 조각을 떠올렸다. 가슴 한가운데를 주먹만 한 돌이 누르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나는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닌 나의 손으로 가슴팍을 토닥였다. 그러고는 다시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책을 덮으며...


『타운하우스』의 첫 번째 스토리 「말의 눈」에서 수리공은 이렇게 말한다.

타운하우스가 다 이 모양이지. 우리들은요, 절대 이런 집 안 살아요. 멍청이들만 산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그저 하자가 많은 집에 대한 투덜거림처럼 들렸다. 그러나 단편집을 끝까지 읽고 나니, 그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미리 암시하는 복선처럼 느껴진다.


각 단편은 각기 다른 타운하우스처럼 문이 조금씩 열려 있어, 들여다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이 타운하우스 단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독자는 자신 안의 그림자와도 마주하지 않을까 싶다. 치욕, 절망, 슬픔, 불안, 욕망, 폭력과 같은 자신의 문제들 말이다. 여기서 집은 평화롭고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숨겨둔 맹점을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다른 사건과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을 흐르는 정서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겉으로는 안전해 보이는 집과 동네, 가족과 관계, 직업과 일상 속에는 이미 작은 금이 가 있고, 사람들은 그 균열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비가 집 안으로 들이치고, 쥐가 숨어들고, 설명되지 않는 폭력이 일어나고, 오래 묻어둔 감정이 스며 나오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타운하우스란 단지 어떤 주거 형태의 이름이 아니라, 불안을 안은 채 겨우 버티고 있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의 소설이 나에게 뭔지 모르겠지만 강한 잔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각각의 스토리에서 일어나는 그 균열을 거창한 파국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 이를테면 질투와 원망, 죄책감과 적개심, 불안과 자기기만 같은 것들이 얼마나 조용하고 집요하게 그들의 삶을 잠식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단편집에서 무너지는 것은 그들이 사는 집만이 아니다. 사람들 안에서 간신히 유지되던 믿음과 관계,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역시 소리 없이 금이 간다. 『타운하우스』는 바로 그 순간들을 붙잡는다. 우리가 무사하다고 믿는 동안에도 삶은 이미 조금씩 소리 소문 없이 젖고 있었고,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 역시 생각보다 훨씬 취약한 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타운하우스』를 다 읽고 덮는다. 나에게 위협적으로 공포를 들이밀진 않는다. 대신 불편함과 불안을 내 귀에 속삭이며 함께 젖어들게 만든다. 마치 내 일상도 이렇게 잠식될 것 같은 분위기로 나를 몰고 간다. 각 사건의 줄거리보다도, 그 사건들을 통과한 사람들의 불안과 취약함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작가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집과 동네, 관계와 일상,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마저 얼마나 쉽게 균열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파국 자체가 아니라, 그런 균열과 불안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며 다음 삶을 살아내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늘 무언가를 보지 못한 채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물들은 무너진 자리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고, 다시 함께 밥을 먹고, 유리조각을 묻고, 파편을 주워 담고, 때로는 누군가를 조용히 토닥이며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에게는 각 이야기의 이러한 몸짓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심으로 보였고 동시에 희망으로 느껴졌다. 상처와 불안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상처와 불안이 있지만 그들의 삶이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신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결국 삶은 나아가기 위해서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균열과 불안들은 빠른 시간에 그리고 단박에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낯선 균열과 불안, 그 앞에 멈춰 서서 자신이 외면했던 것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 작업은 쉽지 않다. 아주 느리고 그리고 지루하며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게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 끝내 자기 몫의 하루를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함께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을 수도 있고, 철거 공사장에서 잔해들을 주워 담을 수도 있고,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고, 피아노 뚜껑을 열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변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자신에게 온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내내 견디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여덟 편의 소설 모두 치욕, 절망, 슬픔, 불안 혹은 불온한 욕망으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 삶의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되지 않듯 이 소설들 속 인물들도 그저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수요일 연재